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화
폭풍 전야 같은 평화가 찾아왔다.
‘원작이 업데이트되지 않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미르탄 라일 이후로는 아이네스가 퍽 얌전하단 말이지.’
황실에서 트집을 잡지 않은 덕에 북부는 무사히 특별령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문화와 예술을 내세운 교류는 내가 예상한 대로 효과적이라, 각기 다른 구역을 배정받은 소수 민족들은 활발히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며 문화를 꽃피워 내고 있었다.
제국 내에 또 다른 작은 제국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도 어쩐지 불안해.’
침실에서 중정을 내려다보던 나는 딱히 흠잡을 구석이 없는 평온한 정경에 초조하게 손가락으로 창가를 두드렸다.
‘황성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 같으니 교단을 파헤쳐 봐야겠어.’
“룰루, 나갈 채비를 해 줘.”
“네, 아가씨.”
나는 설렁줄을 흔들지 않아도 귀신같이 자신이 필요할 때에 모습을 드러내는 룰루에게 턱짓했다.
* * *
내가 알레테이아의 성전을 방문하자, 교단의 지부장이자 아이네스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 엔코가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이한다.
“오랜만입니다, 공녀님.”
“그간 격조했어요.”
내 말에 엔코는 맞장구를 치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헬리오스 님도 공녀님도 저를 찾아 주지 않으시니 외로웠답니다.”
“헬리오스 님도 방문이 뜸하셨었나요? 많이 바쁘신가 보네요.”
“네. 두 분 다 최근 알레테이아의 성전에 걸음하는 일이 뜸해지셨기에 걱정했습니다.”
나는 엔코의 말에 두 눈을 가느스름히 뜨며 말했다.
“요즘 제국이 어수선해서 저도 몸을 조심할 필요를 느끼긴 하니까요.”
내가 말문을 틔우자 엔코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연다.
“아, 북문을 개방한 일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 일에 대한 공녀님의 사견이 궁금하긴 했습니다.”
교단에 입단한 나는 여태 그 누구도 해석하지 못했던 고어로 이루어진 성서를 해독했고, 셀레네에게 열등감을 가진 엔코를 감언이설로 꾀어냈다.
덕택에 아이네스만큼이나 나를 신임하는 엔코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손을 붙든다.
“고어를 해독하는 아스테르라면 저 같은 일개 교단원이 읽지 못하는 알레테이아 님의 뜻을 읽은 것이겠지요.”
나는 나를 향한 믿음을 드러내는 엔코를 향해 빙그레 웃어 주며 말을 이었다.
“알레테이아 님께서 엔코 님의 믿음이 응답하시길.”
반쯤은 진심인 말이었다. 나는 알레테이아의 교리에 완전히 동감하진 못했지만, 엔코처럼 열렬하게 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보답받기를 원했으니까.
하지만 내가 아는 신들은 대개 제멋대로인 데다 고마운 줄도 몰랐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전 사실 아스테르 님의 뜻에 공감합니다.”
“어째서요?
“아무리 선택받지 못한 비천한 이들이라도 살 곳을 빼앗을 필요까진 없었다고 생각하니까요.”
나는 엔코의 말에 갸우뚱 기울였던 고개를 바로 했다.
윌레탄 민족이 아닌 제국민들은 배우, 지식인, 오페라 가수부터 학생까지 다양했으니까.
“선택받지 못해요?”
“네. 성서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오직 윌레탄의 피를 잇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구원으로 여는 세상에 발을 내딛을 수 있다고.”
나는 엔코의 말에 미간을 좁히며 가는 기침을 토해 냈다.
“하지만 알레테이아의 성서에는 다른 말도 나와요. 알레테이아 님은 갈 곳 잃은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하셨어요.”
알레테이아의 성서는 코에 붙이면 코걸이, 귀에 붙이면 귀걸이가 되는 형식이었다.
해석하는 자마다 다른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성서를 언급하자 엔코가 나를 추켜세운다.
“벌써 고어를 꽤 해독하신 모양이군요. 대단하십니다, 아스테르.”
그를 따라 성전을 걷던 나는 눈에 띄게 줄어든 교단원의 수를 헤아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히 성전도 분위기가 살벌해지긴 했네.’
아이네스가 안팎으로 소수 민족을 솎아 내고 있긴 한 모양이었다.
“셀레네 님은 잘 지내고 계시나요?”
내 조심스러운 물음에 엔코의 입술이 비뚜름히 올라간다.
“늘 그렇듯 틀어박혀 기도만 올리고 계십니다. 에티모스 님을 맞이할 혼자만의 준비를 하는 거겠지요.”
아이네스가 셀레네와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인지, 엔코는 셀레네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늘 상냥하게 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엔코 님. 이건 성서의 새로운 해석안이에요.”
성서에서 엔코가 좋아할 만한 구절을 해독해 넘긴 나는 뛸 듯이 기뻐하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네가 종장의 막을 열 아스테르라는 건 알고 있나.”
종장의 막.
셀레네는 나를 이르러 분명 그리 칭했다.
마침 성서의 해독을 막 끝마친 상태였던 나는 그의 말에 미적미적 고개를 끄덕였다.
“그 종장이 당신과 교단의 끝을 말하는 거라면, 대충은.”
에티모스가 부활하면, 아이네스가 바라는 방식으로든 바라지 않는 방식으로든 지금의 세계는 끝이 나고 말 터였다.
한 영혼에게 그만 한 에테르, 방대한 양의 마나가 쏠리는 건 세계의 균형에 균열을 내는 짓이었으니까.
“아이네스가 바라는 끝과 당신이 바라는 끝이 다르다는 것도 알아요.”
“마치 날 이해하는 것처럼 자신만만하군.”
“셀레네, 당신이 자꾸만 나를 찾아오니까요.”
나는 내가 성전에 방문하는 날마다 내 주위를 기웃거리던 셀레네의 모습을 떠올리며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런 신앙심도 없을 그대가 해석이 불가능했던 구성서의 뜻을 읽어 내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을 뿐이다.”
“거짓말.”
나는 셀레네의 변명 같은 말에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목적 없이 움직인다는 말을 믿지 않아요.”
셀레네는 내 말에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이다 말을 이었다.
“우리 현자들의 뜻이 전부 일치하진 않는다는 것을 알아 둬라.”
‘그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현자라면 셀레네, 아이네스, 그리고 퀴리오스를 뜻했다.
‘교단을 통해 이루고 싶은 목표가 전부 다르다는 건가?’
나는 작은 기도실 문에 기댄 채 무릎을 꿇은 셀레네를 내려다보았다.
‘기도할 때는 한없이 경건해 보이기만 하는데.’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은발, 엄숙하게 가라앉는 눈동자에서 속세를 떠난 사람 특유의 고요함이 전해졌다.
“오늘도 신실하시네요.”
큼, 작은 헛기침을 하며 방문을 알리는 내 목소리에 고개를 든 셀레네가 나를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린다.
“성전에는 무슨 일로.”
“아이네스가 너무 조용한 게 수상해서요. 당신은 뭔가 아는 게 있을까 싶어서.”
셀레네가 내게 현자들의 목적이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언급한 그날, 그와 나는 사실상 손을 잡은 것과 다름없었다.
떠보는 듯한 내 말에 셀레네의 단정한 입술이 비틀린다.
“헬리오스가 얌전한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녀는 원하는 바를 전부 이뤘으니까.”
“……원하는 바를 전부 달성했다고요? 무슨?”
나는 셀레네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아이네스가 원하는 건 윌레탄 민족을 제외한 전국민의 몰락이었다.
그리고 난 북문을 열어 그 계획을 확실하게 저지했고.
“이제 황성을 에두른 황도에는 윌레탄 민족을 제외한 사람이라곤 단 한 명도 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게 아이네스가 계획한 일의 전부일 리 없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아이네스의 목표는 에티모스의 부활이니까요.”
나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셀레네가 답답해 가슴을 두어 번 내려치며 앞으로 나섰다.
“성서에는 선구자의 부활 의식을 묘사하는 부분이 있어요. 어마어마한 희생의 에테르를 요구하는 의식이죠.”
‘윌레탄 민족이 아닌 자들은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네스였으니까, 그녀가 쓸모없다고 여기는 소수 민족들 전부를 희생시킬 계획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사병들을 끌어모으고 훈련시키며 대규모 전쟁을 준비했고, 해서 아이네스는 북부로 도피한 사람들을 쉬이 건드릴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당신의 추론은 틀리진 않았지만, 헬리오스의 잔악함을 얕보고 있습니다. 윌레탄 민족 자체는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요.”
“의미가 없다니, 그럼 부활 의식의 제물로 황도에 남은 사람들을 쓸 수도 있다는 말인 건가요?”
“맞습니다. 헬리오스는 황도에서 내몬 사람들이 아니라, 황도에 남은 제국민 전체를 희생시키려고 들 겁니다.”
“제국민 절반 가까이 되는 인구예요. 말도 안 돼.”
“에티모스만 부활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고 믿는 게 저와 같은 알레테이아의 교단원들입니다. 저버린 세계의 제국 따위, 무너진다 한들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나는 셀레네의 설명에 아득한 눈을 감았다 떴다.
‘하지만 성서가 묘사하는 에티모스의 부활이 정말 새로운 세계의 시작일까?’
에티모스가 새로운 생명을 얻는 날, 이 세계는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얻을지니,
안온한 어둠이 그대의 두 눈을 덮으리라.
‘이 구절은 누가 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