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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1화 (226/486)

제241화

“물러서, 레오노라.”

5년 만에 조우한 자카리의 행동에 당황한 내가 입을 벙긋하기도 전에, 달려 나온 실비가 나와 자카리 사이를 막아섰다.

“이 인간은 네가 알던 자카리 형님이 아니다.”

서늘한 얼굴로 검을 뺀 실비의 주위로 윈터나이츠 특유의 새하얀 오러가 냉기처럼 맺히기 시작했다.

채캉, 캉!

그런 실비의 새하얀 검신에 대응하듯 몸을 뒤로 뺀 자카리가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실비에게 달려든다.

“다시 한번 반복하겠다. 나는 레오노라라는 여자의 목만 가져가면 된다. 불필요한 피를 흘리고 싶지는 않아.”

“너 따위에게 목은커녕 피 한 방울도 내줄 수 없으니 꺼져.”

기계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자카리를 몰아세운 실비가 빠르게 팔을 치켜든다.

5년 전이라면 실비는 자카리의 적수가 되지 못했겠지만, 5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특훈을 감행한 실비의 오러는 자카리의 검기보다 훨씬 예리했다.

“실비! 지금 뭐 하는 거야!”

결국 나는 실비를 말리기 위해 그들 사이로 몸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자카리는 자카리야. 다치게 하는 건 안 돼.”

머리를 쳐서 정신 차리게 하는 거라면 몰라도, 오러를 두른 검으로 상대하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자카리는 만만치 않은 실력자인지라 실비도 마냥 봐주며 상대할 수는 없을 테니까.

“나는 폐하께 노스 왕국 공주의 목을 가져오라는 명을 받았을 뿐, 너와 대치할 필요는 없다고 몇 번 말하나.”

자카리가 자신을 막아서는 실비가 귀찮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찡그린 채 자신의 목을 노리는 검기를 피해 뒤로 물러난다.

“지금 제국 황제가 말하는 공주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캉! 카강!

실비는 자카리의 말에 헛웃음을 지으며 제 형님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귓가를 찢을 듯이 울려 퍼진다.

“제 동생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다니 머저리가 틀림없군.”

실비는 도통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는 자카리를 바라보며 검을 붙잡은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팔이라도 분질러 놔야 정신을 차리겠나.”

실비의 검끝에 맺힌 새하얀 눈송이가 언덕 위를 구르기라도 한 것처럼 커지기 시작한다.

쾅! 콰콰쾅-!

나는 그가 자카리에게 날린 검기가 왕성 외벽을 부수는 아찔한 장면을 목격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싸움을 누가 단순히 칼부림이라고 생각하겠어.’

원작에서는 제국 최고의 기사라고 묘사되는 자카리와 현재 노스 왕국의 전군을 통솔하는 최강의 윈터나이츠 실베스테르의 대결이었다.

이러다가 왕성이 전부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예감에 나는 실비에게 검기를 날릴 준비를 하는 자카리 앞에 나서서 두 팔을 펼쳤다.

“레오노라!”

놀란 실비가 나를 막으려고 달려왔지만, 나는 그에게 오지 말라는 손짓을 한 뒤 자카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레오노라 에스트렐라 드 하차니아를 찾는다고 하셨죠.”

“그래.”

“제가 레오노라예요.”

내 대답에 자카리의 표정 없는 얼굴이 모호하게 굳는다. 그는 나를 바로 끌고 가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

“네가, 레오노라라고.”

“네. 오랜만이에요, 자카리 오라버니.”

나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를 향해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라버니가 무사해 보여서 정말 다행이에요.”

자카리는 자신을 경계하지 않는 내가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짙은 눈썹이 한데 모이는 것조차 그리웠기에 나는 내게 손을 뻗는 그를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카리의 손이 내게 닿기도 전에 한겨울을 몰고 오기라도 한 듯 차가운 실비의 팔이 나를 감싸 안는다.

사아아-.

얼음 폭풍이 나와 자카리 사이를 완전히 휩쓸기도 전에 그는 자취를 감춰 버렸다.

“……사라졌어.”

나는 자카리가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자리를 가리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만났는데, 사라져 버렸다고.”

실비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내가 걱정된다는 듯 나를 덥석 껴안았다.

“괜찮다, 리니.”

실비도 아이네스에게 세뇌라도 된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자카리의 행동이 당황스러울 터였다.

“내가 어떻게든 네 눈앞에 멀쩡한 상태로 대령할 테니까.”

그럼에도 그는 내 얼굴을 제 단단한 가슴에 누른 채 내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위로했다.

“응, 나 괜찮아.”

나는 행여 실비가 내 걱정에 제대로 왕국을 지키지 못할까 봐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방긋 웃었다.

그러자 나를 꼼꼼히 살핀 실비의 얼굴이 아프게 흐려진다.

“그런 우울한 얼굴 하지 마. 나 정말 괜찮으니까.”

나는 옅은 주름이 잡힌 실비의 이마를 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는 실비도 있고 에녹도 있고, 아빠랑 루카스에 엄마까지 있잖아.”

북부는 지난 5년간 우리에게 안온한 집이 되어 주었고, 노력 끝에 우리는 사람들을 지킬 든든한 요새를 완성할 수 있었다.

“곁에 아무도 없는 건 자카리 오라버니야.”

나는 배신감에 휩싸여 초조한 입술을 짓씹는 실비를 말리며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가 자카리 오라버니를 구해야 해, 실비.”

자카리는 가뜩이나 나와 달리 어릴 때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만 했던 사람이다.

그런 자카리가 아이네스의 계획에 휘말려 지금까지도 가족 옆에 있지 못하고 헤매야만 한다는 사실에 심장께가 시큰해졌다.

“괜찮다면서.”

실비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내 눈가를 툭 치듯 닦는다.

“아…….”

후두둑.

나는 그제야 바닥을 적시는 물방울을 발견하고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운 거 아니야. 그냥 먼지 들어가서…….”

“그래.”

다정한 실비는 그런 나를 다그치진 않았다.

* * *

별이 쏟아질 것처럼 많은 밤이었다.

빠져들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은하수를 멍하니 올려다보던 나는 오늘도 내 곁을 지키고 선 히스를 돌아봤다.

“히스, 자?”

자지 않고 있다는 걸 뻔히 보면서도 묻는 내 말에 히스가 여상히 웃으며 대답한다.

“아뇨.”

나는 그런 히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넌 나보다도 마나의 움직임에 기민하니까 이미 느끼고 있겠지만-”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네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제국 쪽에서 휘몰아치는 마나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네. 무언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어 주며 히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얌전히 고개를 수그리는 히스의 목 뒤에서 반짝이는 목줄을 발견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버리라니까.”

“주인님이 주신 물건 중에 제가 버릴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주인님 소리도 그만하고.”

나는 히스의 말에 고집스레 눈을 빛내며 그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히스.”

내가 입술을 달싹이는 모습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히스가 다급히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젓는다.

“말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나는 못된 주인이라 히스가 듣고 싶지 않아 하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넌 이만 이곳을 떠나.”

“싫습니다.”

“떠나야 해. 난 네가 다치는 게 싫어.”

동맹국이었던 제국에게 배신당해 멸망한 아크레아의 왕족에게 내 욕심껏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가족을 위해 원작을 바꾸겠다는 내 욕심으로 히스까지 위험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네게 나를 도울 의무 같은 건 없으니까, 죄책감 느끼지 말고.”

히스는 내 단호한 목소리에 입술만 달싹일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가 너를 자유롭게 해 줬다는 것에 부채감을 느끼는 건 알고 있어.”

나는 말 없이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히스의 시선을 피하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간 내 곁을 지켜 준 것만으로도 넌 네 몫을 다한 셈이야.”

‘게다가 히스를 도운 의도 또한 순수하지 못했으니까.’

“부채감 따위가 아닙니다. 당신은 어째서 지금까지 그 사실을 모르는 겁니까.”

나는 낮은 히스의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했다.

“제가 지금 죄책감을 느끼는 건 당신이 나를 구원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한숨처럼 입을 연 히스가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나 따위가.”

히스는 분명 무표정했지만, 나는 어쩐지 그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도 괴물도 되지 못해 어중간하게 남은 나 따위가.”

내 생각을 확인해 주기라도 하듯, 히스의 목소리가 잘게 떨려 온다.

“이렇게 당신을 만지고 싶어서.”

“…….”

“그래서 느끼는 죄책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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