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눈을 뜨자 고요한 한낮의 햇볕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때마침 방에 들어선 룰루가 한 줌의 빛만 비스듬히 들어오던 창가의 커튼을 거둔다.
“아가씨, 점심 드실 시간이에요. 아침은 거르셨어도 점심은 드셔야죠.”
느지막이 일어난 내게 세숫물을 떠 준 룰루는 말썽쟁이라도 보는 듯이 웃으며 내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또 성서를 공부하느라 늦게 주무셨어요?”
“으응. 이제 막 해석이 끝날락 말락 해서.”
나는 룰루의 물음에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가를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레테이아의 성서는 총 3권이었다. 황궁 서고에서 가져온 성서는 1권 분량에 해당하는 의역본이었지만, 나머지 2권은 고대어로 쓰인 원본뿐이라 해석이 필요했다.
“우리 아가씨는 똑똑하기도 하시지! 어떻게 고대어를 해석할 줄 아신데요? 내노라하는 학자들도 못 하는 일인데.”
“……내가 어릴 때부터 남다르긴 했잖아.”
밤새 펼쳐 둔 성서가 협탁 위에 고스란히 속살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한글과 영어, 그리고 윌레닌 제국어가 뒤죽박죽으로 섞인 모양새를 자랑하는 성서를 가리키며 뿌듯하게 웃는 룰루의 얼굴에 나는 조금 민망해져 뺨을 긁었다.
‘사실 제국의 학자들은 한글을 아예 몰라서 해석을 못 하고 있을 뿐일 텐데.’
영어는 먼 외딴 대륙이긴 했지만 브라타니아 공국의 언어와 매우 흡사했으니 번역을 맡을 능력자가 없지 않았지만, 한글은 이 세계에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언어였다.
‘제국어랑 이상하게 엉켜 있어서 한글을 아는 나조차도 해석하는 데 시간이 걸렸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내고 있었겠지.’
나는 벌써 해석이 끝마무리에 접어든 성서의 3권을 쓰다듬었다.
3년.
교단에 입단해 교단원들의 신뢰를 얻고 성서의 해석을 맡은 지도 벌써 올해로 3년의 시간이 흘렀다.
“내일은 아가씨의 생일 연회가 있을 거예요. 작년에 유야무야 넘어가셔서 공작님이 단단히 벼르고 계세요.”
“아빠한테 성대한 파티같은 거 필요없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하지만 아가씨도 곧 데뷔탕트를 치르실 나이니까요. 사교계에 얼굴을 비출 때도 되셨죠.”
우리 아가씨가 벌써 열두 살이라니!
룰루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그녀를 따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내가 벌써 열두 살이라니…….”
원작에서 레오노라 하차니아의 병이 본격적으로 악화되는 시점이 분명 이때쯤이었다.
‘아직 엘릭서를 찾지 못했는데 시간만 흐르고 있으니 큰일이네.’
엘릭서를 찾기 위해 각지로 오빠들과 트리스탄을 보냈지만, 나를 위해 사막과 망망대해를 건넌 그들이 손에 쥐고 돌아온 것들은 엘릭서가 아니었다.
“레오노라, 이게 엘릭서래.”
에녹이 씩씩하게 웃으며 건넨 명약은 공진단,
“네가 필요하다고 했던 엘릭서다.”
실베스테르가 무심하게 건넨 영약은 여신 루엘라의 숨결로 이루어진 성수,
“내가 가져온 게 진짜 같군.”
그리고 트리스탄이 에녹과 실비를 비웃으며 내게 바친 묘약은 연금술사들의 꿈이라는 현자의 돌이었다.
물론 하나같이 천문학적인 값어치를 자랑하는 보물들이었지만, 나는 한눈에 그들이 가져온 게 엘릭서가 아니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원작에서 묘사되었던 엘릭서와 달라도 너무 달랐으니까.
“이중에 분명 엘릭서가 있을 거야. 내가 더 알아볼게!”
나를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웃으며 받아들이긴 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초조함으로 덜컹 가라앉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룰루, 나 혼자 옷 갈아입게 나가 줄 수 있어?”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냐. 오늘은 혼자 입고 싶어.”
내 몸을 남에게 보이는 게 부끄럽다는 듯, 사춘기 소녀를 가장하며 뺨을 붉히자 의아함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던 룰루가 미적미적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선다.
“헉!”
나는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황급히 세숫대야를 붙잡고 메마른 기침을 토해 냈다.
후두둑.
붉은 핏방울이 맑게 참방이던 물 위에 점점이 튄다.
나는 따갑게 아파 오는 목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붉은 파동을 만들어 내는 수면 위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조금 더 뽀족해진 눈초리와 가녀린 턱, 핏기없는 입술 따위가 영락없는 시한부 악녀의 얼굴이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엘릭서를 찾아나선 자카리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다시금 불쑥 고개를 치켜든 불안감을 애써 가라앉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 * *
대충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서자 현관과 이어진 동그란 계단 난간에 옹기종기 모인 소년들이 눈에 들어온다.
백수가 된 에녹과 그런 그를 따라다니는 추종자 한량 무리였다.
“이제 일어났나 보네.”
나를 발견하고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드는 에녹을 향해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우리 막내가 백수라니…….’
엘릭서라고 믿는 보물들을 찾아 돌아온 후 자신의 기사단을 꾸리기 위해 훈련에 돌입한 실비나 공작위를 지키고 있는 트리스탄과 달리, 삼남인 에녹은 아직까지 노는 중이었다.
“잘 잤어, 내 동생?”
달콤한 목소리가 에녹의 화사한 외모와 무척 잘 어울렸지만, 최근에 그가 술집에 드나들며 문란한 생활을 즐긴다는 소식을 접한 나는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원작에서도 게으른 면모가 없지 않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망나니 공자처럼 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나는 자세까지 껄렁해져선 짝다리를 짚은 채 주머니에 손까지 넣은 에녹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에녹은?”
“나? 나야 이제 자야지……. 하암.”
내 물음에 에녹이 옅은 술 냄새를 풍기며 하품이 나오는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는다.
“그래. 잘자.”
나는 그런 그의 행동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별말 없이 계단에 올라섰다.
‘더 보고 있다가는 또 화를 내게 될 거야.’
엘릭서를 찾아 떠났던 에녹이 날라리가 돼서 돌아온 후, 나름대로 잔소리도 해 보고 윽박도 질러 보았지만 에녹은 변하지 않았다.
속상한 마음을 감추며 에녹을 스쳐 지나가려고 몸을 트는데, 에녹의 옆에서 나를 힐끔거리던 소년이 툭 튀어나와 내 앞을 가로막는다.
“좋은 아침입니다, 영애.”
‘글래스턴 백작가의 영식이었나.’
나는 언뜻 티파티나 다른 영애의 데뷔탕트에서 봤던 것같은 흐릿한 인상의 소년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글래스턴 공자님.”
그를 알은 체하자 소년이 매우 놀랍다는 듯 휘둥그레 눈을 뜬 채 귓볼까지 붉힌다.
“……저를 아시는 겁니까?”
“로렐라인의 데뷔탕트 때 대화를 나눴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소년이 살짝 귀찮아진 내가 뚱하게 대답하든 말든, 소년은 혼자 흥분해 제 입을 틀어막았다.
“영광입니다. 영애께서 저를 기억해 주신다니……. 에녹의 말처럼 제가 영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나 봅니다.”
“호, 혹시 그렇다면 저도 기억하시나요? 저번에 공녀님께서 여신 티파티에 제 누이의 파트너로 참석했었는데요.”
‘아니, 나는 기본적으로 잘생긴 애들만 기억하는데요.’
무슨 가능성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옆에 줄줄이 사탕처럼 선 채 내가 자신들의 이름도 기억해 주길 바란다는 듯 눈을 빛내는 소년들이 부담스러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영애, 혹시 오늘 시간이 되신다면 저와 점심이라도…… 헉!”
그런 나와 더 대화를 나누고 싶기라도 한 건지 소년이 내게 다가왔으나, 몸이 기우뚱한다 싶더니 이내 뒤로 고꾸라진다.
쿵!
“글래스턴, 너는 이제 내가 우습나 봐.”
나는 꽤나 턱이 높은 계단 위에서 현관까지 굴러떨어진 소년과 그런 그의 배에 발을 올린 채 껄렁하게 웃고 있는 에녹을 번갈아 바라보다 기함했다.
“에녹! 이게 무슨 짓이야!”
집에서 무슨 행패인가 싶어 목소리를 높이는데, 에녹은 어깨를 으쓱한 후 소년의 멱살을 움켜쥘 뿐이었다.
“지금 어디 가려고?”
“나갔다 올게. 친구랑 할 얘기가 있어서.”
“얘기하려는 거 아니잖아. 글래스턴 공자나 내려놓고 그런 거짓말을 해.”
내 말에 피식 웃은 에녹은 새하얗게 질린 소년을 향해 비뚜름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야. 너랑 나, 얘기하려고 나가는 거 아니었어?”
“…….”
“대답하는 게 좋을 텐데.”
“마, 맞지. 정말 얘기나 나누려고 나가는 겁니다, 공녀님.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나는 에녹이 얼마나 무서우면 덜덜 떨면서 내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소년의 말에 지끈지끈 아파 오는 머리를 짚었다.
‘도대체 요즘 왜 저러는 거야? 사춘기라도 정면으로 맞은 건가?’
이건 비뚤어지다 못해 거의 뒷골목 깡패와 다름없지 않나.
에녹의 안하무인 태도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은 나는 소년을 끌고 나가려는 그를 말리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내가 막 층계를 내려오려던 순간이었다.
삐이. 삐이이.
한쪽 귀에 쨍하게 울려 퍼지는 이명과 함께,
“아가씨-!!!”
빛이 명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