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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9화 (204/486)

제219화

새까만 흑단으로 만든 하차니아의 마차는 어딜 가나 눈에 띄었다.

“저 마차, 하차니아의 것 아니오?”

황성에서 하차니아의 수도 저택을 향해 달려가는 마차를 발견한 상인 한 명이 의아한 눈을 크게 뜬다.

“우성학 정책이다 뭐다, 나라에서 사람을 죄 잡아간 이후로는 보이지 않더니 희한하구려.”

“레오노라 공녀님이라도 행차하셨나 보죠, 뭐. 황제와 친하다고 들었어요.”

남자가 운영하는 과일 가게 바로 옆에서 장사를 하는 꽃가게 사장이 어깨를 으쓱하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어린 공녀가 보통내기가 아니더라고요. 황제와 공작을 옆구리에 끼고 무슨 미소년 노예를 부린다던데?”

꽃가게 사장의 앞에는 평민들이 주로 읽는 타블로이드지가 대놓고 펼쳐져 있었다.

[멜로니아 후작 부인의 인터뷰: 어린 고위 귀족의 참상 ]

“레오노라 공녀는 쁘띠 플뢰르로 선발되어 유명세를 탔잖아요?”

타블로이드지를 과일 가게 사장 앞에 내려놓은 여사장은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이었다.

“인기를 등에 엎고 아주 기고만장한 모양이더라고요. 어른 무서운 줄 모르고 말이에요.”

“공작은 점잖은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자식 교육은 제대로 못했나 보지.”

여사장의 말에 금세 동조해 레오노라의 흉을 보는 남자 앞에 머리를 양갈래로 땋은 소녀 한 명이 불쑥 머리를 들이민다.

“아저씨.”

레이첼은 낭랑한 목소리로 상인의 주의를 끌었다.

“응?”

그녀는 자신을 돌아보는 남자 앞에 대뜸 사과 한 바구니를 들이밀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 과일이 전부 상했는데요? 환불해 주세요.”

“뭐, 뭐라고?”

“잘 보세요.”

레이첼은 당황한 남자의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구니를 높이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싱싱한 과일로 위를 덮어 놓으면 아래 썩은 과일은 보이지 않으니까 몰래 섞어서 파는 거 아니에요?”

그녀의 말처럼 남몰래 상한 과일을 섞어 팔던 남자는 말을 더듬거리며 턱을 긁었다.

어리숙해 보이는 데다 외지인 같기에 부러 부실한 바구니를 줬더니 그새 걸린 모양이었다.

“아, 아니…! 아래에 공기가 안 통해서 상했나? 원칙상 환불은 곤란한데, 이거 어쩌지?”

레이첼은 남자의 되도 않는 변명에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휙 사과 바구니를 내던졌다.

“남 욕할 시간에 본인 과일이나 신경 쓰시지! 과일 앞에서 험담이나 하니까 사과가 죄 썩는 거 아니겠어요?!”

데구르르.

매대 위를 구르는 사과 몇 알을 허둥지둥 챙긴 남자가 인상을 찡그린 채 버럭 목소리를 높인다.

“허. 보나 마나 타지 사람 같은데 네가 뭘 안다고 입을 놀려?!”

남자는 황도에 자리 잡은 지 어언 20년이 넘어가는 상인이었다.

“귀족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걸 모르나?”

레오노라는 상점가를 방문할 때마다 씩씩하고 예의 바른 모습을 보인 덕에 인기가 많았지만, 어린 귀족이 제 집안의 권력을 등에 엎고 상인에게 행패를 부리는 일은 흔하다 못해 일상이었다.

‘결국 공녀도 똑같은 게지!’

“아저씨는 뭘 안다고요!”

레이첼은 남자의 호통에도 기죽지 않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맞아요! 아저씨가 뭘 안다고 공녀님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립니까?!”

소녀를 따라온 올랜도의 손자 또한 레오노라를 옹호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남자는 다짜고짜 상품의 흠집을 잡으며-흠이 있는 건 맞았지만- 제게 눈을 부라리는 레이첼과 소년을 번갈아 바라보다 솥뚜껑만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꼬맹이들을 그냥 확!”

그러나 남자의 손은 그보다 더 두터운, 거친 바닷바람에 단련된 단단한 손에 저지되고 말았다.

“지금 내 손주를 때리려고 한 것이오?”

올랜도의 노회한 눈이 희번득 빛난다.

보호자 없는 어린아이에게 대뜸 손을 올렸던 과일 가게 사장은 찔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됐소! 소란 피우지 말고 그냥 가시오!”

“과일 값은?”

“환불해 주겠소!”

야무지게 사장에게서 과일값까지 돌려받은 레이첼은 콧방귀를 흥 뀌며 발을 굴렀다.

“으씨. 자기들이 뭐라고 알지도 못하면서 공녀 욕을 해?”

그녀가 사랑하는 노엘이 요즘 공녀 때문에 심란해 보이는 건 걱정이었지만, 레이첼은 레오노라가 다른 사람에게 욕을 먹는 꼴은 참을 수 없었다.

‘공녀 욕을 할 수 있는 건 나뿐이야!’

레이첼만이 노엘의 사랑을 두고 레오노라와 경쟁할 수 있는 라이벌이었으니까.

“그러니까요. 그리고 공녀님이 황제와 공작을 동시에 만난다고 한들, 그게 뭐 어때서요?”

레오노라의 도움으로 병을 치료한 올랜도의 손주는 궁시렁거리며 과일가게를 흘깃했다.

“인기가 많은 걸 어떡하라고?”

“지들도 황제와 공작에게 동시에 고백 받아 보라고 해! 안 만나고 싶겠나!”

올랜도는 레이첼과 자신의 손주가 가십지를 그대로 믿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이 기사 뭐예요?”

나는 멜로니아 후작 부인의 인터뷰가 대문짝만 하게 실린 타블로이드지를 탁자 위에 펼쳐 놓으며 써머를 노려보았다.

“뭐, 일간지를 발행하는 게 저희 발렌타인사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아이네스 황녀가 장악한 언론사들의 소행이겠죠.”

써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지만,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하차니아가 막 독립국으로 거듭나려는 이 시점에 이런 추잡한 소문은 필요 없는데.’

소수 민족 말살 정책을 피해 북부로 도피한 사람들이야 무조건 하차니아의 독립을 지지하겠지만, 황도에 남은 윌레닌 제국민들은 아니었다.

‘그 사람들도 아이네스의 흉계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내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나는 내가 황제와 공작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기사를 천천히 읽어 내리다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내가 언제 프란츠와 트리스탄을 가지고 놀았어?! 둘 다 자주 만나지도 않는데!”

‘게다가 난 겨우 열두 살이라고.’

이런 가십에 휘말리기엔 너무 어리지 않았나.

내가 분개하며 신문을 내팽개친 순간, 문을 두드린 랄라가 빼꼼 고개를 내민다.

“아가씨, 프란츠 폐하가 방문하셨어요.”

랄라의 말에 써머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간다.

“어머. 소문이 반쯤은 사실일 수도 있겠네요? 황제 폐하의 사적인 방문이라.”

“요, 요 근래 프란츠는 조금 자주 만나긴 했지만….”

당황한 내가 써머에게 변명을 하기도 전에 랄라가 발랄하게 말을 잇는다.

“아! 트리스탄 공작 각하께서도 응접실에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세요.”

“흐응?”

써머는 랄라의 말에 흥미로운 그림이라며 펜을 집어 들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아가씨에게 불리한 기사를 쓰진 않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오호호.”

‘둘 다 무슨 일이지?’

나는 의심쩍은 써머의 웃음소리를 뒤로한 채 서둘러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 * *

아빠가 별채를 내 개인 공간으로 쓰는 것을 허락해 줬기 때문에 내 응접실은 공작성의 응접실만큼 넓었다.

햇빛이 잘 들어오도록 설계된 통창을 등지고 앉은 소년 둘을 발견한 나는 우아하게 드레스를 들어 올렸다.

“제국의 영광된 태양을 뵙습니다.”

먼저 프란츠에게 인사를 한 나는 언질도 없이 공작성을 방문한 트리스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이에요, 트리스탄.”

그러자 프란츠보다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뚜벅뚜벅 내게 걸어온다.

“괜찮은 건가.”

못 본 사이 키가 헌칠해진 트리스탄은 남주답게 휘황한 외모를 뽐내며 내 뺨에 손을 올렸다.

“네, 괜찮아요.”

“아픈 곳은.”

“없어요.”

나는 언뜻 절절하게 들리는 트리스탄의 다정한 목소리에 의아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따라 오버가 심하네.’

“다행이다. 네 곁을 지키지 못해 네 기사로서의 면목이 없었는데.”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내 얼굴에서 손을 뗄 줄 모르는 트리스탄을 살짝 밀어내자, 그가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한쪽 무릎을 꿇는다.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 나는 너만을 위해 존재하는 기사니까.”

아무리 내 기사가 되어 주겠다고 맹세했다지만, 트리스탄은 엄연히 솔로아 공작령을 다스리는 권력자였다.

“일어나요, 트리스탄. 이런 고리타분한 인사를 할 필요는 없어요.”

내 앞에 주저앉는 트리스탄이 부담스러워 손을 젓자, 그가 단호히 눈을 빛낸다.

“아니, 필요해. 난 너의 기사니까.”

‘…기사라는 단어를 왜 이렇게 힘주어서 말하는 것 같지?’

“큼, 크흠!”

트리스탄의 행동에 어리둥절한 내 옆얼굴로 따가운 시선이 꽂힌다.

“폐하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제야 프란츠의 존재를 상기한 나는 언뜻 초조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움직이실 수 있게 된 건가요?”

아이네스가 구금을 풀어준 거냐는 내 물음에 프란츠는 뜸을 들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교단의 성녀와 내 국혼이 성사될 예정이네.”

나는 프란츠의 말에 무어라 대답해 줘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결국 아이네스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 건가.’

오랫동안 아이네스의 꼭두각시 노릇만 했던 사람이니 이제 와 그녀의 통제를 거부하는 건 힘들 수도 있었다.

“축하드린다고 말해야 할까요?”

“글쎄.”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폐하께서 싫은 일을 강행하실 필요는 없어요.”

“…딱히 싫진 않다.”

의외의 대답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나를 빤히 바라본 프란츠가 말을 잇는다.

“얻은 것이 없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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