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6화
나는 바닥에 땅굴이라도 팔 것처럼 기어들어 가는 남자의 목소리에 의뭉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네?”
“제가 더는 귀엽지 않아서 꺼려 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이해합니다. 커다래서 징그럽게 느껴지시겠죠.”
“딱히 징그럽다고 느끼는 건 아닌데요.”
솔직히 귀엽기도 했다.
이정 도 미남이 주눅이 든 상태로 내 앞에서 우물우물거리면 귀엽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나는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남자의 대사에 흠칫 몸을 떨었다.
“잠깐.”
‘이 눈, 어디서 많이 본 눈이긴 해.’
윌레탄 민족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윌레닌 제국에서 벽안은 흔했지만, 여름 바다를 한 움큼 담은 것처럼 맑은 청안은 흔하지 않았다.
최상급 아쿠아마린을 깎은 것처럼 정교하게 빛이 나는 눈동자를 마주한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설마 히스야?”
내 미심쩍은 물음에 남자의 고개가 천천히 위아래로 흔들린다.
“진짜 히스라고?!”
“네.”
나는 남자의 단정한 대답에 히스가 마법으로 어른 흉내를 냈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랑 얼굴이 다른데?’
지금은…….
지금 얼굴은 그때보다 백 배는 더 예뻤다.
“마법이라도 썼어?”
“아니오.”
“그러면?”
내 의문을 해소시켜 줄 듯 말 듯, 자두라도 베어 문 듯 예쁜 히스의 주홍빛 입술이 천천히 움직인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몸이 자라 있었습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하루아침에 몸이 커져?!”
아크레아인이 특이 체질이라는 연구도 봤었고, 히스는 아크레아의 마도사들에 의해 몸이 개조되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과는 다를 것이란 예상도 했지만…….
“혹시 낮잠 자기 전에 무슨 일 있었어?”
내 물음에 여태 얌전히 순응하듯 대답하던 히스의 입이 조개처럼 딱 다물어진다.
“뭐야. 무슨 일인데?”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거짓말하지 말고.”
“거짓말 아닙니다.”
‘말할 생각이 없나 보네.’
나는 단호한 히스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히스가 이렇게 고집을 부릴 때는 아무리 캐물어도 진실을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럼 이제 주인님과 동행해도 되는 겁니까?”
나는 덩치가 커져도 여전히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려고 드는 히스를 바라보며 한숨처럼 대답했다.
“으응.”
‘갑자기 커져 버리니까 적응 안 되긴 하네.’
내가 저를 낯설어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자연스레 내게 다가온 히스가 도개교 건너편으로 나를 이끈다.
내 손이 두 개는 들어가도 될 정도로 커다래진 히스의 손에 붙잡힌 나는 얼떨결에 그를 따라 왕성을 벗어났다.
“사설 마차를 잡을까요.”
“아니. 돌로린 민족이 배정받은 지구는 내성 안이야.”
내 말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히스가 고개를 주억거리다 다급히 손을 뻗는다.
“조심하세요.”
“어? 어어.”
나는 내 몸을 한 팔로 두른 히스를 힐끔하며 우물우물 대답했다.
꼭 모르는 사람 품에 안긴 것 같아서 낯설기 그지없었다.
민망한 내 속을 모르는 히스는 내 앞을 훅 지나쳐 간 마차를 뒤늦게 노려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감히 주인님께 먼지를 날린 마차입니다. 찾아서 마부를 죽일까요.”
“아니, 그런 이유로 사람 죽이지 마.”
‘덩치만 컸지, 속은 여전히 히스긴 하네.’
히스의 서늘한 목소리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나는 고개를 뒤로 젖혀야 간신히 보일 만큼 헌칠한 그를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진짜 성인 남자 같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는지, 스카프로 얼굴을 가린 나를 덥석 붙잡은 노점상이 활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휴. 데이트 나오셨나 보네! 아가씨, 애인한테 여기 머리핀 좀 사 달라고 해요!”
나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노점상을 흘깃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머리핀 살 돈이라면 저도 차고 넘치게 많은데요.’
하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내가 말하기도 전에 움직이는 인영 덕에 나는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히스?”
“그 입 닥쳐라.”
노점상의 가판대를 붙든 히스의 팔뚝에 우두둑 핏줄이 돋는다.
나는 자꾸만 히스의 몸 쪽으로 가려는 시선을 애써 돌리며 주먹을 쥐었다.
피부가 워낙 하얀 편이라 몸이 작았을 때도 핏줄이 잘 보이는 편이었는데 왜 이제 와서 눈길이 간단 말인가.
“뭐, 뭐? 닥치라니!”
히스의 말에 발끈한 상인이 목소리를 높이든 말든 나를 돌아본 그가 잘생긴 미간을 좁힌 채 입을 연다.
“이 무례한 자의 목을 치겠습니다.”
“이 사람은 왜 또?”
“감히 저 같은 노예를 주인님의 애인으로 오해하지 않았습니까. 그 죄를 죽음으로 치죄해야 마땅합니다.”
나는 히스의 말에 어버버거리는 상인을 피해 골목 어귀로 들어섰다.
“히스, 지금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덩치는 배는 커다래졌으면서 내 힘에도 순순히 끌려온 히스가 가라앉은 내 목소리에 주눅이 들었는지 몸을 움찔한다.
“네가 자유를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내버려 뒀을 뿐이지 너는 내 노예가 아니야.”
“…….”
“내가 너를 노예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잖아.”
그를 내 소유물이라고 생각했다면 히스라는 이름을 줬을 리 없다.
나는 그가 들판에 핀 꽃처럼 자유롭게, 어떤 바람에든 훌훌 날아갈 수 있길 바랐으니까.
“넌 언제든 나를 떠날 수 있어.”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예상한 대답이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히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떠나지 않는 건 네 마음대로 해. 하지만 너와 내가 동등한 존재라는 건 기억해 줘.”
“수백 번 그렇게 말씀하셔도 믿을 수 없습니다.”
“어째서?”
“당신은…….”
골목 어귀를 비추는 햇빛은 이제 막 저녁을 만나 주홍빛이었다.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드는 세상 속에서 유독 푸르고 흰 남자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인다.
“당신은 이토록 빛이 나는 사람이니까요.”
나는 빛나는 건 너인 것 같다고 울컥 튀어나올 것만 같은 말을 간신히 삼킨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는 시커먼 속내를 감춘 저열한 인간입니다.”
“시커먼, 속내…?”
“네. 그래서 주인님과 저는 절대 대등하지 못합니다.”
당최 무슨 속내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노스 왕국을 배신하고 윌레닌 제국에 붙었다는 말은 아닐 테니까.
‘게다가 그렇다고 해도 히스보다는 내가 속에 능구렁이 백 마리쯤은 더 품고 있을 텐데.’
“그게 무슨 뜻이야?”
“아닙니다.”
오늘따라 히스가 내게 숨기는 게 많았다.
집요한 내 눈빛에도 느릿느릿 고개를 저은 히스가 내가 말리기도 전에 골목을 벗어나 버린다.
“돌로린 민족에게 할당된 지구는 이쪽입니다.”
그를 따라 골목을 빠져나온 나는 히스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이제 막 이주를 시작한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짐을 옮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말을 타고 초원을 떠도는 유목민들이라 도시 생활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 테지.’
돌로린 민족은 아이네스가 그들이 지배하던 광활한 초원을 전부 불태워 버려서 한순간에 활동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나는 짐을 잔뜩 실은 거대한 동물을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저거 코끼리 아니야? 유목민이라면서.”
“돌로린 민족 중에선 말 대신 코끼리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는 히스의 대답에 호오, 탄성을 내지르며 코끼리가 한데 모여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아.”
코끼리는 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이 아니었고 전생에서 나는 동물원 한 번 가 본 적이 없었으니까.
“생각보다 되게 귀엽다.”
“한번 타 보시겠습니까?”
잘 관리된 털이 번지르르하게 빛이 나는 코끼리를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짓자 그런 나를 바라보던 히스가 내게 손을 뻗는다.
“주인이 있을 텐데 내가 타도 돼?”
“주인님이 돌로린 민족에게 사냥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라고 권하시지 않았습니까.”
히스는 내 물음에 무심히 대꾸하며 코끼리가 모여 있는 공간 옆에 우뚝 세워진 표지판을 가리켰다.
< 코끼리가 끄는 마차. 한 시간에 1실버 >
‘거의 사설 마차 두 배 가격이잖아.’
나는 돌로린 민족이 같은 유랑 민족인 벨네르니 민족보다 수완이 배는 좋다는 생각에 어깨를 으쓱했다.
‘마차 대신 코끼리를 이용한 이동 수단 사업을 해 보려는 모양이지?’
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히스는 금세 마부에게 돈을 쥐여 주고 코끼리 마차 한 마리를 내 앞에 대령했다.
‘코끼리 마차라 그런지 풋맨이 없네.’
막상 코앞에 선 코끼리 마차의 의자가 생각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어서 고민하는 나를 그가 번쩍 안아 든다.
“히, 히스!!”
히스에게 허리가 붙잡혀 순식간에 마차 위에 오른 나를 향해 히스가 고개를 갸웃한다.
“왜 부르십니까.”
나는 내가 당황한 이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히스의 무구한 얼굴에 떨떠름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 아무것도 아니야.”
자꾸 아까 하녀처럼 말을 더듬게 된다.
‘자꾸 뺨도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증상은 일단 숨겨야겠어. 병증이라는 걸 알게 되면 히스가 또 가져가려고 난리를 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