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아침 해가 밝자마자 종종걸음으로 내달린 나는 이른 아침부터 불이 켜져 있는 가스파르의 집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아빠.”
내 부름에 비스듬히 고개를 든 가스파르가 내게 두 팔을 벌린다.
“몸은. 잠은 잘 잤고.”
“괜찮아요. 푹 자진 않았는데, 그래도 아예 못 자진 않았어.”
자연스레 그의 품에 안긴 나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그의 가슴에 부비적 부비적 뺨을 묻었다.
“…아빠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겼어요.”
율리아까지 아이네스에게 당하고 말았다.
‘시간이 없어.’
회귀를 반복해 미쳐 버린 건지, 원래부터 미쳐 있던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 여자주인공의 폭주를 막으려면 그녀가 휘두르는 권력의 원천인 그레고르를 제거하는 수밖에 없었다.
‘섭정을 세워서 아이네스의 팔다리를 끊어 내야 해.’
“아니, 모두의 도움이 필요한 일일 수도 있어요.”
나는 늘 아이인 내 말에도 진중하게 귀를 기울이는 가스파르에게 황녀인 아이네스의 정체와 루카스에게 저주를 건 사람이 그레고르라는 사실을 짧게 설명했다.
물론 내가 빙의자라거나 아이네스가 회귀자라는, 그가 크게 충격을 받을 만한 사실은 빼고.
“그래. 루카스 선황자에게 들은 이야기와 다르지 않구나.”
‘이미 말해뒀구나.’
나는 크게 놀라지 않는 가스파르의 차분한 반응에 고개를 까딱인 후 침을 삼켰다.
“…내 욕심인 거 알아요.”
노엘을 되찾겠다는 것도, 루카스의 소멸을 막겠다는 것도 순전히 내 욕심일지 모른다.
‘하찮은 엑스트라 가문을 일으켜 세워 주인공인 아이네스에게 대항하겠다는 것도 어쩌면 너무 과분한 소망이겠지.’
하지만 나는 겨우 생긴 내 가족들을 절대로 잃고 싶지 않았고, 아이네스 같은 아이가 세상을 지배하게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모두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인데, 내 욕심만 부려서 미안해.”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 목소리가 젖어들어 간다. 나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눈을 가스파르의 가슴에 콩 박으며 울음을 억눌렀다.
“하지만, 하지만 한 번만 도와주면 좋-”
“레오노라.”
내 말을 끊으며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내 등을 다정하게 도닥이는 가스파르의 것이 아니었다.
“…자카리 오라버니.”
나는 언제 집무실에 들어왔는지 모를 삼형제를 돌아보며 한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잘 왔어요. 오라버니랑 실비, 에녹한테도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하지 마.”
나는 느릿느릿하지만 그럼에도 단호한 자카리의 말에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역시 자카리는 쉽게 나서 주려고 하지 않을 줄 알았어.’
네가 괜히 서브남주였겠냐며 서운한 마음이 목 끝까지 차오를 무렵,
“울지 마.”
내 머리에 커다란 손을 올린 자카리가 동물이라도 쓰다듬듯 스윽 스윽 나를 쓰다듬는다.
“네?”
“백 번… 천 번….”
나는 이제 말하는 게 귀찮은지 눈을 반쯤 감은 자카리를 올려다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도와줄 수 있으니까 울지 말라고요?”
그의 졸린 고개가 내 물음에 미적미적 움직인다.
“응. 안 울게요.”
“그래, 울지 마.”
위아래로 흔들리는 그의 고갯짓에 슬며시 미소짓는 나를 아빠 품에서 빼낸 에녹이 투덜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네가 왜 우리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
나를 인형처럼 꼬옥 껴안은 에녹이 곧 나를 들어올리며 내 콧잔등을 제 것과 맞부딪히며 핀잔을 준다.
“말 한마디면 되는데.”
“나는 말 한마디도 필요 없다.”
나는 에녹에게서 나를 빼 오고 싶은 듯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뻗는 실비의 말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형! 나도 필요 없어!”
“아니, 너는 한마디가 필요하다고 했다.”
“리니, 나는 너를 위해 죽을 수도 있어.”
“나도.”
나는 아웅다웅하는 형제들의 말다툼을 지켜보다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 하지 마.”
내 목소리가 가라앉았다는 걸 느꼈는지 에녹과 실비가 내 눈치를 찔끔 보며 다가온다.
“나 때문에 죽기는 왜 죽어. 절대 죽지 마.”
나는 그런 차남과 삼남에게 눈을 흘기다 가스파르의 책상 위에 올려 둔 서류를 펼쳐 보였다.
“모두 다 함께 살고 싶어서 세운 계획이니까, 죽을 생각하지 말고 잘 들어.”
* * *
가스파르는 내가 부탁한 대로 5대 귀족 가문의 가주 권한으로 귀족원 대회의를 열어 주었다.
귀족원의 대회의는 북부와 남부, 그리고 동부와 서부에 봉토를 지닌 귀족이라면 누구나 참석하는 만큼 규모가 대단했고, 대회의에서 결론 난 안건들은 대부분 빠르게 실현되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5대 귀족 가문의 의견이겠지.’
나는 회의 참가자 목록을 한눈으로 훑으며 초조하게 손가락으로 원탁을 두드렸다.
5대 귀족 가문의 한 축이었던 브리넨 후작가가 멸문했으므로 남은 5대 귀족은 하차니아 공작가, 솔로아 공작가, 아르델 백작가와 발탄 자작가였다.
‘아르델 백작은 하차니아의 손을 들어 줄 거야.’
그리고 발탄 자작은 아무래도 중립을 지키려고 들 터였다.
‘중요한 건 솔로아인데….’
이아론 후작과 손을 잡고 구휼원의 아이들을 착취하던 솔로아 공작이 하차니아의 편을 들어줄 리 없었다. 그레고르의 제위로 착복한 재산이 어마어마한 그는 이아론 후작과 마찬가지로 그레고르에게 붙어 버렸으니까.
‘그렇다면 역시 발탄 자작을 설득해야 할까.’
고민하는 내 앞에 누군가가 시원해 보이는 유리잔에 담긴 레모네이드를 내려놓는다.
“공녀님도 회의에 참석하셨군요.”
나는 고개를 들어 내게 말을 건 여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아르델 백작님.”
“오늘 회의 안건이 상당히 길더군요.”
‘그만큼 설득할 귀족도 많다는 뜻이지.’
나는 다정한 그의 미소에 고개를 끄덕이다 참을 수 없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효효. 그러게요.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나 봐요.”
무릎을 통통 두드리며 하는 말에 백작의 표정이 묘해진다.
“…네에, 그렇지요. 세상에는 쉬운 일이 없는 법이죠.”
어쩐지 웃음을 참는 듯 보이는 백작의 얼굴을 힐끔하는데 원탁의 상석에 앉은 가스파르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솔로아 공작을 제외하면 참석 의사를 보내온 분들은 모두 모인 것 같으니 먼저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의견에 반대할 솔로아 공작은 아예 빼버리고 시작하겠다는 거네.’
나이스 아빠!
“긴급 대회의를 소집하면서 각자의 영지로 보낸 서류를 통해 회의 안건은 미리 받아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공작가에서 준비한 서류는 그레고르의 비리와 그가 저지른 굵직굵직한 범죄들을 자극적으로 나열한 것이었다.
‘서류 준비를 일간특급의 기자에게 맡길 생각을 하다니….’
요즘 가스파르가 살짝 비열해진 것 같은 건 내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매끄럽게 회의를 진행하기 시작한 가스파르를 쳐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각하의 뜻에 아예 반대하는 사람은 얼굴도 비추지 않았을 겁니다. 서류에 언급하신 대로 지금 폐하의 통치는 가히 폭정이라고 부를 만하니까요.”
“아녀자 희롱에 납치, 감금도 서슴지 않는 황제라니 국격이 땅에 떨어지고도 남을 일이지요.”
가스파르가 준비한 서류를 다들 읽어봤는지 개탄스럽다는 듯 여기저기에서 한숨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이미 다수의 민족이 어우러져 살고 있는 제국에서 소수민족을 말살하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폐하의 잔혹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던 사건도 다수 있었지요.”
‘제 기분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툭하면 마을 하나를 불태우거나 아예 밀어 버렸으니까.’
“공녀님은 집중하실 때 미간을 모으시는군요.”
“…네. 백작님. 그런 습관이 있나 봐요.”
누군가의 말에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옆에 앉은 아르델 백작이 웃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아까부터 내가 주먹을 쥐거나 미간만 모으면 웃고 난리야.’
“그뿐만 아닙니다. 겨우 황비 둘에 황녀 한 분이 계실 뿐인데 황가의 사치가 극에 달해 제국이 재정난을 앓고 있지 않습니까?”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는 수준의 징세라 작은 영지들은 벌써 파산에 이르렀습니다.”
내가 기분이 상하든 말든, 불만이 쌓여있었던 듯한 귀족들의 의견이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다만 중요한 건 어떻게 반정에 성공하느냐겠군요.”
“서부… 가장 많은 군사력을 소유한 서부가 이 안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관건이겠습니다.”
결국 다들 솔로아의 뜻이 중요하다는 걸로 의견이 귀결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솔로아 공작은 그레고르가 제위에 앉은 덕에 꽤 많은 걸 누리고 있을 텐데….’
참석하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서류를 보고 이번 회의에 불참한 게 틀림없었다.
솔로아 공작을 위해 마련된 빈자리에 내 걱정스러운 시선이 닿는 순간, 대회의실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