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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8화 (203/486)

제218화

악단이 경쾌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둥그런 원을 그린다.

히스는 빵처럼 부푼 드레스가 사악, 사악 바닥을 쓸고 있는 인파 사이로 나를 이끌었다.

“어디 가?”

토끼 눈을 뜬 내가 묻자, 가볍게 고개를 숙인 그가 대답한다.

“프란츠 황제를 구해야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걸 어떻게 알았지?!’

놀란 내 반응이 우습다는 듯 작게 웃은 히스는 한산한 복도로 빠져나온 후 포탈을 열었다.

“황제의 침실과 이어진 포탈입니다.”

공간 이동 마법은 기본적으로 고위급에 속하는 마법인 데다, 마법의 시동자인 술자가 아닌 다른 사람만 이동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래서 아크레아가 마도 왕국이라고 불렸던 거겠지.’

나는 아무렇지 않게 어려운 마법을 소화하는 히스를 바라보다 이맛살을 찌푸렸다.

“히스, 몸이 변하고 있어.”

포탈을 여는데 많은 마나를 소모해서일까.

나는 점점 어려지는 히스의 동근 이마를 쓰다듬었다.

“일시적인 눈속임에 불과했으니까요.”

씁쓸하게 대답하는 히스가 너무 슬퍼 보여서 나는 소년을 위로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히스, 나는 네가 어떤 모습이든 사랑할 거야.”

그만 내버려 둔 채 낡아 가는 세상에서 함께 울어 줄 수 있도록.

“사랑하겠다고 맹세했으니까.”

내 고뇌가 담긴 위로였지만, 히스의 입가에 걸린 서글픈 미소는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 * *

포탈 너머로 사라져 가는 레오노라를 담담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히스는 이내 완전히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사랑하겠다고 맹세했으니까.”

자그마한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히스는 레오노라의 다정한 말을 떠올렸다.

그의 주인님은 상냥한 사람이라 건네는 위로 또한 다정했다.

“하지만 그런 맹세 따위 없어도 사랑해 주길 바라는 게 나의 욕심입니다.”

당신에게 절대, 절대 들킬 수 없는.

* * *

히스가 열어 준 포탈을 뚫고 프란츠의 침실에 들어선 나는 내가 기억하는 아이네스의 침실보다 훨씬 더 조야한 풍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명색이 황제의 침실인데 먼지가 쌓이게 내버려 뒀다고?’

“누구냐!”

부유하는 먼지에 콜록, 콜록 잔기침을 하자 인기척을 느낀 프란츠가 검을 든 채 뛰쳐 나온다.

“…공녀? 그대가 어찌.”

침입자가 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프란츠는 멍한 얼굴로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여, 여긴 내 침실인데.”

“알아요. 곤란한 상황에 처하신 것 같아서 구하러 왔어요.”

곤란하다는 듯한 프란츠의 말에 방긋 웃으며 대꾸한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래 봬도 제 취미가 용사 활동이거든요.”

공주가 감금을 당했으면 탈출을 도와주는 게 용사의 도리 아니겠나.

“괴상한 소리를 하는군.”

내 설득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 프란츠는 너털웃음을 지으면서도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그대는 짐을 도울 수 없어.”

“어째서요?”

프란츠는 의아한 내 시선에 굳게 닫힌 침실 문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모든 황궁인을 포함한 황성 전체를 아이네스가 장악한 상황이다. 황제의 친위대조차 아이네스의 명령을 우선시하는 상황에 그대가 나를 도우면 큰 해를 입을 거야.”

“저는 황궁인이 아니니 폐하를 구금하라는 아이네스 전하의 명령 또한 듣지 못했는걸요.”

나는 나와 함께 침실을 벗어나길 저어하는 프란츠의 손목을 덥석 잡은 채 포탈 앞에 섰다.

“그대가 짐을 돕겠다고 나서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얼떨결에 내게 딸려온 프란츠가 뒤늦게 묻는다.

‘그거야 네가 드디어 정신을 차린 것 같기도 하고…….’

아이네스가 마음대로 활개를 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폐하를 돕는 게 아니라 아이네스 황녀 전하를 방해하려는 거예요.”

“뭐?”

“그냥 저 믿고 따라오세요, 폐하.”

나는 내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프란츠를 포탈로 막무가내로 떠밀며 말을 덧붙였다.

“황궁은 곧 폐하의 집인데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잖아요.”

“…….”

내가 붙잡은 손목을 뿌리치지 못하는 프란츠가 어떤 눈빛을 하는지 눈치채지 못한 채.

* * *

포탈을 통해 곧장 연회홀의 입구로 돌아온 나는 황제를 발견하고 우왕좌왕거리는 궁인들을 향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어서 문을 열지 않고 뭐 하는 건가요? 호명관이 된 자가 폐하의 존안을 알아보지 못하나요?

인사를 올리긴커녕 근위대를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태도에 기가 막힌 내가 묻자, 호명관이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아, 아닙니다! 제가 폐하를 알아뵈지 못할 리 있겠습니까?”

“알아봤다면 냉큼 문을 열어 드리세요!”

“화, 황제 폐하 드십니다! 프란츠 드 윌레닌, 제국의 태양이 드십니다!!”

결국 황제가 제 앞에 섰다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호명관이 목청 높여 그의 이름을 부른다.

“프란츠…! 폐하!!”

연회홀에 들어선 나와 프란츠를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다름 아닌 아이네스였다.

“폐하께서는 몸이 편찮으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황제의 등장에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달려 나온 아이네스는 프란츠의 손목을 꽉 붙잡으며 잇새로 말했다.

“무리하지 말고 침실에서 쉬시라고 했을 텐데요, 폐하.”

“걱정은 고맙다.”

프란츠가 씩 웃어 주며 아이네스를 뿌리치자,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나와 프란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 집에서 연회가 열렸는데 객들에게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겠는가.”

단호하게 멀어지는 프란츠를 붙잡지 못한 아이네스가 이를 부득 갈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너, 프란츠에게 무슨 바람을 넣은 거야?”

“맹세하는데 저는 폐하에게 먼저 접근한 적이 없어요.”

나는 마귀처럼 일그러진 아이네스의 예쁘장한 얼굴을 마주한 채 어깨를 으쓱했다.

“전하께서 벌이는 짓이 그만큼 무도하다는 뜻 아닐까요? 전하의 오라버니인 폐하께서도 반감이 들 만큼.”

“모든 건 교단을 위해서야. 아스테르로서 자각을 마친 너라면 나를 이해할 텐데.”

교단에서 정보를 빼내기 위해 아이네스의 눈치를 보던 일도 오늘로 끝이었다.

“현자인 셀레네도 전하와 뜻이 다른데, 고작 아스테르에 불과한 제가 전하의 심정을 어찌 전부 이해할 수 있겠어요.”

나와 아이네스는 이미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으니까.

* * *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아이네스는 뻔뻔하게 프란츠를 위시한 채 연회홀을 돌아다니는 레오노라를 노려보다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아이네스는 오라버니, 아니, 황제 폐하 걱정 때문에 오늘도 잠을 설치겠네요.”

아양 섞인 황녀의 목소리에 그녀가 앉은 소파 근처로 몸을 숙인 멜로니아 후작 부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폐하께 무슨 변고라도 생긴 걸까요?”

“레이디 멜로니아, 아이네스의 친우인 그대에게만 내 고민을 털어놔도 될까요? 아이네스는 그대를 믿으니까.”

“그럼요!”

고귀한 황녀가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직 자신만 믿는다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 멜로니아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아이네스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레오노라 공녀가 아무래도 우리 오라버니를 가지고 놀고 있는 것 같아요.”

“…네?!”

아이네스의 오라버니라면 프란츠, 즉 이 제국의 황제였다.

허수아비 황제라고 해도 권력의 정점에 선 사람이 고작 또래 여자아이에게 휘둘리다니.

멜로니아는 화들짝 놀라 상심한 듯 입술을 삐죽이는 아이네스의 손을 붙잡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황녀 전하?”

“생각해 보세요. 오늘 파티만 해도 오라버니의 파트너로 참석하겠다고 약조해 놓곤 다른 사람의 에스코트를 받았잖아요?”

“어머. 공녀가 원래는 폐하의 파트너였다는 말인가요?”

“네. 갑자기 약속을 어기고 다른 소년을 데려와서 폐하께서 상심이 많이 크셨어요.”

마치 프란츠가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이유가 레오노라에게 있다는 듯한 의미심장한 말에 멜로니아는 덩달아 말소리를 죽였다.

“어린 공녀가 아주 발칙하네요. 폐하께서 매우 기분이 나쁘셨겠어요.”

“그래도 레오노라 공녀가 또 어떻게 설득을 했는지 결국 얼굴을 비추긴 하셨네요.”

아이네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레오노라 옆에서 싱긋 웃고 있는 프란츠를 가리켰다.

“늘 공녀에게 이리저리 휘둘리시니 폐하의 동생이자 가신인 아이네스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멜로니아.”

“생각해 보니까 트리스탄 솔로아 공작이 공녀의 기사 아니었나요?”

“네. 트리스탄이 레오노라 공녀에게 기사의 맹세를 했어요.”

멜로니아가 미끼를 물었다는 생각에 고개를 숙인 채 회심의 미소를 지은 아이네스는 손수건으로 물기 없는 눈가를 찍어냈다.

“약혼이나 다름없는 맹세로 알고 있는데, 요즘 그래서 트리스탄이 황도에는 걸음하지 않나 봐요.”

“세상에! 그럼 공녀는 솔로아 공작과 황제 폐하, 그리고 그 요정 같던 소년을 한꺼번에 만나고 있다는 건가요?”

아무리 어린 소녀라지만, 이제는 정식으로 약혼을 할 수도 있을 법한 나이였다.

멜로니아의 아연실색한 얼굴에 아이네스는 레오노라를 걱정하는 척 제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부디 비밀로 해 주세요, 멜로니아. 공녀의 명예가 걱정되니까요.”

“어휴, 황녀 전하도 참 마음이 여리셔요. 저만 믿으세요.”

멜로니아의 말에 아이네스는 방긋 웃었다.

‘물론 믿지.’

너의 가벼운 입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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