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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1화 (189/486)

제201화

섬세하게 구축된 연성진은 발동과 동시에 엄청난 마나의 폭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읏!”

밖으로 밀려나가지 않기 위해 몸을 수그린 채 손톱을 연성진에 박아 넣느라 가방이 날아가는 것조차 막지 못했다.

‘내 힘으로는 멈출 수 없어.’

한 번 발동된 연성진을 파훼하려면 비슷한 크기의 마나로 상쇄시키거나 방해 연성진을 구축해야 했다.

그러나 병이 발병된 내게는 그만한 마나가 없는데다 베리타스 연성진은 내가 반대 수식을 짤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수식이 아니었다.

‘이미 루카스의 마나가 담긴 상자를 삼켜 버렸는데 어떡하면 좋지?’

혼의 정보를 읽어 낸 연성진이 요동치며 루카스의 영혼을 담을 그릇을 찾겠다는 듯 지하실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이대로 두면 남아 있던 혼마저 소멸되어 버릴 거야.’

나는 루카스의 마나와 공명하여 순식간에 내 몸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한 마나를 느끼며 마지막 힘을 쥐어 짜냈다.

“여기, 여기 붙어! 루카스! 내 목소리 들려?!!”

루카스가 의식을 찾았다면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

손에 잡히는 물건 중 혼의 그릇에 가까운 것들을 연성진 중앙으로 마구잡이로 던진 순간 까무룩 세상이 어두워졌다.

* * *

명멸했던 세상에 다시금 빛이 찾아든다.

“일어나.”

귓속을 후벼파는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툭툭.

털뭉치가 뺨을 간지럽히는 감촉에 나는 쉬이 눈을 뜨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일어나라고, 레오노라!”

가물가물한 의식속에서 헤매던 나는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겨우 눈을 떴다.

“……응?”

“지금 나를 이런 몸으로 만들어 놓고 잠이 오는 건가?”

말투부터 짜증이 가득했지만 무척 그리웠던 목소리다.

아, 그러고 보니 나 연성진에 루카스의 혼을 담을 만한 그릇을 던지다 정신을 잃었지.

“루카스!!!”

제대로 연성진을 구축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으니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황급히 몸을 일으킨 나는 내 손등이며 뺨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는 물체를 발견하고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설마 이게 루카스는 아니겠지.’

“……루카스?”

“그래, 나다. 드디어 일어났군.”

“목소리만 들리는데? 루카스, 어디 있는 거야?”

나는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는 루카스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사벨라가 내게 내어 준 손님용 객실의 고풍스러운 벽지만 눈에 들어올 뿐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뭐지. 설마 너무 보고 싶어서 환청이라도 들은 건가?”

작게 중얼거리자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아 있던 곰인형이 휘리릭- 몸을 돌리며 날아오르더니 내 얼굴을 두 팔로 단단히 붙잡는다.

아니, 정확히는 대롱대롱 매달렸다.

“네가 연성진 중앙으로 인형을 던지지 않았나!”

“그래서 설마 인형 몸에 혼이 들어갔다는 거야?”

그것도 내가 세 살인가 네 살 무렵 갖고 놀던 곰인형에?

“도대체 왜 가방에 곰인형 따위를 넣고 다니는 거지? 너도 이제 열두 살일 텐데.”

탁! 탁!

곰인형이 어울리지 않게 짝다리를 짚으며 흉흉하게 눈을 빛낸다.

루카스는 분명 아주 서늘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거겠지만, 검은 유리알로 만들어진 곰인형의 눈이 너무 동그랗고 귀여워서 전혀 무섭지가 않았다.

“솜이 적당히 죽어서 베개로 쓰기 좋거든. 마차에서 베고 자려고 가져왔지.”

“하다못해 지하실 벽을 장식하던 검을 던져 줬다면 내가 이렇게 수치스럽진 않았을 거다.”

나는 절망스럽다는 듯 침대에 털썩 엎드린 곰인형의 어깨를 두드리며 면구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는 검보다는 인형이 낫다고 생각했어.”

“어째서?”

“이렇게 안을 수 있잖아.”

나는 나보다 작아진 루카스를 있는 힘껏 끌어안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돌아와 줘서 고마워, 루카스.”

티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잘게 떨려 온다.

어느새 눈물이 범벅된 내 얼굴을 제 보송보송한 손이 축축해질 때까지 닦아 낸 루카스는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울지마라. 마음 약한 건 여전하군.”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단 말이야!”

“그렇다면 내가 대마법사로서 널 잘못 가르친 거겠지. 이 세계에 유일한 진리가 있다면 그건 모든 생명은 순환한다는 거다.”

나는 시큰둥한 루카스의 반응에 괜히 그가 얄미워져서 곰인형의 폭신폭신한 등을 찰싹 내려쳤다.

“하지만 루카스가 떠날 때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말했잖아!”

“이 세상에는 영원한 이별도 만남도 없으니까, 레오노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루카스는 울먹이는 내 뺨을 다정하게 토닥여 주었다.

“그래도 이 멍청한 얼굴을 다시 보니 좋군.”

나는 그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한손으로 뺨을 닦으며 활짝 웃었다.

“응. 반가워, 루카스.”

그렇게 루카스는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물론 완전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 * *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보송보송한 제 팔을 내려다본 루카스는 등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새근새근 잠에 빠져든 레오노라의 이마에 손을 얹은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돌아온 겁니까.”

루카스가 자신을 발견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든 히스가 조용히 입을 연다.

“공녀가 깰 수도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누가 봐도 천진한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지만, 인형처럼 차분한 표정은 소년을 인간 외의 존재처럼 느껴지게 했다.

“뭐하는 거지.”

“마나의 흐름을 정리하고 있는 겁니다.”

루카스는 히스의 대답에 그제야 소년의 이마에 고통스러운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레오노라의 병이 발병된 건가.”

레오노라의 몸에 어딘가 이상이 있다는 것은 전부터 알았지만, 벌써 병증이 시작될 줄은 몰랐다.

‘내가 부족한 마나를 채워 주고 떠났으니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심장을 중심으로 순환하는 마나가 존재했지만, 레오노라의 마나는 순환의 고리가 군데군데 끊겨 있었으니까.

병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고리를 완성시킨 루카스는 레오노라의 병세를 살피며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흐름이 괴이하군. 더 이상한 건…….”

루카스는 레오노라의 이마에서 절대로 손을 떼지 않는 히스의 팔목을 붙잡았다.

“이 정도로 마나가 폭주하고 있는데 레오노라가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의문을 표하는 루카스의 말에 히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간헐적인 숨만 간간이 토해 내는 소년의 얼굴을 살핀 루카스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날뛰는 타인의 마나를 대신 통제하는 건 아무리 네가 강한 마법사라고 해도 사지가 찢겨지는 고통을 수반하는 일일 텐데, 미친 건가.”

“공녀가 아픈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매일 밤 스스로를 고문하고 있었다는 거냐?”

루카스는 히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지?”

막말로 소년은 레오노라의 가족조차 아니었으니까.

레오노라를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을 멍청이-물론 자신도 포함이었다.-는 차고 넘쳤으니, 굳이 히스가 그녀의 고통을 대신 견뎌 낼 필요는 없었다.

“저는 원래도 매일 밤 고문을 견뎌 냈습니다. 천 년의 시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아크레아의 소년왕.

마도 왕국의 비밀 병기.

고대의 강력한 술자들이 길러 낸 괴물.

히스는 자신을 가리키던 수많은 이름들과 자신을 도구로 이용하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폭주하는 레오노라의 마나에 간섭하는 건 몸에서 마나를 생으로 뽑아낼 때와 다름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지만, 구휼원에 갇혀 기계처럼 마나를 추출하던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그러니 지금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며 인내할 수 있습니다. 다만,”

훅 밀려 들어오는 마나가 날뛴 탓에 히스의 입가에 피가 고였다.

소년은 아무렇지 않게 흐르는 피를 제 소매로 닦아 내며 루카스를 내려다보았다.

“공녀가 아픈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네가 이런 짓을 벌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러니, 비밀로, 해 주십시오.”

루카스는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말을 내뱉는 소년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히스는 곰인형에 갇혀 황족으로서의 위엄은 전부 잃어버린 루카스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레오노라 대신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이 소년을 안도하게 했다.

트리스탄처럼 제국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지도, 가스파르처럼 레오노라의 맹목적인 애정을 얻어 내지도 못했으니까.

‘나도 공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어쩌면 그는 레오노라에게 조금쯤은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버려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히스는 언젠가 레오노라가 손수 벗겨 준 목줄을 꼭 쥔 채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는 말간 이마를 힐끔했다.

차라리 다시 노예가 되고 싶은 제 심정을 이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이었으니까.

‘그러니 숨겨야겠지.’

레오노라가 자랄 때마다, 이제는 저보다 한 뼘이나 큰 키를 자랑하며 개구지게 웃을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초조해지는지.

레오노라는 제대로 된 인간조차 되지 못한 자신이 주인으로 모시기에도 과분한 사람이었으니까.

소년은 자신이 감춘 감정의 싹이 어떤 돌풍으로 되돌아올지 짐작하지 못한 채 몸을 수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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