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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9화 (224/486)

제239화

생각보다 탄탄한 왕국의 자금력에 놀란 사람들이 속닥이는 소리가 티하우스에 울려 퍼진다.

“노스 왕국이 어디서 이렇게 많은 자금을 끌어모은 거지?”

상대적으로 젊은 신흥 귀족의 말에 옆에 선 노귀족이 혀를 차며 입을 연다.

“자네, 독립 직전에 하차니아 공작가의 유명세를 모르는가?”

“하차니아 공작가요?”

“그래. 제랄드 아티팩트 공방이며 자르파라 상단에 자르사워 용병 길드까지, 대륙에서 가장 돈 되는 사업이란 사업은 전부 혼자 독점했었네.”

“자르파라 상단이라면 자르파라 거상의 것이 아닙니까?”

상인계의 전설이나 마찬가지인 자르파라가 언급되자 상인 출신이 태반인 신흥 귀족들의 얼굴에 열기가 돌기 시작했다.

“자르파라 거상이 아주 예전에 하차니아 공작가에 충성을 맹세했다는 걸 지금 알았나? 정세에 눈이 멀어도 정도가 있는 법이거늘.”

노귀족이 자신을 무시하자 기분이 상한 젊은이는 아이네스를 언급하며 숨을 씨근거렸다.

“하지만 분명 폐하께서 노스 왕국은 멸망 직전의 가난한 나라라고 하셨습니다.”

젊은 남자의 말에 아이네스와 제법 친분을 쌓은 다른 귀족이 맞장구를 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분명 그렇게 들었소. 그 많던 재산은 독립하는 데 전부 탕진했다고!”

‘으이구, 그걸 다 믿었다고?’

노스 왕국의 흠집을 잡기 위해 무슨 말을 못 했을까.

아이네스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귀족들이 의아해하는 모습을 흘깃한 나는 손짓 한 번으로 티하우스의 정문을 개방했다.

“자, 그럼 변제를 마치신 분들은 이만 돌아가 보셔도 좋지만-”

아룬델 티하우스는 황도, 아니, 제국 전역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티하우스였다.

은은한 아로마 향기가 심신까지 평온하게 해 주는 공간을 나서는 게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귀족들을 향해 나는 생긋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돌아가시기 조금 아쉽지 않나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으니 티하우스를 조금 더 즐기다 가세요.”

그러자 내가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듯 마샬 백작 부인이 코끝을 찡긋한다.

“공주님, 아룬델 티하우스라면 입장료만 해도 300골드를 지불해야 하는 아주아주 고급스러운 살롱이랍니다. 부대시설을 이용하려면 돈을 더 내야 한다고요.”

“흐응? 제가 말씀 안 드렸나요?”

나는 백작 부인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천연덕스럽게 입을 가렸다.

“아룬델 티하우스는 제가 개인적으로 소유한 건물이랍니다. 부인은 오늘 제 손님이시니 당연히 무료로 모든 부대시설을 이용하실 수 있어요.”

“저, 전부 무료라는 말씀이신가요?”

“네. 티하우스의 유리 온실, 테라스에 마련한 야외 욕조, 그리고 온돌을 깐 휴식 공간까지 사용하실 수 있답니다.”

나는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뜬 백작 부인을 바라보며 무심히 말을 덧붙였다.

“최근 벨네르니 출신의 유능한 치료사들까지 고용했으니 불편한 곳이 있으면 한번 보여 주세요.”

“가, 감사해요.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아까 티하우스에 들어설 때와는 180도 뒤바뀐 태도였다.

나는 그런 백작 부인의 얄팍함을 모르는 체 헨리에게 턱짓했다.

“헨리, 가장 높은 등급의 코스를 즐기다 돌아가실 수 있도록 안내해 드려.”

“여보! 우리 그냥 왕국으로 망명해요!”

그 정도로 지조가 없는 사람이어야만 내 꼬임에 쉬이 넘어올 테니까.

‘이건 시작에 불과해, 아이네스.’

* * *

“귀족 절반이 왕국으로 망명을 신청했다고?”

아멜리아에게 서류를 받아 든 아이네스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네, 폐하. 폐하의 즉위 이후 노스 은행에서 자금을 융통한 귀족들의 수가 꽤 되는 모양입니다.”

“제국의 귀족들이 왜 왕국에 속한 은행 따위에서 돈을 빌려?”

“폐, 폐하께서 징수하신 세금을 감당하지 못한 귀족들이 적지 않아-”

“그래서 지금 아이네스 잘못이라는 거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세금을 감당하지 못한 건 귀족들이 게으른 탓이지요!”

다급히 변명한 아멜리아는 아이네스가 제 성질을 못 이기고 또 자신에게 손찌검을 할까 두려워 팔로 제 얼굴을 가렸다.

“후우.”

다행히 아멜리아의 대답에 한풀 꺾인 아이네스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칼을 쓸어 올릴 뿐이었다.

“뭐, 괜찮아.”

가볍게 대답하는 아이네스의 얼굴에는 묘한 화색이 돌고 있었다.

분홍 장미처럼 화사한 얼굴이 독사처럼 느껴져서 침을 꿀꺽 삼킨 아멜리아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외, 외람되지만… 어째서 괜찮다고 말씀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멜리아가 쓸데없는 질문을 하면 아이네스는 대답 대신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리곤 했지만, 오늘의 아이네스는 유독 기분이 좋아 보였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용기를 낸 아멜리아에게 눈썹을 들어 올린 아이네스는 선심 쓰듯 입을 열었다.

“어차피 레오노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거니까.”

“네?”

“엘릭서가 이제 곧 아이네스의 손에 들어올 거거든.”

어안이 벙벙해진 아멜리아의 물음에 생긋 웃으며 대답한 아이네스가 협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자 어두웠던 침실이 순식간에 밝아진다.

“이제 나와도 좋아.”

아이네스의 명령에 방이 밝아진 만큼 짙게 가라앉은 그림자 사이로 매끈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낸다.

“……저분은!”

키가 헌칠한 남자는 아멜리아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그림자의 정체를 알아차린 아멜리아가 놀라 턱을 벌렸다.

“이리 와.”

아이네스가 나른한 목소리로 내린 명령에 모습을 드러낸 남자가 그녀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온다.

“인사해, 아멜리아. 아이네스의 새로운 인형이야.”

남자를 자랑스레 소개한 아이네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림자의 머리칼을 움켜잡았다.

* * *

“……갑자기 징그러워졌군.”

트리스탄은 자신보다 아주 조금, 아주 티끌만큼 눈높이가 높아진 히스를 마주한 채 미간을 좁혔다.

‘감히 나보다 키가 커지다니.’

불쾌한 듯 얼굴을 굳힌 트리스탄은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다는 듯 무심히 고개를 끄덕인 히스가 그를 향해 팔을 뻗는다.

“이리 주십시오.”

“뭘.”

“아시지 않습니까.”

히스가 받고자 하는 건 쥐죽은 듯 잠이 든 레오노라였다.

루에르병의 증세가 심해질수록 레오노라는 활동 중 쓰러지는 일이 잦아졌다.

솔로아 공작령에서 일어난 문제로 레오노라와 상의하던 트리스탄은 대화 중 갑자기 정신을 잃은 그녀를 의료원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그러나 트리스탄은 히스가 달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

“……원래도 이렇게 쓰러지는 일이 잦은가?”

“요즘 일이 많아 기력이 쇠하셔서 그렇습니다.”

레오노라의 병증이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감추며 대답하는 히스의 말을 트리스탄은 먼지 한 톨 만큼도 믿지 않았다.

“기력이 쇠하다고 사람이 이렇게 픽픽 쓰러진다고.”

“네. 이만 주십시오. 제가 대신 옮기겠습니다.”

히스는 미동도 없는 트리스탄에게 레오노라를 빼앗으려는 듯 팔을 더 멀리 뻗었다.

그러나 트리스탄은 히스의 손을 피해 의식이 없는 레오노라를 꼭 끌어안은 채 뒤로 물러났다.

“아니, 됐다.”

우으응.

옅은 신음을 흘리는 레오노라가 안쓰러워 입술을 깨문 트리스탄은 고집스레 히스를 밀어냈다.

“도움은 거절하지. 힘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거라면 마구간에 가서 소일거리라도 해라.”

트리스탄의 말에 히스의 인형처럼 무감한 얼굴 위로 처음으로 감정이 떠오른다.

치직.

치지직.

두 남자 사이로 튀는 스파크가 레오노라의 뺨을 때렸지만,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은 기다란 속눈썹을 드리운 채 숙면을 취할 뿐이었다.

“굳이 자랑하고 싶은 걸 고르라면,”

트리스탄의 단호한 거절에도 꿋꿋이 물러나지 않던 히스는 불편한 듯 이리저리 몸을 비트는 레오노라를 기어코 빼앗아 안아 들었다.

“주인님과 제 친밀도입니다.”

“뭐?”

“보십시오. 제가 안아 들 때에는 뒤척이지 않으십니다.”

히스의 주장대로 레오노라를 안아 든 그의 자세는 제법 안정적이었다.

레오노라의 호흡이 가라앉은 이유가 히스가 그녀의 고통을 흡수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트리스탄은 분해 주먹을 세게 쥐었다.

“게다가 당신은 주인님의 침실에 못 들어갑니다.”

그런 트리스탄을 아는지 모르는지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살핀 히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연다.

“어째서지.”

“외간 남자니까.”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무심코 반박한 트리스탄은 곧 자신이 히스의 성장을 인정하고 말았다는 자각에 혀를 깨물었다.

“아니, 너는 겉모습만 어른일 뿐 어린애에 불과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린아이 모습을 하고 있던 덕에 레오노라의 침실 출입이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니 내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한다.’

고 생각했건만, 레오노라를 안아 들고 멀어지는 히스의 뒷모습에 왜 이리 불안해지는지 모를 일이다.

히스는 트리스탄의 초조함을 알아주고 싶지 않다는 듯 무심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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