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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5화 (183/486)

제195화

“어머, 공녀님! 괜찮으신가요?”

글래스턴 백작에게 다가가던 내가 연약한 기침을 토해 내자 백작의 옆에 서 있던 나이 지긋한 귀부인이 내 등을 토닥이며 나를 걱정한다.

“감기라도 걸리신 건지, 기침이 심하시네요.”

나를 걱정하는 다른 어른들과 달리 글래스턴 백작은 굳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지금 뭐라고 한 건가, 하차니아 공녀.”

나는 매섭게 눈을 치켜뜬 백작을 마주보며 순진하게 눈을 깜박였다.

“넹?”

“지금 뭐라고 했냐고!”

백작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사람들은 다혈질인 백작이 괜히 어린아이에게 성질을 부린다고 생각한 건지 나를 감싸려고 들었다.

“배, 백작님. 진정하시지요. 공녀님은 몸이 아파 도노반령에서 요양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공녀가 방금 나를 보고 불륜, 따위의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나? 자네도 들었잖아!”

백작이 터뜨리는 노호에 나는 자그마한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댄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요?”

나는 엑스트라 악당의 딸답게 새초롬한 눈꼬리를 자랑하는 어린이였지만, 엄마를 닮아 큼지막한 눈망울이 제법 천진했다.

영문을 모르는 내 얼굴에 제일 먼저 내게 다가왔던 귀부인이 곤란한 듯 백작을 돌아본다.

“잘못 들으셨겠죠, 백작님. 어린 공녀님께서 설마 백작님께 그런 망발을 하셨을 리가요.”

“네, 백작님. 많이 흥분하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책망에 글래스턴 백작은 그제야 보는 눈이 많다는 사실을 자각했는지 크흠, 흠! 헛기침을 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아무튼 이번 사업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했으니 다들 기대하게. 수로의 시작점이 될 부근에 위치한 타운하우스에서 화려한 파티를 열 생각이니까.”

백작이 화제를 돌리자 내게 쏠렸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돌아선다.

“어머. 도노반의 타운하우스 말인가요? 이사벨라 님이 아주 각별하게 아끼는 지인들만 초대한다고 알고 있는데요.”

“이번 사업을 기리기 위해 특별히 빌려주셨네.”

“세상에! 영광이에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백작님!”

나는 날아갈 듯 가벼운 남자의 목소리에 남몰래 인상을 찌푸렸다.

‘어휴. 엄청 딸랑거리네.’

저러다가 첨탑을 장식하는 종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아빠가 너무 아첨만 하는 부관은 곁에 두지 말라고 했는데.’

저런 측근을 곁에 두는 것부터 글래스턴 백작은 가주 실격이었다.

어쨌든 보기 싫은 얼굴을 감내하고 백작에게 접근한 보람은 있었다.

‘타운하우스, 그것도 수로 근처에 있는 파티장에서 파티를 연단 말이지.’

자신이 나락으로 떨어질 무대를 스스로 준비하는 셈이질 않나.

“저도 가도 되나요? 이사벨라 님의 타운하우스라니 너무 궁금해요!”

백작은 눈치 없는 어린아이처럼 불쑥 끼어든 내 말에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어린아이가 드나들 자리가 아니다.”

“하지만 트레시는 참석하잖아요? 저는 트레시의 파트너예요.”

글래스턴 백작이 여는 연회에 장남인 트레시가 참석하지 않을 리 없었다.

파트너 요청은커녕 파티에 대해서도 몰랐을 트레시가 내 물음에 입술을 꾹 깨문다.

“그렇지, 트레시?”

콰직.

“…으윽. 네. 맞아요.”

결국 내가 제 발등을 구두 굽으로 꾹 누르고 나서야 트레시는 내가 자신의 파트너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레오노라 공녀를 제 파트너로 데려갈 생각입니다.”

“쯧쯧. 레미도 그러더니. 여자 보는 눈이 형편없구나, 트레시.”

“아 ,아버지. 그게-!”

트레시가 백작의 짧은 힐난에 움찔하며 입을 벌린다.

“헉!”

그러나 그가 함부로 입을 열기 전에 내가 재빨리 옆구리를 꼬집은 덕에 트레시는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버지인 글래스턴 백작의 말보다 내 주먹이 빨랐으니까.

* * *

이튿날, 나는 도노반령에 도착한 셀리아와 자르파라를 이끌고 이사벨라의 타운하우스를 찾았다.

호수와 맞닿은 타운하우스는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우아한 복층 건물이었는데, 하늘하늘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들판과 무척 잘 어울렸다.

‘이렇게 예쁜 건물을 무너뜨리려니 마음이 아프네.’

하지만 나는 레일라에게 글래스턴 백작에게서 벗어날 기회를 약속했고, 이사벨라도 레일라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타운하우스쯤이야 미련 없이 포기할 인물이었다.

‘게다가 나는 시기만 당길 뿐이니까.’

글래스턴 백작의 사업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되어 있었다.

‘백작의 이름을 어디서 들어 봤나 했는데, 결국 원작에서 본 인물이었지.’

란스 글래스턴.

그는 <아.황.장>에서 대규모 수로 사업을 확장시키다 제국에 대재해를 몰고 오는 인물이었다.

‘원작에서는 아이네스가 무너진 수로로 인해 일어난 재해를 막아 내지만…….’

지금의 아이네스라면 제국 절반이 물에 잠긴다고 해도 나서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면 적당할 것 같아, 셀리아.”

“네! 후우, 오랜만에 삽질하니까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아요.”

나는 청동색 삽을 든 채 활짝 웃는 셀리아를 향해 고개를 갸웃했다.

“응?”

“집시로 떠돌이 생활을 할 때는 종종 땅굴을 팔 일이 있었으니까요. 그때가 생각나네요….”

이 나라에서 집시란 도대체 뭘까.

나는 수리검을 휘날리며 암살자처럼 적들을 없애 나갈 때도 ‘집시라서 익숙하다.’는 말을 하던 셀리아를 떠올리며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빛이시여. 시키신 대로 음성 증폭기를 설치했습니다.”

그런 내 앞에 무릎 꿇은 자르파라가 타운하우스의 설계도를 펼치며 입을 연다.

“빛께서 말씀하신 대로 2층 구조의 저택이더군요. 하지만 백작이 정말 이런 곳에서 내연녀를 만날까 싶습니다. 바로 아래층이 파티장인데.”

“만날 거야.”

나는 자르파라의 말에 단호하게 대답하며 연회장 바로 윗층을 차지하는 거대한 침실을 손으로 짚었다.

“글래스턴 백작은 헬렌과 이 침실을 사용할 수밖에 없어.”

“어떻게 확신하시는 겁니까?”

“막장 드라마를 보면 불륜 남녀들은 꼭 사람 많은 장소를 골라서 만나더라고. 이상한 스릴을 즐기나 봐.”

“막장… 뭐요?”

나는 내 말을 도통 알아듣지 못하는 자르파라의 물음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설사 제 발로 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미끼를 던져 놨으니 걱정 없어.’

함정은 다 팠으니 이제 불을 피워서 헬렌과 글래스턴 백작을 구석으로 모는 일만 남았다.

“……우, 우리 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야!”

그 순간, 삽에 묻은 흙을 호수에 탁탁 터는 셀리아의 뒤쪽에서 놀란 소년이 툭 튀어나온다.

“트레시.”

나는 새하얗게 질린 트레시를 바라보며 시큰둥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타운하우스까지 무슨 일로 왔어?”

파트너로 파티에 데려가 달라고 하긴 했지만, 날 몰래 따라오라고 시킨 적은 없었는데.

내가 눈을 가늘이며 묻자 트레시가 내게 겁을 먹으면서도 사납게 대답한다.

“네가 하차니아의 고용인들과 쑥덕거리는 게 수상했으니까! 아버지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내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나와 자르파라의 대화를 다 들은 모양이었다.

“이런. 곤란하게 됐네.”

내가 난처한 얼굴로 트레시를 가리키자, 자르파라가 그를 돌아보며 살벌하게 눈을 빛낸다.

“목격자를 없앨까요, 빛이시여.”

“아뇨, 아가씨! 제가 깔끔하게 처리할게요.”

‘얘네들은 못 보는 사이에 더 폭력적이 된 것 같아.’

나는 앞다투어 트레시를 처리하려는 자르파라와 셀리아를 만류하며 소년에게 다가섰다.

“히, 히이익! 저리가!”

“내 말만 듣고 네 아버지의 ‘치부’를 짐작한다는 건, 너 설마 글래스턴 백작이 네 어머니를 두고 바람을 피운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그래.”

내 물음에 트레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기가 막혀 짧게 헛웃음을 치며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나는 트레시를 따라잡았다.

“그런데도 백작의 명을 받들며 아버지라고 따르고 있었다고?”

“당연하잖아! 어머니 같은 여자를 아내로 맞았으니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는 건!!”

나는 트레시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외치는 말에 제자리에 우뚝 선 채 입을 벌렸다.

“뭐?”

“성격은 짜증 날 정도로 답답하고, 제대로 꾸밀 줄도 모르고, 귀가 안 들리는 장애까지. 내가 아버지라도 다른 여자를 만나겠어.”

단순히 약자를 짓밟고 괴롭히고 싶어 하는 잔혹성만 빼닮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하지 않고 버티시는 게 대단한 거라고!”

나는 자신이 지껄이는 말에 심취한 듯 당당히 말을 잇는 트레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관자놀이를 눌렀다.

“백작이 레일라 님과 이혼하지 않고 버티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데?”

“그야 아버지가 날 사랑하시니까.”

“……뭐?”

“아버지는 내가 글래스턴 백작위를 물려받을 때까지는 정점에 오르실 계획이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네 엄마인 레일라 님보다 네가 물려받을 재산과 영지가 중요하다는 거야, 너는?”

“귀족가의 장남으로서 당연한 거 아냐?”

자카리가 들으면 기가 막혀서 검을 빼 들 소리에 셀리아와 자르파라가 내 귀를 꼭 틀어막는다.

“그냥 죽이게 해 주십시오, 빛이시여.”

“네. 계속 저런 쓰레기 같은 말을 들으면 아가씨의 고운 귀가 썩을 거예요.”

나도 트레시를 혼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트레시 뒤에 선 인영 덕에 소년의 멱살조차 잡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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