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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8화 (213/486)

제228화

아빠의 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그림자는 분명 루카스의 것이었다.

누가 보면 다 큰 어른이 아이처럼 인형을 달고 다닌다고 오해할 게 뻔한 그림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빠, 루카스랑 많이 친해지셨나 보네요.”

서로 자신이 내 진정한 아빠라며 우기던 건 죄 잊은 듯한 모습이었다.

‘요즘 둘이 의기투합해 붙어 다니는 것 같던데.’

내가 모르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 싶었지만 루카스와 아빠가 잘 지낸다면 내게는 좋은 일이었다.

“요즘 기운이 없더군. 솜인형 몸이라 더위를 타는 건가.”

아빠는 축 늘어진 루카스를 내보이며 짧게 혀를 찼다.

“다리도 짧아 이동 시간이 길어지기에 그냥 내가 들고 왔는데.”

아빠가 제 몸에 내리는 평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의 목을 휘감은 루카스의 팔이 작게 버둥거린다.

“설마 사용인들도 아빠가 루카스 안고 다니는 거 본 거예요?”

루카스의 정체는 모르지만, 내 곁에 꼭 붙어 다니는 움직이는 곰인형의 존재는 하차니아의 사용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내가 어릴 때 개발한 아티팩트라고 알려져 있는데 아빠가 들고 다녔으면 딸 인형을 빼앗은 것처럼 보였겠네.’

아빠의 평판을 걱정하느라 작게 주름이 잡힌 내 미간을 힐긋한 아빠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다.

“보기에 흉한가?”

적당히 도톰한 입술이 벌어지며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이제 중년에 접어든 나이임에도 하녀들이 얼굴을 붉힐 만큼 매혹적이었다.

‘아니, 사람이 나이 먹을수록 점점 더 잘생겨지는 게 말이 돼?’

오히려 중후한 멋이 더해져 아빠 본연의 차분한 매력을 더 돋보이게 하는 것도 같았다.

나는 거의 사기에 가까운 아빠의 미모에 한 손으로 눈을 비비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아니에요.”

‘미중년과 곰인형이라 묘하게 어울리니까 상관없겠지.’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묘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관찰하던 아빠가 내 뺨에 손을 올린다.

“레오노라,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제국을 방문할 필요는 없다.”

무뚝뚝한 목소리지만 함축된 뜻은 다정하기만 하다.

“우리는 이제 황제의 말에 반드시 복종해야만 하는 신하가 아니질 않느냐.”

이제 다 큰 성인이라지만 언제든 내 어리광을 받아 주겠다는 것처럼 들려서 나는 아빠를 향해 배시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뇨. 노스 왕국의 존재를 제국민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잖아요.”

아빠가 나를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평생 북부에 숨어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윌레탄인의 피를 이었다고 해서 아이네스의 인종 말살 정책에 반드시 동의하는 건 아닐 테니까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전부 구해야죠.”

현재 노스 왕국은 윌레닌 제국과의 교류를 단절한 상태였다.

제국의 왕후귀족들이 제국에서 파생되었다지만 완연한 독립국으로 자리잡은 우리를 곱게 볼 리 없었으니 일반 제국민들은 노스 왕국의 존재를 모르거나, 안다고 해도 매우 비참한 생활 수준을 영위한다고 알려졌을 확률이 농후했다.

“그럼 나라도 너를 수행하겠다.”

내 거절에 아빠의 등 뒤에 얌전히 서 있던 실비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실비가?”

나는 아빠와 똑닮은, 젊었을 때의 하차니아 공작을 떠올리게 하는 실비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했다.

“흐응. 차라리 에녹이 나을 것 같은데.”

“……어째서?”

내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실비가 하늘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충격받은 얼굴로 주먹을 말아쥔다.

“노스 왕국을 제국민들에게 소개하는 자리가 될 수도 있다고 했잖아. 실비는 왕국의 첫인상이 되기엔 너무 서늘한 인상인걸.”

나는 실비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천천히 말을 고르며 머쓱한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물론 젊은 시절의 아빠를 쏙 빼닮은 실비는 무척 잘생겼다.

하지만 에녹과 달리 범접할 수 없는,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아름다움이랄까.

“나보다 에녹이 예쁘다는 뜻인가.”

나는 내 설명에 풀이 죽은 듯 어깨를 늘어뜨리는 실비의 반응이 당황스러워 허둥지둥 손을 뻗었다.

“언제는 예쁜 거 싫다고 했잖아. 실비는 멋있어!”

“리니, 너는 예쁜 걸 좋아하니까.”

“시, 실비도 충분히 예뻐. 그러니까 내 말은 에녹처럼 화사하게 웃고 다니질 않아서 사람들이 겁을 먹을 수도 있다는 거였어.”

“그런가.”

나는 살짝 풀어진 실비의 인상에 남몰래 아효, 한숨을 내쉬었다.

성인이 되어도 오빠들은 삐지기 십상이라 달래 줘야만 하는 일이 빈번했다.

“대신 오늘은 살짝이라도 웃어야 해. 노스 왕국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고 따뜻하게 대할 거라는 이미지를 심어 줘야 한단 말이야.”

“알겠다.”

나는 내 당부에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는 실비에게 눈을 흘기다 입을 열었다.

“말만 하지 말고 웃어 봐.”

씨익.

내 말에 얄쌍한 입매가 호선을 그리긴 했지만, 실비의 인상은 조금도 따뜻해지지 못했다.

웃고 있긴 했지만, 차라리 안 웃는 게 나을 정도로 차가운 비소처럼 보였으니까.

‘……그냥 겉보기엔 차갑지만 마음이 따뜻한 왕자님 컨셉으로 가야겠어.’

실비에게는 알리지 않고-또 시무룩해 할 게 뻔했으니까- 그가 추구할 대외적인 이미지를 바꾼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자아, 그럼 이제 슬슬 출발해야지.”

“네? 아가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 말에 당황하며 나선 이는 나를 배웅하기 위해 찾은 아빠도, 시름시름 앓고 있는 루카스도 아닌 룰루와 랄라였다.

“응? 실비도 나도 준비를 다 끝냈잖아.”

“그 꼴로 무슨 준비를 다 끝내셨다고 하시는 거예요?!”

내 말에 화들짝 놀란 룰루가 질색하며 나를 놓아줄 수 없다는 듯 덥석 껴안는다.

“아가씨, 성인이 되어서 처음으로 사교계에 발을 디디시는 거잖아요.”

“그렇지?”

“이 룰루와 랄라,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니, 무도회 준비하는데 목숨 같은 거 걸지 마!’

나는 룰루와 랄라의 비장한 선언에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 하지만 아침에 다 씻었고, 옷도 제대로 갖춰 입었잖아.”

나는 티에리가 직접 제작한 움직이기 편한 연녹색 드레스를 들추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 드레스 입고 정사도 보고 왕국의 귀족들도 만나고, 할 것 다 했는데!’

그러나 내 말을 한 귀로 흘린 듯이 무시한 룰루는 내 팔을 잡아끌며 다른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요즘 황도에서는 피부에 진주 빻은 가루를 발라 부드럽게 표현하는 게 유행이래요.”

“얼굴이 이렇게 맨들맨들한데 무슨 가루를 또 발라?”

“하지만 그들에게 익숙한 스타일로 다가가셔야 제국의 귀족들도 우리 노스 공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겠어요?”

룰루와 랄라에게 끌려가 뚜왈렛룸에 당도한 나는 그녀들이 주르륵 펼쳐 놓은 드레스의 향연에 기겁하며 입을 벌렸다.

“단순히 룰루랑 랄라가 재미있어서 그러는 거잖아!”

“그럼 향유로 목욕부터 하러 가시죠!”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역시, 내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태연하기만 하다.

* * *

내 옷의 8할은 티에리가 손수 제작했거나 적어도 디자인한 옷들이었다.

모두 내 활동성을 고려해 제작해 줬기에 옷의 화려함은 조금 떨어져도 입고 돌아다니는 데에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티에리 님도 아가씨께 이런 옷을 입혀 보고 싶다고 얼마나 벼르고 계셨는데요.”

그런 티에리마저 나를 배신하다니.

나는 가늘게 조인 허리를 강조하는 드레스자락을 만지작거리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쁘긴 하지만 역시 불편한데.’

“……아가씨, 저 울어도 될까요?”

“손바닥만 했던 우리 아가씨가 언제 이렇게 커서는!”

‘아니, 손바닥만 했던 적은 없을 텐데.’

내가 익숙하지 않은 드레스 차림에 힘들어 하든 말든, 룰루와 랄라는 감격한 얼굴로 울망울망하게 눈을 빛냈다.

“너무 예뻐요, 아가씨. 황성의 귀족들이 오늘 부로 전부 눈이 멀지도 몰라요.”

“아름답다는 표현은 모자랄 정도예요! 아가씨는 그냥 걸어 다니는 명화세요! 살아 있는 예술 작품……!”

“정신없으니까 그만 말해.”

나는 호들갑을 떨며 발을 동동 구르는 룰루와 랄라를 뒤로한 채 거울 앞에 섰다.

표면을 코팅해 반지르르한 타프타 소재의 드레스는 각도에 따라 색이 바뀌는 탓에 눈이 빙글빙글 돌아갈 정도로 화려했다.

치마를 장식하는 꽃줄 장식이 생화였기에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은은한 향기가 베어 나왔고, 소매를 장식하는 리본은 에메랄드와 멜리다이아가 섬세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티에리가 정말 벼르고 있긴 했나 보네.’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다 못해 수려한 드레스와, 그런 드레스에 결코 눌리지 않는 이목구비를 천천히 훑었다.

‘……레오노라는 이렇게 자라는구나.’

벌써 레오노라가 죽었어야 할 나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원작에서도 미인이라는 언급은 있었지만, 핏기 없이 투명한 피부를 자랑하는 거울 속 여인은 정말 아름답긴 했다.

핏기 없이 투명한, 이라는 수식어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게 흠이었지만.

나는 발밑으로 마나가 전부 빠져나가는 끔찍한 기분에 거칠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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