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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0화 (215/486)

제230화

아이네스가 사교계에서 나를 소외시키는 것으로 모멸감을 안겨 주려고 해 봤자 딱히 감흥은 없었다.

‘말을 거는 사람만 없을 뿐이지, 관심은 전부 내게 쏠렸는걸.’

사람들은 새롭고 낯선 것에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다.

소수 민족을 전부 몰아낸 탓에 고일 대로 고여 버린 황도 사교계에서 왕국으로 독립한 북부의 고명딸인 내가 눈에 띄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하! 폐하께서 공주를 벽의 꽃으로 지정했으니 누구도 춤 신청을 하지 않겠네요.”

나는 나를 힐긋하며 이죽이는 여자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비스듬히 벽에 몸을 기대었다.

“뭐, 굳이 구태여 지정하지 않으셨어도 범죄자에게 다가갈 남자가 있을까요?”

크게 기분이 상하진 않았지만, 여자의 말이 우습게 느껴지긴 했다.

아이네스의 즉위 이후 본격적으로 가속화된 인종 말살 정책에 반대한 귀족 또한 적지 않았으니까.

그런 귀족들은 전부 노스 왕국과 교류한 탓에 황성에 방문할 수 없게 되었으니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자신과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사람을 짐승처럼 도축하는 데 동의한 인간들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보기엔 지금 여기 모인 사람들이 더 범죄자에 가까운데 말이지.’

아이네스의 말대로 내게 전부 관심을 꺼 줬으면 좋으련만, 나는 뺨이 따가울 정도로 느껴지는 사람들의 시선에 눈살을 찌푸렸다.

특히 남자들이 내게서 눈을 뗄 줄 몰랐는데 실비가 사뮈엘과의 접촉을 위해 자리를 뜬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만약 지금 실비가 내 옆에 있었더라면 한바탕 칼부림이 났을 수준인걸.’

“당신! 지금 자꾸 누굴 힐끔힐끔 보는 거예요!!”

“아니, 오, 오해요!”

결국 나를 훔쳐보는 것을 걸린 남자 한 명이 허둥지둥 손을 내저으며 목소리를 높인다.

“오해는 무슨! 더는 나를 창피 줄 생각 말고 테라스에라도 나가 있어요!”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를 내쫓은 여자가 커다란 진주 목걸이를 쓰다듬으며 나를 노려보다 코웃음을 친다.

“에스코트를 해 줄 남자는 있다고 쳐도 샤프롱은 없네요, 레오노라 공녀는.”

아까부터 내게 들릴 듯 말 듯 시비를 거는 여자는 분명 낯익은 얼굴이었다.

‘이아론 후작의 방계 가문으로 기억하는데…….’

이름이 리사 아론테였던가.

내 외가인 이아론의 방계인만큼 하차니아의 가정사를 훤히 꿰뚫고 있을 그녀가 얇은 입술을 벌린 채 조소한다.

“오늘이 따지자면 성년이 된 이후 처음으로 나서는 데뷔 무도회일 텐데, 불쌍하네요.”

나를 가엾게 여기는 기미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리사 아론테는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없으니 샤프롱을 고를 방법을 누가 알려 주기나 했겠어요?”

나는 리사의 말에 기가 막혀 코웃음을 쳤다.

‘원래 성년을 맞이한 영애가 샤프롱을 대동하고 무도회에 나서는 것이 더 드물 텐데…….’

그 사실을 황도 사교계에서 활약하는 여자가 모를 리 없었다.

‘내가 엄마 없이 자라 상식이 부족하다며 돌려 까는 거지, 뭐.’

5년 전이라면 잠깐 주눅 들거나 침울했을 수도 있겠지만, 더는 아니었다.

“한때는 노엘 제독의 사생아라는 말이 돌았던 사람이잖아요? 천박하니 뻔뻔하게도 열등한 야만인의 편을 자처하는 거죠.”

내 처지를 비꼬는 자신의 말에도 내가 전혀 타격을 받지 않는 것 같자 잔뜩 약이 오른 리사가 다시금 입을 벌린 순간이었다.

“아트로페 백작님 드십니다!”

호명관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쏠린다.

아트로페 백작.

거대한 북해를 장악한 무역 회사를 이끄는 수장이지만, 늘 가면을 쓰고 있어 그 누구도 정체를 모르는 인물이었다.

‘원작 결말부에 등장하는 아이네스의 조력자 중 한 명이었지.’

아트로페는 본디 고고학자이자 유물 발굴자였다.

아이네스에게 반해 고대 유물이란 유물은 전부 그녀에게 갖다 바치기 전까지는 꽤나 유망했던.

“아트로페 백작! 어서 와!!”

만날 때마다 자신에게 선물을 안겨 주는 아트로페가 아이네스의 입장에서 달갑지 않을 리 없었다.

단상에서 내려온 아이네스의 손 인사에 꾸벅 허리를 숙이는 아트로페 백작의 행동은 유려하고 우아했다.

“무도회에는 좀처럼 나오지 않더니 웬일이래요?”

황제의 예쁨을 받는 특정 인물을 향한 시기심은 늘 있는 모양이었다.

“폐하의 눈에 들어 상인 주제에 백작위까지 받았다던데.”

나는 타깃을 아트로페 백작으로 변경한 듯한 리사 아론테의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생트로페 해적들을 정리해 만든 항로로 벌어들인 수익이 어마어마하다네요. 이 황성을 통째로 살 수 있을 정도래요.”

그런 리사의 말에 맞장구라도 치듯 쥘부채를 펼쳐 든 여자가 부럽다는 듯 한탄한다.

“저런 사람의 가족은 얼마나 좋을까요? 늘 타국에서 진귀한 물건만을 골라 집으로 가져올 텐데!”

“그러게요. 지금도 뭘 들고 있는데 황제 폐하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겠죠?”

사람들의 기대 어린 눈빛을 한 몸에 받으며 등장한 아트로페가 천천히 걸음하기 시작한다.

이제 막 작위를 받아 귀족이 된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는 우아한 태로 사람들의 넋을 쏙 빼놓은 그녀는 나를 발견하고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툭.

내 앞에 안고 있던 거대한 보석함을 내려놓은 아트로페 백작을 따라 그녀의 시종들이 내게 하나둘씩 선물을 건네기 시작한다.

“왜, 왜 아트로페 백작이 레오노라 공녀에게 선물을 주는 거죠?”

“세상에! 저건 하나만 팔아도 성 세 채는 살 수 있다는 세이렌의 날개 아닌가요?”

나를 빙 에두른 선물들의 정체에 사람들이 놀라든 말든 관심 없다는 듯 가면을 휙 벗은 아트로페가 나를 꽉 끌어안는다.

“엄마 왔다.”

나는 가면을 벗어 던진 노엘의 등을 가볍게 다독이며 활짝 웃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뻐요.”

여태 내게 말 한마디 걸어 주지 않고 무시하던 귀족들은 노엘과 나의 대화를 엿듣고 뒤로 넘어갈 것처럼 자지러졌다.

“지, 지금 뭐라고 한 거죠? 아트로페 백작이 레오노라 공주에게 스스로를 어머니라고 칭하지 않았나요?”

“아트로페 백작이 공녀, 아니, 공주의 어머니라뇨?! 레오노라 공주의 어머니는 사라진 노엘 제독이잖아요!”

노엘이 행방불명된 상태였기에 나는 어머니가 없는 아이며 사생아일 수도 있다고 모욕을 줄 수 있었던 리사 아론테가 경악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네. 행방불명되어 찾을 수 없었던 어머니가 돌아오셨거든요.”

내게 물어본 건 아니겠지만, 나는 리사 아론테의 혼잣말에 대답했다.

“아트로페 백작으로 알려진 사람이 제 어머니이신 노엘 이아론 제독이랍니다.”

나는 새하얗게 질린 리사 아론테를 어머니 앞에 툭 던져 주며 방실방실 웃었다.

“두 분, 먼 친척이시라고 알고 있는데 인사 나누세요!”

“오랜만이군, 리사. 네가 겁대가리 없이 내 딸에게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 건 잘 봤다.”

잔뜩 겁을 먹고 움츠러든 리사를 향해 노엘이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다.

“노, 노엘 님……! 무, 무, 무사히-!”

“그래. 내가 무사히 살아 있어서 기분 아주 뭐 같겠어.”

“…….”

“오랜만이니까 잠시 사람 없는 곳에 가서 대화를 나누는 게 어떨까 싶은데.”

우리 집 사람들은 한적한 복도, 아무도 없는 뒤뜰을 참 좋아했다.

나는 리사 이아론을 이끌고 사라지는 노엘을 배웅한 뒤 제자리에 우뚝 선 채 굳어 버린 아이네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그럴 리가 없어! 아트로페 백작은 원래 아크레아인이야!”

아이네스가 중얼거리는 말대로 원작, <아.황.장>에 등장하는 아트로페 백작은 분명 아크레아인이었다.

하지만 나는 부러 그 사실을 모른 척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떻게 확신하세요? 어머니는 본인의 출신 성분을 밝힌 적이 없을 텐데요.”

“그, 그건!”

사람들의 눈치를 살핀 아이네스가 입술을 꾹 깨문 채 나를 노려본다.

“당장 따라와!”

사람들 앞에서 원작을 언급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그녀는 나를 자신이 서 있던 단상의 뒤쪽으로 끌어 내렸다.

“아트로페 백작을 어떻게 한 거지?”

듣는 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한 나는 아이네스의 날카로운 물음에 배시시 눈웃음을 지었다.

“뭘 어떻게 해요? 노스 왕국에서 잘 모시고 있답니다.”

“돌려줘! 애초에 엑스트라인 너와는 접점도 없는 인물이라고!!”

아무래도 아트로페가 가져다줄 고대 유물 중에 꼭 필요한 물건이 있는 모양이다.

‘초조한 사람은 속내를 읽히기 마련이지.’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아이네스를 바라보다 언제 웃었냐는 듯 서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아이네스, 너는 엑스트라인 나를 이용해서 원작을 파괴할 생각이었잖아.”

“…….”

“나를 이용해 프란츠를 제거했고, 황위에도 올랐으면서 내가 직접 원작에 손을 댈 건 예상하지 못한 거야?”

황위에 앉지 못하는 건 아이네스가 절대 바꿀 수 없었던 원작의 흐름이었다.

나는 부들부들 몸을 떠는 아이네스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말을 이었다.

“아빠와 오빠까지 죽여 가며 원작을 바꾸려고 했을 때, 이 정도는 각오했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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