제243화
‘승산, 있는 거겠지?’
자신만만하게 트리스탄과 자카리에게 달려들긴 했지만, 소울나이츠 두 명을 상대로 그들을 다치지 않게 제압하는 건 내게도 버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렵다고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공중에 도약한 나는 바주카포를 껴안은 채 둘을 내려다보았다.
“각자의 능력으로 공격을 상쇄해라.”
루카스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트리스탄이 내게 날리는 붉은 검기에 맞춰 바주카포의 입구를 틀었다.
“잔류는 알아서 잘 피해요, 트리스탄.”
부웅-! 쾅!
“……!”
내가 날린 써머나이츠의 오러구에 트리스탄의 잘생긴 미간이 크게 흐트러진다.
‘자신의 검기와 동일한 성질의 오러구를 날려 대니 놀랄 수밖에 없겠지.’
내 바주카포는 내가 원작의 주요 인물들의 능력을 고스란히 발휘할 수 있게 하는 무기였다.
원작책을 흡수한 바주카포에 매달린 루카스가 붉은 안광을 반짝이며 입을 연다.
“돌격!”
나는 나와 트리스탄의 싸움을 조금은 즐기는 것 같은 루카스의 모습에 기가 막혀 고개를 저었다.
“트리스탄을 다치게 하진 않을 거야, 루카스.”
“너와 결혼하겠다고 설치는 머저리 중 한 명일뿐인데 저 녀석의 부상까지 조심해야 하나?”
내 말에 불만을 품은 듯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루카스의 보송보송한 솜뭉치 팔에 모였던 마나가 조정되었다.
“내 따님은 마음이 약하시니 어쩔 수 없지.”
나는 루카스가 흘리는 말에 흠칫 놀라 시선을 틀었다.
“응?”
나는 루카스를 가족으로 여겼지만 그는 나를 자식 취급하는 걸 꺼리는 눈치였으니까.
“……루카스, 지금 뭐라고 했어?”
“못 들었으면 됐다.”
‘인형 털이 빨개지기도 하는 구나.’
나는 갈색 털이 촘촘하게 나 있는 그의 귓불이 붉어진 것을 확인하고 슬며시 입을 열었다.
“이번 일만 해결하고 피크닉이라도 갈까? 가족의 달이잖아.”
내 질문에 대답하진 않았지만, 나는 루카스가 귀를 쫑긋 세우는 것을 긍정의 의미로 해석하고 배시시 웃었다.
“들뜨지 말고 집중해. 트리스탄은 몰라도 자카리는 쉬운 상대가 아니니까.”
웃는 나를 힐끔한 루카스가 엄하게 꾸짖는다.
루카스의 말마따나 트리스탄의 오러는 내 바주카포 마탄으로 상당히 상쇄할 수 있었지만, 자카리의 그림자는 갈래갈래 찢어지며 우리를 압박하고 있었다.
딱 원작만큼만 성장한 트리스탄과 달리 자카리는 엘릭서를 찾는 동안 강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원작보다 강해진 건 자카리만이 아닌 걸.’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검을 겨누는 자카리를 피하며 거대한 연성진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뇌- 제네브.”
작게 주문을 외우자 발밑에서 뻗어 나온 눈부신 빛줄기가 공간 전체를 비춘다.
“너는 세상에 떠도는 모든 아스테르의 마나를 사용할 수 있다.”
나는 루카스의 조언을 상기하며 긴장한 어깨를 껴안았다.
성인이 되기도 전에 대마법사의 칭호를 얻을 만큼 이례적인 천재인 루카스는 내 영혼, 그러니까 내게 속한 마나가 이세계의 것임을 간파해 냈다.
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처럼 자유로운 아스테르 마나의 속성과 이세계의 영혼이라는 본질이 만나 내게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이질적인 마나를 끌어당길 수 있는 특성을 지녔다는 것까지.
‘이 힘이라면 부활한 에티모스까지 대적할 수 있을 지도 몰라.’
나는 부글부글 끌어 오른 마나를 연성진의 꼭짓점에 쏘아 보냈다.
검은 자카리의 오러와 대조되는 새하얀 빛이 그의 손목과 발목을 거미줄처럼 칭칭 감기 시작한다.
나는 움직임이 막힌 자카리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오라버니.”
내 부름에 빛줄기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던 자카리가 고개를 든다.
나는 흐리멍덩한 그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 짜냈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에요.”
“……집?”
가까이에서 마주 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상처가 눈에 들어온다.
“어쩌다 다친 거예요?”
내가 자카리의 볼에 움푹하게 패인 흉터로 손을 뻗자 그는 움찔했지만, 나를 피하지는 않았다.
“엘릭서를 찾기 위해 만다르의 숲에 들어갔었다. 그곳의 노움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공격하는 바람에 피할 도리가 없더군.”
“……미안해요.”
나는 자카리의 대답에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진작 엘릭서를 포기했더라면 그가 다칠 일도 없었을 테니까.
“황제 폐하를 위해 입은 부상인데 어째서 네가 사과하는 건가.”
멍하니 내 말에 반박하면서도 기시감을 느낀 듯 자카리가 눈살을 찌푸린 순간이었다.
“멍청하게 서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자카리! 당장 검을 움직여! 레오노라를 죽여 버리란 말이야!!”
나와 자카리 사이에 끼어든 아이네스가 발악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네놈들이 죽이지 못하겠다면 내가 죽이겠어!!”
내 오러에 가로막혀 움직이지 못하는 자카리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 아이네스가 내게 달려들기 위해 몸을 튼다.
그녀는 손톱 끝에 마나를 모아 짐승의 발톱처럼 긴 오러를 뽑아냈다.
검 한번 쥐어 본 적 없는 여자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기엔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
끼릭- 끼리릭-.
지면과 맞부딪힌 그녀의 손톱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내 목을 노리기 위해 다가온다.
‘자카리와 트리스탄을 동시에 제어하면서 아이네스까지 막아내는 건 힘들 것 같은데.’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가오는 아이네스의 모습에 흠칫 몸을 떤 내가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모으자, 그녀는 기회라도 잡은 양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결국 결말은 바뀌지 못한 거야.”
지척에 다가온 아이네스가 거대한 손톱을 들어 올린다.
“넌 내 손에 죽을 운명이야, 레오노라.”
콰콰콰콰쾅-!!!
그 순간, 거대한 아치 형태의 천장이 무너지며 새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 피하셔야 합니다!!!”
아이네스 위로 쏟아지는 대리석 잔해에 기겁한 병사들이 몰려들었지만,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거대한 함선-믿기지 않았지만, 정말로 배였다-이 천장에 박히고 말았다.
콰직.
곧이어 들려오는 살이 짓뭉개지는 아찔한 소리와 함께 무너진 건 내가 아닌 아이네스였다.
“이게 누구 딸보고 죽으라 마라 입을 놀려?”
아이네스의 뒤통수를 군화로 짓밟으며 등장한 노엘이 앞으로 쏟아진 긴 머리를 짜증스레 넘긴다.
“뭔데 내 딸보고 죽으래?”
아이네스의 직위를 묻는 거라면 윌레닌 제국의 황제라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노엘은 아이네스가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 발버둥 치는 그녀를 꾹 짓누르며 한쪽 발로 바닥을 밟았다.
“엄마 왔다, 레오노라.”
성인인 딸을 뒀다기엔 너무 젊어 보이는 노엘은 벙 찐 황군들을 향해 뾰족한 레이피어를 들어 올렸다.
“뭐 하고 있어? 박살 내.”
노엘의 명령에 그녀를 따라 황성의 하늘에 거대한 함선을 정박한 해적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나는 하늘에 둥둥 떠 있는 배에 어처구니가 없어 바라보다 나를 꼭 끌어안는 노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배를, 기어코 육지까지 끌고 오셨네요.”
“내 전력은 함선에 있으니까, 선황자가 도와줬지.”
한쪽 눈을 찡긋한 노엘은 루카스가 기특하다며 그의 북슬북슬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아빠도 곧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또 남들 앞에서 싸우진 마세요.”
가스파르와 노엘은 종종 다투는 편이었다.
“원래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란 말이 있지.”
내 말에 코를 찡긋한 노엘이 날렵한 검과 함께 반역자의 등장을 알리기 위해 피리를 부는 병사를 향해 달려 나간다.
“……노엘, 노엘 이아론까지 원작에서 벗어났다는 게 말이 돼?”
하하.
하하하.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네스가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한다.
“나는 아무리 삶을 반복해도 엄마 얼굴 한번 볼 수가 없었는데!”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아이네스의 목소리는 마치 절규처럼 들렸다.
“이건 불공평해! 불공평하다고!!”
나는 바닥을 쾅쾅 내려치는 아이네스를 내려다보다 루카스를 꼭 껴안았다.
“네가 선황후를 만나지 못한 건 나도 유감이지만, 그 비극이 네게 세상을 멸망시킬 권리를 주는 건 아니야.”
어머니 없이 자란 건 원작의 레오노라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아이네스는 그런 레오노라를 늘 이용만 하다 버렸다.
“내게는 너를 막을 힘이 있고, 난 널 반드시 막아낼 거야.”
내 결연한 의지가 담긴 말에 비죽 웃은 아이네스가 내 손에 집결되는 마나를 바라봤다.
“다른 아스테르의 마나를 사용하겠다면 나도 어쩔 도리가 없지.”
아이네스는 준비가 덜 되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속삭이듯 중얼거리며 황성의 바닥을 내리쳤다.
“나도 모든 회차의 아이네스를 소환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