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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4화 (209/486)

제224화

아이네스의 비명을 듣고 몰려든 황군의 손길을 피해 나는 서문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히스, 프란츠 폐하를 부탁해!”

마기의 영향인지 숨을 헐떡이는 프란츠를 짐짝 넘기듯 건네는 순간, 나를 발견한 병사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다.

“레오노라 공녀가 여기 있습니다!! 으악!”

히스가 재빠르게 그의 뒷목을 쳐 기절시켰지만, 이미 내 위치는 알려지고 말았다.

“히스, 일단 나는 두고 먼저 몸을 피해.”

나는 구름떼처럼 몰려오는 황군의 그림자를 돌아보며 프란츠를 등에 업은 히스를 떠밀었다.

“안됩니다. 공녀를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고집부리지 마.”

“너무 위험합니다.”

내 명령을 들을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히스와 눈을 마주한 나는 고집스레 입술을 벌렸다.

“나는 독립국으로 인정받은 하차니아의 독녀야.”

나는 이제 제국에 속한 공작 가문의 자식이 아닌, 한 나라로 인정받은 영지를 이끄는 지배자의 딸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아이네스와도 동등한 위치의 공주님이라는 거지.’

“그러니 아이네스도 날 쉽게 해하지는 못할 거야. 내 걱정하지 말고 너부터 피해.”

그럼에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듯 자꾸만 돌아보는 히스를 엄한 시선으로 떠나보낸 나는 한숨을 내쉬며 황군을 돌아보았다.

“공녀가 여기 있습니다!”

“자, 잡았다아! 얼음탑의 현자를 상대로 일개 병사가 승리를 거두다니…!”

‘승리는 개뿔.’

도망갈 기미도 없이 자신들 쪽으로 털레털레 걸어오는 나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치들의 모습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뭐하고 있는 거냐! 황녀 전하께 데려가지 않고!”

하지만 막상 나를 코앞에 둔 황군은 쉬이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어서 공녀의 몸을 밧줄로 묶어라!!!”

“……시, 싫습니다! 대장님이 직접 하십시오!!”

아이네스의 명령을 받잡고 나를 쫓긴 했는데, 막상 나를 건드릴 용기는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언제든 도망갈 수 있겠다는 안일한 생각에 허둥대는 황군을 지나쳐 아이네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본성 쪽으로 몸을 돌렸다.

‘괜히 겁먹을 필요는 없어. 프란츠는 살아 있는걸.’

죽었다고 주장하는 황제의 시체도 없는데 어떻게 프란츠가 죽었다는 거짓말을 하겠는가.

“어, 어디 가는 겁니까!”

“황녀 전하께서 나를 찾으신다면서.”

“아, 네! 그러시군요!”

당황한 병사의 말에 짧게 대꾸한 나는 어깨를 으쓱한 채 빠르게 본성에 들어섰다.

곧 중정 한가운데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는 아이네스가 눈에 들어왔다.

“……저게 다 뭐야.”

나는 아이네스가 끌어안고 있는 ‘프란츠’를 발견하고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흐윽, 흐어어엉!!!”

피를 철철 흘리는 프란츠를 끌어안은 채 울고 있는 아이네스의 모습은 누가 봐도 방금 형제를 잃은 비통한 황녀였다.

‘어떻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가짜 시체를 만들어 낸 거지?’

“흐윽, 아아악! 오라버니!”

울고 있는 아이네스 주위로 몰려든 황족과 귀족, 황궁인들이 기함하며 입을 벌린다.

“화, 황제 폐하……!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다니!!”

아이네스가 안고 있는 시체가 프란츠라는 것을 알아차린 궁내관이 다급하게 몸을 일으켜 목청을 높였다.

“황제 폐하께서 서거하셨다! 동쪽 첨탑의 종을 울리거라!!”

그레고르가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폐하께서 서거하셨다!”

“폐하께서 서거하셨다!!”

프란츠의 죽음을 일사천리로 알리는 시종들의 목소리를 뒤따라,

댕- 댕- 댕-.

첨탑의 거대한 종이 커다랗게 울부짖었다.

‘내 생각만큼 쉽게 빠져나가지 못할 수도 있겠는걸.’

혼란한 틈을 타 복도에 몸을 숨긴 나는 수선스럽게 움직이는 병사들을 발견하고 미간을 모았다.

“도대체 누가 감히 황성에서 폐하를 살해했다는 말입니까!”

“범인은 누구입니까!!”

프란츠의 먼 친척뻘인 귀부인의 추궁에 아이네스가 몰려든 사람들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입술을 움직인다.

“레오노라 공녀예요!”

“그 말에 책임을 지실 수 있겠습니까, 황녀 전하.”

아이네스의 말에 반박하듯 앞으로 튀어나온 이는 다름 아닌 사뮈엘 대공이었다.

“네, 대공 전하.”

아이네스는 서늘한 사뮈엘의 눈빛에도 기죽지 않고 꿋꿋하게 대답했다.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걸요. 레오노라 공녀가 폐하를 찌르고 도망갔어요!”

“……다른 목격자는 없는 건가?”

아이네스의 대답에 사뮈엘은 더는 그녀를 추궁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먼저 레오노라 공녀가 폐하를 시해하는 장면을 목격한 다른 사람은 없는지 알아봐야 하지 않겠나.”

“대, 대공 전하. 공녀님께서 황제 폐하의 침실에 몰래 숨어드는 걸 봤다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사뮈엘의 말에 뒤늦게 손을 든 궁인이 제 옆에 선 어린 시종을 힐끔하자, 시종은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예, 예에……. 제가 봤습죠. 분명 도둑고양이처럼 벽을 타고 계셨습니다!”

시종의 말에 아이네스의 주장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귀부인 무리가 화들짝 놀라며 쥘부채로 입가를 가린다.

“레이디의 모범을 보여야 할 쁘띠 플뢰르가 벽을 타다니, 수상하긴 하네요.”

“하지만 폐하를 시해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이제 막 북부가 독립국으로 인정받았는데요.”

“그건 그래요. 가만히만 있어도 공주님이 될 공녀가 굳이 폐하를 죽이다뇨.”

귀부인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운 나는 씁쓸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아무도 프란츠가 죽은 건 안타까워하지 않네.’

다들 그저 황성 내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에 흥미를 가질 뿐이었다.

“……공녀가 진짜 범인이든 아니든, 잡아서 심문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대공 전하?”

아이네스는 쉽사리 제게 넘어오지 않는 여론이 짜증스러운 듯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제 오라버니가 죽었다고요.”

“공녀의 말도 들어봐야 할 것 같으니 기다리십시오. 어차피 황군이 쫓고 있질 않습니까.”

“하지만 대공 전하는 추적 마법의 일인자셨잖아요.”

아이네스는 차분한 사뮈엘의 태도가 수상하다는 것을 지적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나저나 전혀 슬퍼 보이지 않으시네요. 프란츠가 죽었는데.”

“…….”

“대공 전하께서는 레오노라 공녀의 마나를 본 적이 있으실 테니, 필히 추적이 가능하시겠죠.”

아이네스의 말에 사뮈엘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사람들이 눈을 홉뜬다.

“정말 공녀님을 추적하실 수 있는 겁니까, 전하?”

“……대공 전하께서는 공녀를 숨겨 주려는 건가요? 설마, 공범?”

아이네스가 흘리듯 한 말에 대공을 돌아봤던 사람들의 얼굴이 아연실색해진다.

“레오노라 공녀에게는 이유가 없지만, 대공 전하께는 있지 않나요?”

“그렇죠. 황위에 가까운 인물이시니.”

“어머,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손주뻘 되는 폐하께 손을 대셨을까요?”

나는 말도 안 되는 가십을 수근거리는 사람들의 반응에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사뮈엘이 곤란해지겠는걸.’

“이런, 어쩔 수 없네요.”

내가 복도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는 걸 알았는지, 사뮈엘이 다급하게 나를 돌아보며 인상을 찌푸린다.

‘가만히 계세요.’

나는 내 이름을 부르려는 그를 저지하며 앞으로 나섰다.

“대공 전하의 기운이 느껴졌어요. 더는 숨어도 소용없겠다 싶어서 나올 수밖에 없었네요.”

“역시 대공 전하가 공녀님을 숨겨 줄 리 없다니까요!”

내 말에 귀부인 한 명이 활짝 웃으며 쥘부채로 제 뺨을 톡 두드린다.

‘웃기고 있네. 아까는 공범이네 뭐네 속닥였으면서.’

나는 다가오는 병사에게 순순히 손을 내밀며 예의 그 귀부인을 노려봐 주었다.

“레오노라 공녀, 당신을 황제 폐하 시해 유력 용의자로 체포하겠습니다.”

병사의 단호한 말과 함께 내 손에 주박이 걸린다.

‘루카스나 아빠가 알면 난리 나겠는걸.’

나는 곧 뒤집어질 하차니아를 떠올리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빠는 분명 공식적인 재판을 통해 항의하려고 하겠지.’

가스파르는 성정이 올바르고 도의에 어긋나는 걸 싫어했으니 불합리한 재판이라고 해도 차분하고 또 당당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정식 재판이 잡히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테니까 느긋하게 대처 방법이나 생각해 볼까.’

병사를 따라 얌전히 감옥에 들어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주위를 살폈다.

황성 내에 위치한, 귀족과 황족만을 위한 감옥이라 그런지 창살이 있다는 걸 제외하면 별궁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푹신푹신한 거위 깃털로 만들어진 침대에 누운 나는 손목을 아프게 압박하는 제어구를 내려다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아빠나 오빠들을 다시 보려면 꽤 기다려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괜스레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그 순간,

쿵-! 쿠쿠쿠쿠쿠쿵-!!

천장이 뒤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투두둑 대리석 조각이 허공에 흩날리기 시작한다.

“……?”

이거 분명 어디선가 본 장면인데?

설마 루카스인가 싶어 무너진 천장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귀가 시간이 늦어지는 것 같아 데리러 왔다.”

대리석 벽을 무처럼 썰며 모습을 드러낸 가스파르가 예의 단정한 걸음으로 내게 저벅저벅 다가온다.

“아, 아빠?”

설마 루카스가 다시 아빠의 몸을 빼앗았나 싶었지만, 차분한 눈은 분명 아빠의 것이었다.

문제는 그 차분한 눈으로 황성을 때려 부수고 있다는 점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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