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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0화 (188/486)

제200화

베리타스 연성진 공개를 위해 도노반의 원로회가 소집되었다.

도노반은 서쪽의 마녀가 이끄는 가문인 만큼 원로 대부분이 마법사나 술자, 연금술사였다.

귀족가문의 가신보다 학자에 더 가까운 도노반의 원로들은 세계의 진리를 다룬다고 알려진 베리타스 연성진을 열과 성을 다해 지키고 있다고 했다.

‘하긴, 수상한 목적을 가진 사람 손에 들어가면 큰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이 작은 공녀님이 웨스탈과 도노반을 다스리는 이사벨라 님의 은인인 건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도노반이 공녀님에게 은혜를 입었는지는 모르겠군요.”

그래서 나는 나이 지긋한 원로가 나를 힐끔하며 차갑게 고개를 내젓는 것을 이해했다.

‘이해만 하는 거지,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앞으로 나서서 원로들을 설득하려는 내 어깨를 누른 이사벨라가 엄한 눈을 빛내며 입을 연다.

“공녀는 내 딸인 레일라가 글래스턴 백작에게 농락당하는 것을 밝혀 줬다. 그걸로 모자라단 말인가?”

“이사벨라 님, 물론 저희도 레일라 님의 억울함을 밝혀 준 공녀님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원로회의 의장격인 듯한 노인이 이사벨라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을 잇는다.

“하지만 도노반의 가보는 진리를 밝히는 연성진입니다. 어린아이에게 내줬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나는 나를 단순히 어린아이로만 보는 듯한 노인의 말에 높은 의자에 앉는 바람에 대롱대롱 허공에 흔들리고 있는 발을 숨겼다.

‘우씨. 옷도 조금 어른스러운 걸로 입고 올걸.’

티에리가 직접 만들어 준 노란색 드레스는 프릴이나 레이스 따위가 잔뜩 달려 있어 귀엽긴 했지만 차분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럼 단순히 백작의 외도를 밝힌 것만이 아니라면 어떡하실 건가요?”

레일라는 애꿎은 옷만 쥐어뜯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원로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다른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레일라 님?”

“이사벨라 님, 그리고 원로님들. 오전에 말씀드린 대로 저는 이혼 절차를 밟아 도노반의 성을 되찾을 생각이에요.”

“응당한 말씀이십니다. 그런 파렴치한의 아내로 계속 살아가실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 후에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도노반을 다스리기 위해 정식적으로 후계자 교육을 받을 계획이고요.”

레일라의 말에 의장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다행이라는 듯 손뼉까지 치며 기뻐한다.

“그것 참 듣던 중 다행인 말이로군요! 이사벨라 님이 도통 후계를 찾으실 생각이 없어 걱정이었습니다.”

“네. 그런 저를 구제해 줬으니 레오노라 공녀는 도노반의 은인이 아닐까요?”

“헛된 꿈을 꾸지 마십시오, 레일라 님.”

이사벨라의 후계를 정하는 일로 원로회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는 걸 지적한 레일라를 향해 누군가 불쾌한 듯 언성을 높인다.

“레일라 님은 귀가 들리지 않지 않으십니까? 도노반의 원로들은 그런 커다란 결점이 있는 분을 주인으로 모실 수 없습니다.”

원로들이라고 무조건 이사벨라와 레일라에게 충성하진 않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황제 폐하가 장애가 있는 귀족들의 작위를 박탈하고 계시질 않습니까. 도노반은 제국 구석에 있어 아직 그의 손이 닿지 않았을 뿐이니 언제 레일라 님의 신분이 빼앗길지 모릅니다.”

나는 프란츠 황제의 정책을 잘 알고 있는 듯한 원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자네, 말이 심하질 않나.”

“레일라 님은 이사벨라 님의 따님이시네.”

레일라의 편을 드는 원로들이 그에게 한두 마디씩 핀잔을 주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대답했다.

“제 말이 심한 게 아니라 현실이 그렇습니다.”

“경. 이솝 경, 맞나요? 오랜만이네요.”

레일라는 부정적인 말을 쏟아 내는 원로에게 다가서며 나긋하게 웃어 보였다.

“경의 걱정은 이해해요. 하지만 레오노라 공녀가 제 귀를 치료해 줬답니다.”

레일라의 발언에 원로들이 일제히 눈을 홉뜨며 나를 돌아본다.

“어, 어떻게 말입니까?”

“하차니아 공녀가 세기의 천재라더니, 과연!”

‘완전히 치료해 준 건 아닌데.’

나는 원로들의 격한 반응에 머쓱한 뒤통수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자, 쉬이 믿기 어려우실 테니 제가 뒤를 돌게요. 제게 무슨 말이라도 해 보세요.”

레일라의 말에 이솝이라고 불린 원로가 기함하듯 입을 벌린다.

“믿을 수 없습니다! 도노반의 모든 의사가 머리를 맞대고도 고치지 못했던 병인 것을!”

“저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답니다, 이솝 경.”

레일라는 목소리의 주인까지 정확히 짚어 내며 뒤를 돌았다.

‘귀가 완전히 들리는 게 아니라 이솝 경인지는 확실하게 알기 어려웠을 텐데, 대단하네.’

나는 실비가 엘릭서 대신 구해 온 현자의 돌을 이용해 레일라의 귀 구조에 변형을 줬을 뿐, 그녀의 청력을 완전히 돌려주진 못했으니까.

“방금 이솝 경이 말씀하신 거 맞죠?”

그러나 그동안 맥락과 입모양만으로 사람들이 하고 싶어하는 말을 파악한 덕인지 레일라는 능숙하게 목소리의 주인을 짚어 냈다.

“네. 방금 말한 사람은 이솝이 맞습니다. 오래 살다 보니 제 눈으로 기적을 보는군요.”

“허어. 레오노라 공녀님, 도대체 무슨 의술을 사용하신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레일라의 귀가 완전히 치료되었다고 착각한 원로들이 감탄하며 내게 다가온다.

“의술이 아니라 연금술을 사용했어요. 레일라의 귀는 병에 걸린 게 아니라 구조가 망가져 있었으니까요.”

“과연 그 어린 나이에 마탑을 이끄는 현자의 자리에 오른 공녀님다우십니다. 병을 연금술로 고친다는 발상은 여태 그 누구도 하지 못했는데.”

“제가 마법과 연금술을 공부하는 건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예요. 베리타스 연성진으로 못된 짓을 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어요.”

“그렇군요. 얼음탑의 현자가 아티팩트 제작 기술을 공익을 위해 공개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그것 또한 레오노라 공녀님의 뜻이겠지요.”

의장은 내 대답을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해석했는지 순수하게 탄복했다.

‘이런 사람들은 의외로 순진하다니까.’

“그럼 저는 이제 도노반의 귀한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있나요?”

차분하게 두 손을 모은 채 순진하게 두 눈을 깜박이는 나를 힐끗한 의장이 원로들을 향해 턱짓한다.

“……좋습니다. 베리타스 연성진을 내드리죠. 하지만 제가 감히 경고하건대,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무언의 허락이 떨어졌는지 고개를 끄덕인 의장은 내 어깨를 짚으며 노회한 눈을 빛냈다.

“연성진으로 혼과 육체를 다룰 수는 있겠지만,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게 좋으실 겁니다.”

나는 의장의 경고에 침을 꿀꺽 삼킨 후 대답했다.

“네. 저는 죽은 사람을 살리려는 게 아니에요.”

차라리 죽었다면 이렇게 루카스를 되찾는 일에 매달리지도 않았을 터였다.

나는 아직도 내 주변을 맴돌고 있는 루카스의 마나를 느끼며 질끈 눈을 감았다.

‘의식도 없는 주제에 나를 걱정하고 있는 거겠지.’

완전한 안식을 취하지도, 나를 떠나지도 못한 채 서글프게.

* * *

의장이 나를 안내한 곳은 저택의 지하였다.

‘지하라곤 하지만 습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네.’

“시원하네요.”

습기로 뺨이 축축해지긴커녕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까지 느껴져 두 눈을 휘둥그레 뜨자, 의장은 도노반의 장서를 보관하기 위해 마법을 걸어 놨다며 웃었다.

‘유지비가 엄청 들 텐데, 역시 서쪽의 마녀가 다스리는 가문답다고 해야 하나.’

“자, 이게 베리타스 연성진입니다. 천천히 구경하세요.”

의장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위에 선 사람을 압도할 만큼 거대한 연성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알레테이아 교단에서 마나를 이용해 혼을 잡아 두는 방법을 알아냈었지.’

나는 루카스의 마나가 담긴 작은 상자를 끌어안으며 눈을 빛냈다.

‘혼의 기본적인 정보가 담긴 마나는 준비되어 있어.’

하지만 문제는 혼을 담을 그릇인 육체였다.

루카스의 육체는 그의 저주가 풀리면서 먼지가 되어 버렸으니까.

‘그렇다고 아무 몸이나 사용하면 가스파르 때처럼 루카스가 기생하는 꼴이 되어 버릴 거야.’

“후아. 연성진이 복잡해서 분석하는 데 꽤 시간이 걸리겠는데.”

나는 벌써부터 지끈거려 오는 머리를 손끝으로 꾹 누르며 한숨지었다.

베리타스 연성진을 그대로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교단에서 얻은 정보와 추합해야만 아스테르에 속하는 루카스를 온전히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

툭.

수식을 풀기 위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나는 갑자기 번쩍하는 시야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응?”

베리타스 연성진 위로 새하얀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지직. 지지직.

나는 바닥을 태울 것처럼 날뛰는 새하얀 빛에 이를 악물고 연성진을 짚었다.

‘시동인을 그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연성진에서 빛이 나는 거지?’

설마 가방으로 바닥 좀 두드렸다고 발동이 되어 버린 걸까.

우웅- 우우웅-

나는 금방이라도 발동될 것처럼 진동하는 연성진에 양손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자, 잠깐만!”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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