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35화 (220/486)

  

제235화

  

  

  

“자르파라는 아트로페를 노리는 교단원의 동선을 파악하고, 셀리아는 아트로페와 늘 붙어 다녀 줘.”

교단의 2인자인 셀레네가 나와 한 배에 탄 셈이 되긴 했지만, 아이네스와 퀴리오스가 교단에 행사하는 영향력은 막강했다.

셀레네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난 교단원의 수를 파악하기 위해 내린 명령에 셀리아가 들뜬 얼굴로 제 두 손을 맞잡는다.

“설마 저도 같이 교단에 잠입하게 되는 건가요?!”

“부탁해도 되겠어?”

“부탁은요! 원래 집시하면 잠입 아니겠어요?!”

나는 설렌다는 듯 잔뜩 부풀어 오른 셀리아의 가슴에 멋쩍은 뺨을 긁었다.

‘집시가 무슨 첩보원도 아니고…….’

그건 아니지 않나 싶었지만, 셀리아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마다 집시는 원래 그렇다는 변명을 덧붙이곤 했었기에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그럼 교단은 셀리아에게 맡길게.”

“저는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빛이시여.”

내 신의를 아트로페나 셀리아에게 결코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자르파라는 눈 돌아가게 바쁜 상단일도 뒷전으로 한 채 내 앞에 무릎 꿇었다.

“제국 내부를 살펴보고 싶어. 윌레닌 내부는 이미 곪을 대로 곪은 상태일 거야.”

“내부라면, 귀족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자르파라의 물음에 고개를 까딱이자 진지하게 미간을 좁힌 그녀가 제 턱을 쓰다듬는다.

“나의 빛이 말씀하신대로 단단히 곪은 상태가 맞을 겁니다. 농사를 지을 사람도, 세금을 내고 경제를 유지할 만한 인구도 전부 빠져나가 버렸으니까요.”

아이네스가 무리하게 윌레닌 민족을 제외한 제국민 전부를 내쫓은 탓이다.

왕후귀족들은 대개 윌레닌 민족이었기에 제국에 그대로 남았지만, 그들의 영지에서 농사를 지을 일반 평민이 턱없이 부족해진 상황이었다.

‘사람들을 부리기 위해 임금을 올릴 수밖에 없어져서 오히려 노동환경은 개선된 효과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여태 쌓은 부로는 귀족들의 사치를 감당하는 데도 한계가 있겠지.”

“네. 게다가 높아진 임금으로 배부른 평민들은 작위를 사거나 땅을 사려고 들 겁니다.”

나는 미래를 예견하는 듯한 자르파라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 아는 것처럼 말하네?”

“아크레아도 그런 식으로 멸망했으니까요. 왕족과 신관들은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데만 급급했고, 마력이 없는 평범한 국민들을 박해하다 결국 봉기가 일어났지요.”

자르파라의 설명에 맞장구를 치듯 셀리아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인다.

“집시들도 제국에서는 전부 빠져나온 지 오래예요. 아마 텅텅 빈 마을이 꽤 많을걸요?”

인구 절감은 나라를 다스리는 지배자 입장에서 꽤 심각한 문제였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아이네스가 제국의 몰락 따위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지.’

그녀는 윌레닌을 통째로 도려내 에티모스의 부활 의식 제물로 쓸 생각만 하는 황제였으니 귀족들의 재산이 줄어들건 평민들이 봉기를 일으키건 아무런 관심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제국의 다른 왕후귀족들 생각은 다를 거야.’

자신들이 아이네스가 꿈꾸는 새로운 세계를 위한 제물이 될 신세라는 걸 알아 버린다면 가만히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톡톡 내려치던 나는 내 앞에 공손히 읍한 자르파라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국의 귀족들과 접촉하고 싶어.”

“헨리 마사드가 노스 왕국의 이름으로 제국의 귀족들에게 접촉하고 있으나 거절이 빈번한 상황입니다.”

나는 공작령이 왕국으로 바뀌는 동안 굳건히 가주의 보좌관 자리를 지킨 헨리의 이름에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역시 헨리는 좀 다르네. 시키지도 않은 일을 미리 예상해서 하고 있었던 건가.”

작게 중얼거리는 내 말에 자극을 받은 듯 자르파라는 고개를 번쩍 치켜든 채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빛과 태양이신 당신을 보좌하기엔 모자란 인물이지요. 역시 이 자르파라가 대신 나서서 제국의 귀족들을 모아 보겠습니다!”

“아니, 내가 직접 할게.”

나는 자르파라의 말에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국의 공주님은 꺼려져도 돈 냄새 풍기는 은행장은 피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 테니까, 노스 은행을 움직여야겠어.”

“알겠습니다. 그럼 노스 은행장의 이름으로 제국의 왕후귀족들과 모임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응, 기다릴게.”

“헨리 마사드보다 먼저요!”

“믿음직하네.”

나는 빠릿빠릿한 자르파라의 대답에 배시시 웃으며 방을 벗어났다.

  

* * *

  

자르파라와 셀리아에게 각각 일을 맡긴 나는 룰루와 랄라가 열심히 관리하는 왕성을 둘러보다 도개교 건너로 보이는 마을을 힐끔했다.

‘슬슬 동태를 살피러 가볼까.’

북부가 제국에서 독립한 이후, 나는 꾸준히 내성이나 외성을 돌며 민심을 살폈다.

아무래도 각기 다른 문화를 지닌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기 때문에 트러블이 나기 쉬운 환경이었으니까.

발 빠르게 움직여 막 정문을 나서려는 나를 누군가가 알은체한다.

“사찰을 나가십니까?”

“응. 번화가에 가 보려고. 이번에 새로 받은 이주민들이 왕국에 잘 적응했는지 궁금해.”

내 일정을 잘 아는 듯한 물음이라 별생각 없이 대답했던 나는 낯선 목소리에 기시감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순간 내리쬔 햇볕에 눈이 따갑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빛의 진원지는 태양이 아니라 남자의 얼굴이었다.

상아를 빚은 것처럼 희고 뽀얀 피부와 파도처럼 청량한 청안이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전체적으로 유려한 사람이었지만, 키가 워낙 헌칠한데다 선이 날카로워 결코 여성스럽게 느껴지진 않는.

‘와아. 잘생겼다.’

아빠와 오빠들 덕에 미남이라면 인이 박힐 정도로 자주 본 나조차도 놀랄 미모였다.

‘그런데 누구지?’

눈이 마주친 남자는 장인이 공들여 빚은 조각상처럼 아름다웠지만, 분명 초면이었다.

이렇게나 눈에 띄는 사람을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으니까.

하늘하늘 불어오는 바람에 남자의 회색 머리칼이 살짝 뜨다 가라앉는다.

남자는 부슬부슬한 머리털마저도 귀여워 보일 정도의 섬세한 이목구비를 지닌 미남이었다.

“그럼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누구길래 저와 동행을 하겠다고 하나요?”

“접니다.”

“……응?”

나는 마치 나를 잘 아는 듯한 남자의 당당한 말에 의아한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잘생긴 미친놈인가.’

“이름이 ‘저’는 아니시겠죠?”

남자가 내 물음에 잠시 머뭇하는 사이, 빨래를 잔뜩 인 하녀가 나를 발견하고 종종걸음으로 달려온다.

“공주님, 외출하시게요? 제가 수행원을 데려올까요?”

“아니, 눈에 띄고 싶지 않아.”

“아아. 그러시군요.”

하녀는 내 거절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우물쭈물 머물렀다.

“안 가?”

“빨래가 너무 무거워서 잠시 쉬었다 가려고요!”

발랄하게 대답한 하녀가 도로록 소리가 나도록 눈을 굴리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인다.

“그나저나 옆에 서 계신 남자분은 누구신가요?”

“나도 모르겠는데.”

“엄청 잘생겼네요. 저 깜짝 놀랐잖아요.”

그래서 안 가고 서 있었구나.

나는 설렌다는 듯 얼굴을 붉힌 채 발만 동동 구르는 하녀가 귀여워 헛웃음을 지었다.

“저렇게 잘생긴 사람을 왜 지금 봤을까요? 심장 튀어나올 것 같아요.”

“새로 온 사람 같아. 이번 돌로린 이주민 중에 한 사람이 아닐까?”

하녀와 내가 속닥이는 대화가 궁금한 듯 귀를 쫑긋쫑긋 세우고 있던 남자의 주홍빛 입술이 천천히 움직인다.

“주인님, 무슨 말씀을 나누고 계신 건지 여쭤봐도 됩니까?”

“…….”

남자의 정중한, 정중해도 너무 정중한 말에 굳어 입술만 달싹이는 내 어깨를 하녀가 조심스레 붙잡는다.

“세상에. 공주님, 호, 호옥시 밤의 경매라도 다녀오신 건가요?”

“아, 아니야!”

하녀는 내 다급한 부정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목소리를 죽였다.

“요즘 젊은 아가씨들 사이에선 잘생긴 노예가 인기라고 듣긴 들었어요.”

“노스 왕국에서 인신매매는 불법이야!”

뭐 그런 유행이 다 있다는 말인가.

하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모조리 잡아다가 처벌을 해야 할 문제였다.

“당장 소문의 진원지를 안내해!”

무섭게 얼굴을 굳힌 내가 하녀를 따라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탁.

남자가 내 손목을 붙들었다.

“주인님, 저도 데려가 주세요.”

“모, 모, 몹쓸 사람이네! 누, 누구 보고 주인님이래요?!”

사람 범죄자 만들 일 있나.

나는 다 큰 성인 남성 노예 따위 사 들인 기억이 없는 사람이었다.

“저를 두고 가실 겁니까?”

나는 남자의 간절한 목소리에 기겁하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희고 길쭉한, 손마저 유려한 남자의 팔이 허공에 붕 뜬 채 방황한다.

“아니, 두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냐고요.”

난 당신 모른다니까?

멋대로 붙잡힌 손을 뺐을 뿐인데, 남자는 내가 자신을 밀치기라도 한 것처럼 울적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이런 제가 징그러우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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