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82화 (172/486)

제182화

서른세 번.

아이네스가 같은 삶을 반복한 횟수였다.

그녀는 꼬박 서른두 번을,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죽었고 제 친부인 그레고르가 원인이었던 적도 없지 않았다.

‘저번 삶에서 아빠가 날 왜 죽였더라?’

수풀에 숨은 그레고르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절벽으로 질질 끄는 동안 아이네스는 마구잡이로 뒤섞인 과거를 헤집느라 생각에 잠겼다.

“아.”

기억났다.

그레고르는 저번 생에서 아이네스가 세상을 눈에 담기도 전에 제 딸을 죽였었다.

‘해적놈들이 보낸 상자를 열어 보지 않아서였지, 아마.’

숨이 막혀 오던 끈질긴 고통을 기억했다.

살고 싶어 아득바득 우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 없을 텐데도, 그레고르는 노엘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충격에 잠겨 아이네스를 외면했었다.

‘또 언젠가는, 교단에서 황좌나 내 목숨 둘 중 하나는 내놓으라 요구했을 때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듯 바로 나를 희생시켰었지.’

그때의 그레고르는 지금과 달리 황위를 퍽 아꼈었다.

반복되는 삶 속에서 그레고르에게는 늘 아이네스보다 우선할 무언가가 존재했다.

그레고르는 아이네스를 그럭저럭 사랑해 주었지만, 그의 사랑은 언제나 딱 거기까지였다.

“그러니까 내 애정도 여기까지예요, 아빠.”

제 옆구리에도 오지 않을 만큼 작은 아이네스가 거대한 장정인 자신을 완력으로 제압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그레고르는 홉뜬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쓸모없어진 아빠를 살려 둘 정도의 인내심은 없어요.”

그레고르가 자신을 죽인 기억이 없다고 해서, 아이네스가 제 아버지의 손에 죽었던 과거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위험한 장난치지 말거라, 아이네스.”

절벽 끝에 몰린 주제에 그레고르는 아직도 제 작은 딸이 장난을 친다는 양 피식 웃으며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해할 리 없다는 믿음이 만연한 여유로운 얼굴에 아이네스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나를 버릴 거면서.’

그레고르에게 소중한 사람은 사라진 공작 부인, 노엘 단 한 사람이었다.

“미안하지만 아이네스는 장난 같은 거 안 쳐.”

아이네스는 그레고르의 손안에서 바스락 부서지는 바위 조각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다 발을 들었다.

콰직.

예쁜 리본이 달린 빨간색 에나멜 구두가 그레고르의 손가락을 짓눌렀다.

* * *

그레고르의 몸이 허망하게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형형한 안광을 띤 아이네스의 녹안이 수풀 사이에 숨은 나를 발견했다는 듯 뱀처럼 가늘어진다.

‘도망쳐야 해.’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나는 서둘러 뒤를 돌아 허겁지겁 숲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정신없이 내달리던 내가 멈춰선 곳은 가스파르의 검은 말이 묶여 있는 공터였다.

“…아빠!”

아빠, 아빠!

“리니?”

사냥을 잠시 쉬고 있었는지 귀족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던 그가 정신없이 자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 고개를 든다.

“무슨 일이냐.”

가스파르는 자신에게 와락 안겨 든 내 등을 토닥이며 다른 손을 검 손잡이에 가져다 댔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어른들이 눈물로 얼룩진 내 얼굴에 당황하며 다가온다.

“공녀님, 무슨 일이십니까?”

“어디서 마물이라도 마주치신 거 아닌가요? 세상에, 이 식은땀 좀 봐.”

“그게, 지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내가 방금 목격한 상황에 대해 입을 열려는 찰나, 나뭇잎을 짓밟는 바스락 소리와 함께 내가 방금까지 죽도록 도망쳐 온 인영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레오노라, 여기 있었네?”

아이네스였다.

“나랑 숨바꼭질을 하던 중이었잖아. 이번에는 레오노라 차례였는데, 이렇게 도망가 버리면 어떡해.”

아이네스의 천진한 얼굴에 나를 달래 주려고 다가왔던 어른들이 하나둘 뒤로 물러난다. 아이들 장난에 내가 지레 놀랐다고 짐작한 모양이었다.

“괜찮은 건가.”

나를 꼭 끌어안은 채 다가오는 아이네스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오직 가스파르뿐이었다.

‘하지만 아빠까지 말려들게 할 수는 없어.’

여자주인공이 미쳤다 싶었지만, 설마 제 아버지까지 죽일 수 있는 인면수심일 줄은 몰랐다.

그런 아이네스가 순진한 아빠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할까 두려웠던 나는 서둘러 가스파르의 얼굴을 숨기듯 껴안은 채 속삭였다.

“…괜찮아요.”

“리니.”

“아빠, 나 괜찮으니까 내려 줘요.”

침을 꿀꺽 삼킨 나는 내게 방긋 웃으며 다가오는 아이네스에게 인사하기 위해 땅에 착지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아이가 연한 녹색 눈을 빛내며 내 손을 붙잡는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속삭이는 목소리가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섞여들어 기묘하게 울려 퍼진다.

“그런데 아이네스가 노래를 다 부르기도 전에 잡아 버리고 말았네?”

히죽히죽 웃어 대는 아이네스는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에게 얌전히 두 손이 붙들린 채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러네요. 전하가 이기신다면 제가 전하의 비밀을 지켜 드리기로 했었죠.”

아이네스가 그레고르를 죽였다는 사실을 함구하겠다는 말이었다.

내 말뜻을 알아들은 아이네스의 얼굴이 모호하게 일그러진다.

“…내 비밀?”

짓씹은 입술까지 초조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아무리 아이네스라도 제 생부인 그레고르를 죽인 여파가 남아 있는 거야.’

나는 불안에 떠는 아이네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녀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전하께서 저를 찾으셨으니, 저는 아무것도 보지 않은 걸로 할게요.”

“어째서?”

아이네스의 눈에 깃든 의구심에 나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그녀가 가장 나를 의심하지 않을 말을 골랐다.

“알레테이아의 태양이신 아이네스 황녀 전하야말로 제국을 빛낼 진정한 태양이시니까요.”

“…헬리오스인 나를 다음 대 황제로 인정한다는 뜻이야?”

나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이는 아이네스를 마주한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작 책을 통해 엿본 아이네스는 늘 인정 욕구에 시달리는 아이였다.

“황제 폐하께서 세상에 다시없을 파렴치한인 데다 폭군이라는 걸 모르는 제국민이 있을까요.”

나는 그레고르를 험담하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열기를 띠는 아이네스의 얼굴을 살피며 입술을 움직였다.

“아직 어리시지만, 알레테이아 님도 인정한 아이네스 황녀 전하가 제국을 이끄는 게 바람직하죠.”

“설마 섭정도 나를 위해 세우려고 했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요? 율리아 황비 전하와 만남을 지속했던 것도 다 황제 폐하를 제위에서 끌어내리기 위함이었는걸요.”

물론 아이네스를 위해 움직인 건 아니었지만.

반쯤 거짓말이 섞인 내 말에 아이네스는 약간의 호기심은 느끼는 듯싶었지만, 완전히 믿는 얼굴은 전혀 아니었다.

나는 별수 없이 주머니를 뒤적여 백합 한 송이가 새겨진 검회색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알레테이아의 성서잖아.”

그렇게나 아이네스의 배동으로 선발되기 위해 노력을 쏟은 결과물이었다. 황궁 서고에서 발굴한 책을 알아본 아이네스가 작은 신음을 흘리며 손을 뻗는다.

“아아, 알레테이아 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걸 보니 진짜 성서야. 이 책을 도대체 어디서 찾은 거지?”

“황궁 서고에서요. 멋대로 가지고 나온 건 죄송해요.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성서에 완전히 매료된 사람처럼 몽롱한 얼굴을 꾸며내며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듯 책을 꼭 끌어안았다.

“세이렌이 부르는 노래처럼 달콤하고 햇살처럼 상냥한 말만 가득한 책인걸요.”

“알레테이아 님은 아무나 사랑하지 않으셔. 오직 선택받은 자만이 성서를 발견하고, 교리에 눈을 뜨고, 자애로운 알레테이아를 섬기며 영생을 누릴 수 있지.”

아이네스는 유달리 ‘선택받은’, ‘특별한’ 따위의 수식어를 좋아하는 듯싶었다. 나는 그녀에게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저는 성서를 통해 제 의미를 찾을 수 있었어요.”

교단은 분명 나를 ‘아스테르’라고 불렀다.

‘그들이 나를 이용하고 싶어하든 희생양으로 삼아 제물로 바치고 싶어하든 내 존재가 교단에 특정한 의미가 있다는 뜻일 테지.’

“드디어 아스테르의 의지를 각성한 거로구나.”

내 말에 아이네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환히 웃으며 두 팔을 뻗어 나를 안았다. 나는 그녀가 말하는 ‘의지’가 무엇인지, 성서에 언급된 부분은 있었는지 떠올리며 잠자코 안겨 있었다.

“더는 반쪽짜리 아스테르가 아닌 거야.”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은 아이네스가 드디어,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며 흥분한 숨을 씨근거린다.

“마침내 네가 아스테르로 완성된 거야, 레오노라.”

아이네스의 양 뺨은 사랑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사과같이 물든 채였다.

“이제 끝낼 수 있어. 에티모스가 돌아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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