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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1화 (206/486)

제221화

황성은 크게 황궁인들이 사는 외성과 황족과 귀빈들이 거주하는 내성으로 나뉘었다.

‘외성은 하차니아의 직계를 뜻하는 문장이 새겨진 마차만으로도 쉽게 통과했지만, 내성은 일일이 신원을 확인하겠지.’

하지만 나는 5대 귀족에 속하는 하차니아의 막내딸, 그것도 이제 독립이 확정된 북부의 직계였다.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 히스를 외성에 대기시킨 나는 그대로 마차를 이끌고 당당하게 중앙 문에 도착했다.

“황성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공녀님.”

제법 낯익은 궁인이 조르르 달려 나와 허리를 숙인다.

“폐하를 뵈러 왔는데.”

하지만 내성 중앙 문을 통과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한 내 말에 궁인이 곤란한 듯 고개를 조아린다.

“죄송합니다만 현재 폐하는 병환으로 알현이 불가능합니다.”

나는 마차 창문 사이로 면구한 얼굴의 궁인을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폐하께서 편찮으시다고?”

“네.”

“어디가 어떻게 아프신 거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지요.”

나는 궁인의 시원치 않은 변명에 미간을 좁혔다.

‘국혼을 올리자마자 황제가 갑자기 아프다니. 너무 수상하잖아.’

“알겠어. 마차를 돌리렴.”

마부에게 짧게 명령한 나는 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꼼꼼하게 커튼을 친 다음 원작 책을 펼쳐 들었다.


“내 남편을 가둬 놨다고 들었어요, 헬리오스.”

퀴리오스가 농담처럼 건네는 말에 아이네스는 얼굴을 굳혔다.

“이제 황실에 완벽히 적응하신 모양이네요, 퀴리오스 님.”

퀴리오스는 제대로 된 식도 올리지 않고 황후 자리를 차지하고서는 마치 자신이 원래 황족이었던 것처럼 황성을 누비고 다녔다.

‘아무리 알레테이아를 위해서라지만, 불쾌해.’

황성 안에서만큼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아이네스는 퀴리오스의 간섭이 불편했지만, 차마 티 내지 못하고 싱긋 웃었다.

“황제 폐하를 남편이라고 부르시다뇨.”

“그럼 내가 결혼한 남자를 내 남편이라고 칭하지 뭐라고 부르나요?”

아이네스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반문하는 퀴리오스를 흘깃하다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결혼식 이후에는 프란츠의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잖아요.”

“그야 아이네스가 황제를 가둬 놨으니까요.”

퀴리오스는 퀴리오스대로 기가 막혀 아이네스의 핀잔에 반박했다.

“초야도 치르지 못했으니, 성혼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도 없어요.”

아이네스가 노린 게 바로 그 점이었지만, 그녀는 티 내지 않고 해맑게 대답했다.

“퀴리오스님을 위해 어쩔 수 없었어요. 프란츠는 말로는 공녀나 북부인과 접촉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한눈을 팔면 금세 다른 짓을 하니까요.”

아이네스의 설명을 들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을 만지작거리던 퀴리오스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꼭두각시 하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다니, 이번 회차의 헬리오스는 조금 실망스럽네요.”

‘어차피 늘 실망스러웠지만.’

그런 속내를 감추지 않는 퀴리오스의 힐난에 아이네스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마지막, 제가 마지막 헬리오스라는 걸 아셔야죠.”

“그건 헬리오스의 주장이잖아요. 확신할 수 있나요?”

퀴리오스는 당황한 아이네스를 봐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아이네스, 이 세계에서 삶을 반복하고 있는 건 그대만이 아니에요. 셀레네도, 나도, 아스테르도 당신과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반복하고 있죠.”

이런 삶이 지겨운 건 아이네스뿐만이 아니었다.

퀴리오스도, 셀레네도 하루라도 빨리 에티모스가 부활해 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싶었으니까.

“게다가 나는 이번 삶이 마지막일 거라 호언장담하던 수많은 당신을 기억해요.”

퀴리오스가 기억하는 아이네스는 늘 자신만이 에티모스를 부활시킬 수 있으며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다고 주장했었다.

“이번에는 진짜예요.”

아이네스는 퀴리오스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며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다른 영혼이 깃든 아스테르가 태어났으니까.”

“지금까지의 아스테르와 뭐가 다른 거죠?”

“레오노라 공녀는 신이 정한 세계의 흐름을 비틀 수 있어요.”

퀴리오스의 물음에 아이네스는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기라도 하듯 천장을 힐끔하며 말을 이었다.

“자유 의지를 가졌으니까요.”

“자유 의지라…….”

“그게 무슨 뜻인지, 본인도 모를 테지만.”


내가 언급된 부분을 한눈으로 훑은 나는 원작 책을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냥 가둬 둔 거였잖아.’

아프긴 개뿔.

“……내가 히스처럼 포탈을 열 수 있을까?”

나는 히스가 허공에 생성했던 포탈을 떠올리며 마나를 움직였지만, 정확한 연성진을 모르기에 흐릿한 연기만 만들어질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히스를 수행원으로 데려올 걸 그랬어.’

“아냐, 낙심할 필요는 없지.”

나는 공작성 담벼락의 1.5배는 될 것처럼 높은 내성의 벽을 올려다보며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래, 이럴 때 써먹으려고 열심히 훈련한 몸이잖아.’

짜악-!

시원하게 드레스 밑단을 뜯어낸 나는 자유로워진 두 다리를 쭉쭉 뻗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하나 둘 셋에 뛰자.’

벽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부터 달려 추진력을 얻은 나는 약간 튀어나온 벽돌을 밟아 높이 도약했다.

휘릭-!

‘오랜만에 담을 넘으려니까 힘드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벽 틈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사투를 벌인 끝에 결국 무사히 내성에 진입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인적이 드문 정원에 숨어든 나는 프란츠의 침실 창문이 난 벽을 발견하고 잽싸게 기어올랐다.

콩콩.

콩콩콩.

“누구냐!”

누군가가 문도 아닌, 3층에 난 창문을 두드리자 질겁한 얼굴의 프란츠가 황급히 모습을 드러낸다.

“안녕하세요, 폐하.”

창가에 간신히 걸터앉은 나는 그와 눈을 마주한 채 방긋 웃었다.

“……공녀?”

나를 알아본 프란츠가 허둥지둥 창문을 열고 손을 뻗는다.

“감사해요.”

그의 도움을 받아 침실에 굴러떨어진 나는 흙먼지가 묻은 드레스를 툭툭 털며 눈을 굴렸다.

“아프시다고 들었는데 멀쩡하시네요.”

“좀도둑도 아니고, 다 큰 숙녀가 창문으로 드나들다니 기가 막히는군.”

내 등장에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프란츠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턱을 든다.

“오늘은 무슨 일로 나를 찾은 거지?”

“폐하, 아이네스 황녀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계세요?”

프란츠는 내 물음에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급격히 어두워진 그의 얼굴에 나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나도 제위에 오른 이후 아이네스에 대해 알아보지 않은 건 아니야.”

내가 자신을 찾아온 목적이 아이네스에게 있다는 것을 눈치챈 프란츠가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인다.

“아이네스가 알레테이아 교단의 현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폐하, 제가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을 믿어 주실 수 있나요?”

간신히 프란츠를 만났지만, 그가 내 말을 믿지 않는다면 전부 말짱 도루묵이었다.

‘그렇게 되면 윌레닌 제국은 포기하고 북부만이라도 구해야겠지.’

그러나 내 걱정과 달리 프란츠는 한숨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대의 말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지. 그대는 올바른 데다 총명하기까지 하니까.”

“평이 후하시네요.”

프란츠의 말에 조금 낯간지러워 뺨을 긁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린다.

“그대만큼 제국의 황후 자리에 걸맞는 사람도 없거늘.”

“……네?”

“아니다.”

나는 프란츠의 실없는 소리를 듣지 못한 체 입을 열었다.

“잘 들으세요. 아이네스 전하는 서른세 번의 삶을 반복한 회귀자예요.”

“……뭐?”

내 말에 프란츠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다.

“교단은 그런 회귀자를 헬리오스라고 부르고요.”

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의 프란츠에게 원작 책을 내밀며 말을 덧붙였다.

“이건 뭐지?”

“증거요. 그냥 말씀드리면 믿기 어려우실 테니까.”

내 말에 프란츠는 눈으로 확인하는 게 가장 확실하다며 책을 펼쳐 들었다.

빠르게 원작 책을 훑은 프란츠가 헛웃음을 지으며 나를 돌아본다.

“……이게 전부 다 사실이란 말인가?”

“만약 폐하와 아이네스 전하가 일전에 나누신 대화가 이 책 속에 묘사된 그대로라면요.”

“그대가 황성에 첩자를 붙였을 가능성은……!”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높아지는 프란츠의 목소리에 그를 흘깃하며 코를 찡긋했다.

“아까는 절 믿으신다면서요?”

“그럼, 그럼 선황께서는 자식의 손에 죽임을 당하셨다는 말인가!”

프란츠가 펼쳐 든 책장이 하필 그레고르가 죽는 장면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괴로워하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똑똑.

누군가가 프란츠의 침실문을 두드렸다.

“프란츠, 나야. 문 열어.”

고즈넉한 침실을 울리는 아이네스의 목소리는 어딘지 스산한 감이 있었다.

똑똑똑.

똑똑똑똑.

프란츠와 나는 잠긴 문을 억지로 열려는 듯 덜컥 손잡이를 움직이는 아이네스의 행동에 눈을 홉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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