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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0화 (205/486)

제220화

프란츠가 멋대로 아이네스의 명령을 거스르고 연회에 등장한 날이었다.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성녀와 결혼해.”

연회가 막바지에 다다라서야 프란츠를 찾아온 아이네스는 피곤하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 누른 채 말했다.

“마지막 경고야. 내게 더 자비를 바라지 마.”

자비를 가장했지만, 아이네스는 프란츠를 죽여 버리고 싶어도 당장 죽일 수가 없었다.

지금 그가 죽어 버리면 그레고르의 죽음에 대한 의문까지 수면 위로 떠오를 수도 있었으니까.

‘조금만 버티면 돼. 적어도 내가 에티모스 님의 부활을 다 준비할 때까지만이라도.’

아이네스는 제 속내를 숨길 노력조차 하지 않았기에 살의는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났다.

“아이네스, 더는 내 인생을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하지 마.”

프란츠는 언제고 자신을 죽이려고 마음먹는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성녀와 결혼하면 하차니아를 놔줄게.”

“…뭐?”

프란츠는 아이네스의 뜻밖의 제안에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공녀에게 호감을 가진 건 사실이지만, 내 인생을 걸 정도는 아니다.”

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새초롬한 듯하면서도 똘망똘망한 눈을 보고 있노라면 무가치한 제 꼭두각시 인생쯤은 걸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으니까.

“네가 그토록 불쌍하게 여기는 소수 민족들, 전부 북부로 흘러 들어갔잖아?”

아이네스는 프란츠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자신의 오라버니인 프란츠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아주 잘 알았다.

수십 번 지켜봤으니까.

‘내가 널 한두 번 겁박해 본 줄 알고?’

이전 생의 프란츠도, 그 전전생의 프란츠도 모두 아이네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 죽었다.

프란츠는 유약하고 심성이 다정해 자신 때문에 늘 무고한 이들이 희생당하는 걸 견딜 수 없어 했으니까.

“그들 전부를 놓아주겠다는 말이야. 더는 하차니아를 핍박하지도 않을 거고.”

“그 말은 하차니아의 독립을 인정하겠다는 건가? 일반적인 자치령이 아닌, 한 나라로.”

“그래. 그럼 적어도 오빠가 애틋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거야.”

프란츠의 물음에 느긋하게 대답하는 아이네스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네 자유를 대가로 말이야.

아이네스는 구태여 그 말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프란츠는 그녀의 뜻을 단번에 이해했다.

* * *

프란츠 황제의 국혼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백성들에게 공개하지도 않는 결혼이라니, 정말 결혼식을 한 건 맞을까?’

알레테이아의 성전에서 이뤄졌다는 프란츠의 성혼을 떠올린 나는 씁쓸한 미소를 입에 건 채 황후에 대한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자애로운 달리아 황후의 배려로 윌레닌 제국의 북부가 완전한 독립을 인정받다. ]

달리아 윈드로제라는 가명을 쓴 퀴리오스는 황후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제 특권을 발휘해 하차니아의 독립을 지지했다.

핍박받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는 게 성녀로서 힘들다는 이유였다.

‘자애로운 황후님이라… 세간의 사람들은 전부 이렇게 생각하겠지.’

황후가 된 퀴리오스는 활발한 자선 활동을 펼쳐 심지어 북부 내에서도 평이 좋았다.

헛웃음을 참을 수 없어 피식 웃는 내 정수리 위에 누군가가 턱을 괴었다.

“무슨 기사길래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어?”

막 훈련을 끝내고 돌아온 에녹이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성녀, 아니, 황후 말이야. 행보가 수상해서.”

“뭐가 수상한데?”

“북부를 언제 봤다고 우리의 독립을 돕는다는 건지 모르겠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

퀴리오스는 교단의 다른 현자인 셀레네처럼 아이네스와 적대적인 관계도 아닌 것 같았다.

내 말에 교단 일이라면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에녹이 어깨를 으쓱한다.

“교단도 황실도 이제 하차니아에 더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거 아니겠어?”

“그럼 다행인데…….”

‘감이 안 좋단 말이지.’

에녹의 말에도 인상을 풀지 않는 내 무릎 위로 폴짝 뛰어오른 루카스가 내 이마를 토닥토닥 두드린다.

“넌 걱정이 너무 많다.”

나는 내 목에 안기듯 감긴 루카스를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지킬 게 많아져서 그래, 루카스.”

에녹은 내게 안긴 루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몇 번을 봐도 적응이 안 돼. 이 곰돌이가 선황자 전하라고?”

에녹이 루카스를 만지기 위해 손을 뻗자,

탁!

“악!”

루카스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에녹을 향해 새까만 인형 눈을 부라린다.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라.”

“……까칠한 게 선황자 전하 맞네, 맞아.”

에녹은 루카스와 붙어 있고 싶지 않다며 내 방을 서둘러 벗어났다.

나는 그가 나가자마자 인형을 달랑 안아 올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루카스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아무래도 폐하를 한번 만나 봐야 할 것 같은데.”

“네가 그토록 원하던 독립은 거머쥐었는데 굳이 황제를 신경 쓸 필요 있나?”

루카스는 내가 위험한 짓을 벌이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황성은 지금 내 입장에서는 호랑이 굴이나 다름없었으니 시큰둥한 반응은 예상한 것이었다.

“하지만 셀레네의 말대로라면 아이네스는 애초부터 윌레탄 민족만 희생시킬 생각이었다는 거잖아.”

나는 루카스를 회유하기 위해 그의 머리털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을 덧붙였다.

“폐하는 그런 대량 학살은 원하지 않을 거야. 나도 그렇고.”

게다가 성서에서 묘사된 종말도 마음에 걸렸다.

“아이네스의 희망처럼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게 아닌, 그냥 이 세계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내릴 확률도 있다고 말했잖아.”

내가 해석한 성서에는 세계의 끝이 묘사될 뿐, 시작은 언급도 없었다.

“루카스도 내 해석이 맞는 것 같다며.”

“그래. 교단에서 엿본 연성진과 성서대로라면, 아이네스가 준비하는 건 라그나로크니까.”

“라그나로크?”

내가 생소한 단어에 토끼 눈을 뜨자, 책상 위에 통통 튀어 올라간 루카스가 짝다리를 짚은 채 입을 연다.

“술사들 사이에선 신들의 종말이라고 불리는 마법이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파괴하는 마법이지.”

“루카스가 성전에서 본 연성진이 라그나로크를 불러일으키는 마법과 흡사했다는 거야?”

“나는 도저히 그 마법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리란 희망이 들지 않는군.”

내 물음에 짧게 고개를 까닥이며 대답한 루카스는 책상 위에 지도를 툭 차서 펼쳐냈다.

“사람 한 명분의 영혼과 육체를 대가로 이만한 대지를 파괴할 수 있지. 윌레닌 제국민 절반이라면…….”

나는 루카스가 짚고 선 지역의 이름을 확인하며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전대륙을 무너뜨리는 것도 가능하겠네.”

나는 침묵으로 내 말에 동의하는 루카스를 바라보며 단호히 입을 열었다.

“……역시 하차니아가 완전히 독립해서 제국과 단교되기 전에 폐하를 뵈어야겠어. 결국 진실을 감당하는 건 그의 몫이니까.”

* * *

“바람둥이.”

다그닥 다그닥.

바퀴가 움직이는 소리에 히스의 중얼거림이 거의 묻힐 뻔했다.

“응? 황성에 가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러나 용케 그의 말을 알아들은 내가 고개를 들자, 내 맞은편에 앉은 히스가 나를 돌아본다.

“하지만 나는 공녀가 바람둥이라도 괜찮습니다.”

히스의 뜬금없는 다짐에 두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자, 소년은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황제나 공작을 첩으로 들여도 반대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상한 소리하지 마, 히스.”

“다만 같은 침실을 쓰는 건, 아니, 같은 저택에 사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나는 자신이 정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히스의 믿음을 구태여 깨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구나.”

“네. 이왕이면 다른 영지에 별채를 마련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나는 이어지는 히스의 말에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가급적 만남은 1년에 한 번 정도로…… 아니, 5년에 한 번이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게 무슨 첩이야? 그냥 남이지.’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지만 애초에 전제부터 틀려 먹었다.

“히스, 나는 황제 폐하의 애인도 아니고 트리스탄의 애인도 아니야.”

“그럼 황성에는 또 왜 가시려는 겁니까? 이제 볼 일도 없지 않습니까.”

“내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는데 가만히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어서.”

내 대답이 불만이라는 듯 히스의 고운 미간이 구겨진다.

“공녀는 너무 상냥해서 문제입니다.”

‘다들 나를 야무지고 똘똘하다고 평가하지, 착하거나 상냥하다고 생각하진 않던데.’

“나보고 상냥하다는 거 히스뿐이야.”

나는 농담하듯 웃었지만, 히스는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한 얼굴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내 세상에 공녀만큼 상냥한 사람은 없습니다.”

끼이익.

“……힘들 정도로.”

마차가 멈추는 소리에 히스가 나지막하게 덧붙인 말이 감춰진다.

‘뭐라고 한 거지?’

싶어 캐물으려는 순간, 먼저 문을 열고 내려간 히스가 내게 손을 내민다.

“서문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부디 위험한 짓은 하지 마세요.”

“응. 금방 돌아올게.”

다시 그에게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험난할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가볍게 내뱉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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