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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0화 (198/486)

제210화

전국에 호외로 퍼진 황후 후보 명단을 손에 쥔 아이네스는 거침없이 알현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미친 거야, 프란츠?”

가신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프란츠는 까랑까랑한 여동생의 목소리에 비스듬히 고개를 들었다.

“뭐가?”

“레오노라 하차니아의 이름이 왜 황후 후보 명단에 올라가 있는 건데?!”

아이네스는 뻔뻔한 프란츠의 얼굴에 울컥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득바득 자신에게 달려드는 아이네스를 내려다보던 프란츠는 손을 들어 가신과 시종을 죄 물린 다음에서야 입을 열었다.

“나는 아내조차 내 마음에 차는 사람으로 맞지 못하는 건가?”

“네가! 네가 도대체 언제! 공녀를 봤다고!”

아이네스는 프란츠의 헛소리에 기가 막혀 소리를 질렀다.

누가 보면 레오노라를 잘 알기라도 하는 듯한 어투였지만, 프란츠는 레오노라와 친밀한 사이기는커녕 지인조차 아니었으니까.

“최근에 만나고 왔어.”

“하차니아에 다녀왔다는 말이야?”

아이네스는 최근 자신에게 보고되었던 프란츠의 행적을 떠올리며 날카롭게 인상을 찌푸렸다.

‘단순 외출이라고 보고되었던 건이 북부행이었다고?’

물갈이를 할 시기가 된 모양이라고, 아이네스는 이를 까득 갈며 프란츠의 주변 인물들을 떠올렸다.

“내 시종을 쥐 잡듯 잡아도 소용없을걸. 애초에 내가 모두를 속이고 북부에 다녀온 거니까.”

아이네스의 속내를 눈치챈 프란츠가 한숨을 내쉬며 단상에서 내려온다.

“네가 소수 민족은 저열하고 난폭해서 반드시 제국 밖으로 몰아낼 족속들이라면서?”

“그래. 넌 분명 내 말에 동의했어! 그래서 윌레탄 민족으로만 제국을 구성하기 위한 정책을 내세운 거잖아!!”

프란츠는 잔뜩 성이 난 아이네스의 어깨를 건성으로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으응. 그런데 이상하잖아? 그토록 영민하다고 알려진 공녀는 북부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소수 민족을 받아들이고 있기에 궁금해졌어.”

“그래서 내 허락도 없이 황성을 비웠다고?”

“그래. 네 허락 없이.”

프란츠는 아이네스의 까칠한 목소리에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황좌에 앉은 이 나라의 황제이지만, 네 허락 없이는 어느 곳에도 가지 못하는 꼭두각시니까.”

그렇게 말하는 프란츠의 녹안은 시체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채였다.

“잘 아네, 프란츠.”

아이네스는 무표정한 프란츠의 얼굴을 올려다보다 손을 뻗어 그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살고 싶으면 내 말에 거역하지 말라고, 난 분명히 경고했어.”

아버지인 그레고르도 죽였는데 동기인 프란츠 따위, 죽이지 못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레고르에 이어 프란츠까지 살해당하면 아무리 아이네스라도 의혹을 피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단순한 의혹일 뿐이었다.

“단순히 귀찮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 싫어서 살려 뒀다는 걸 기억해, 프란츠.”

아이네스에게는 사람들의 의심 따위 쉬이 피할 만한 권력과 힘, 교단이 있었으니까.

“널 대신할 사람은 차고 넘치게 많아. 같잖게 네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아이네스의 경고에 프란츠는 힘없이 웃으며 입술을 벌렸다.

“……그럼 죽여.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어.”

“미안하지만 프란츠, 네가 죽는 날까지 내가 정해.”

툭.

프란츠를 바닥에 내던지듯 내려놓은 아이네스는 그의 작은 희망을 짓밟으며 알현실을 벗어났다.

* * *

침실로 돌아온 아이네스는 기분 내키는 대로 화병을 집어 들어 벽에 내던졌다.

쨍그랑.

얇은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잘 단장된 방을 울리고, 놀란 시녀가 허겁지겁 달려와 황녀의 어깨를 붙든다.

“화, 황녀 전하! 진정하세요! 다치시겠어요!”

자신을 말리는 시녀를 뿌리친 아이네스는 피범벅이 된 손을 소파에 닦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레오노라, 그 하찮은 계집애가 뭘 어떻게 했길래 프란츠가 이제 와서 내게 반감을 보이는 거지?”

서른 번이 넘도록 반복한 삶이다.

개중에 그레고르가 제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어 프란츠가 제위에 오른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다정한 오라버니’ 역할을 맡은 프란츠는 늘 그녀의 뜻대로 행동해 주었다.

“글쎄요. 황위에 오른 이후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 보이셨어요.”

“프란츠는 잡생각이 많은 부류니까. 그래서 일부러 여자든 돈이든 쾌락에 빠져들 만한 것들은 전부 눈앞에 대령했잖아.”

“쾌락도 언젠가는 질리는 시기가 오니까요, 어리석은 헬리오스.”

아이네스의 말에 대답하는 중저음의 고혹적인 목소리는 시녀의 것이 아니었다.

또각.

또각.

단단한 대리석 바닥을 걸어오는 구두 굽 소리는 주인의 성정만큼이나 단호했으며 망설임이 없었다.

“……퀴리오스 님.”

붉은 커튼을 밀어내며 등장한 여자에게 아이네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헬리오스, 그대는 무수한 삶을 반복했지만 어른으로 살아가는 경험은 해 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인간의 감정이 가지는 힘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걸 알아야 해요.”

퀴리오스의 타박에 아이네스는 반발하듯 언성을 높였다.

“버러지들이 느끼는 감정을 내가 왜 알아야 하죠?”

“그런 감정이 때로는 벌레들을 성가실 정도로 강력한 존재로 탈바꿈시키니까요.”

“강력한 존재라니, 말도 안 되는-!!”

“감히 내게 언성을 높이지 말아요, 헬리오스.”

퀴리오스는 아이네스의 말을 끊으며 차갑게 조소했다.

아이네스에게 내려진 신의 이름, 헬리오스.

교단 내에서 최상위층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지만, 셀레네와 헬리오스를 통제하는 퀴리오스만큼은 아니었다.

퀴리오스는 선구자 에티모스를 부활시킬 그릇이자 열쇠, 모든 교단원들을 아우르는 1인자였으니까.

“황제는 사랑에 빠진 거예요, 아이네스.”

“……사랑?”

“뭐, 아직은 풋사랑이겠죠. 그 정도는 내가 해결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퀴리오스가 아이네스를 타이르듯 손을 내밀었지만, 아이네스는 꿋꿋하게 선 채 그녀를 거절했다.

“죄송하지만, 퀴리오스 님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은데요.”

“나도 미안하지만, 교단은 더는 아이네스에게 단독으로 일을 맡기지 않기로 결정했어요.”

“퀴리오스 님!”

“황성 안이니 달리아라고 불러도 좋아요.”

퀴리오스는 자신의 새로운 이름을 언급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달리아 윈드로제, 교단에서 황후로 내세운 성녀가 바로 퀴리오스였다.

“지금도 봐요. 아크레아의 금술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해 미르탄 라일을 조종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아이네스의 침실에 굴러다니는 투명한 실뭉치를 집어 든 퀴리오스의 손에서 화르륵 불이 타오른다.

“보아하니 또 마나가 부족해진 모양이죠.”

퀴리오스는 아이네스의 한계를 지적하며 혀를 찼다.

아스테르 없이는 제대로 된 마법도 사용하지 못하는 헬리오스라니!

한숨이 나올 정도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아크레아의 금술은 기본적으로 연금술과 궤가 같아서, 큰 힘에는 큰 희생을 요구하는 법이랍니다.”

“꺄아악!!”

퀴리오스는 자신의 정체, 교단, 아크레아의 비밀 따위를 전부 들은 시녀를 망설임 없이 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제 미르탄 라일은 자신의 동포를 전부 죽일 때까지는 살인을 멈추지 못할 거예요.”

아이네스가 미르탄 라일의 행적을 지켜볼 수 있도록 수정구를 건넨 퀴리오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잇는다.

“아이네스, 교단의 진정한 힘이란 이렇게 사용하는 거랍니다.”

* * *

“크아악!”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비명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꺄악, 아아악!!!”

선혈이 낭자하는 을씨년스러운 풍경의 주인공은 미르탄 라일.

지금은 미르암 민족을 이끄는 수장이지만, 한때는 황제의 호위대를 맡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던 기사였다.

울부짖으며 도망가던 사람들은 결국 미르탄 라일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레오노라가 우물의 독이 퍼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미르탄 민족 구역을 폐쇄한 탓이다.

“라일 남작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

“미르탄 님! 사, 살려 주세요!”

막다른 골목에 가로막힌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지만, 미르탄은 동정심이라곤 전혀 없는 사람처럼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손이, 손이 멈추지 않아!”

사람들이 전부 숨을 거두고 나서야 제자리에 우뚝 선 미르탄이 검을 떨군다.

“……왜 계속 이런 파괴적인 충동이 드는 거지? 마을 사람들이 사용하는 우물에 독을 타는 걸로도 모자랐단 말인가?!”

자괴감에 빠진 미르탄은 결국 품속에서 단도를 찾아 제 배를 찔렀다.

푸욱.

“커억!”

바닥에 엎어진 채 괴로운 듯 꿈틀거리는 미르탄을 향해 작은 인영이 다가선다.

“이제 그만하면 됐어요, 미르탄.”

“커억, 억!”

“……연기 정말 잘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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