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71화 (164/486)

제171화

“지금 그게 무슨….”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고, 잡히지 않는 루카스를 애써 붙들기 위해 손을 뻗은 내가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짠 순간이었다.

“아가씨!”

언덕을 구르듯 달려온 셀리아가 멍한 얼굴의 나를 붙든다.

“아가씨, 혼자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지금 큰일 났어요!”

“…혼자라니?”

셀리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루카스의 존재를 확인했다.

여전히 흐릿하지만, 그는 아직 이곳에 존재했다.

“셀리아, 지금 이 사람 설마 안 보여?”

“장난칠 시간 없어요, 아가씨! 계획이 틀어졌다고요!”

하지만 희미한 루카스의 인영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린 셀리아가 다급하게 말을 잇는다.

“레이첼이라는 아이가 진범으로 밝혀졌대요!”

“…뭐?”

아무런 증거도 없이 내가 마신 독과는 손톱만큼의 관련도 없는 아이를 어떻게 범인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 * *

잘근잘근 엄지손가락만 깨물던 율리아는 지하 감옥에 구금된 레이첼을 떠올리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레이첼이야 버리는 패로 써도 괜찮지만, 노엘은 상황이 조금 다른데….’

독으로 공녀를 해하고 싶었으면 공녀만 해했으면 될 것을, 아이네스는 괜히 노엘까지 건드려 일을 크게 만들고 말았다.

‘레이첼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노엘이 깨어나면 동생의 무죄를 밝히겠다고 성가시게 굴게 뻔해.’

후환을 없애기 위해 아예 죽여 버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노엘은 교단에서 지부장을 맡은 인물 중에서도 꽤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뮤리엘이, 무려 샤프론을 맡겠다고 나설 만큼 주목받는 인재였다.

‘퀴리오스 님은 노엘을 아이네스의 푸른 독수리로 흡수해 교단에서 무기로 사용할 생각이었을 텐데….’

말은 아이네스를 위해 금술진을 완성했다고 했지만, 교단은 결코 개인을 위해 어려운 연구에 손을 댈 만큼 녹록한 곳이 아니었다.

“교단에서 이번 일을 탐탁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전하.”

아이네스는 교단이 수호하는 태양, 헬리오스의 칭호를 받은 현자였으므로 작금의 사태에 대해 별 징계 없이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율리아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내가 어떻게 지부장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해서 율리아는 결국 자신과 상의도 없이 일을 벌인 아이네스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왜?”

예쁘게 양갈래로 땋은 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매만지던 아이네스가 율리아의 말에 비스듬히 고개를 꺾는다.

“그야 노엘이란 아이는 교단에서도 무기화시키기 위해 특별히 공을 들인 아이니까요. 퀴리오스 님이 금지된 마법까지 감행하며 손에 넣으셨다고 했잖아요.”

율리아가 울먹이며 하는 설명에도 아이네스는 동그랗게 눈을 뜬 채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래? 그렇구나.”

슥슥, 예쁘게 다듬은 손톱 위에 진주 가루를 뿌려 얹은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율리아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선다.

흠칫.

“그런데 아이네스 보고 뭐 어떡하라고?”

저도 모르게 아이네스를 피해 뒤로 물러난 율리아는 아이의 추궁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네?”

“아이네스가 왜 퀴리오스의 눈치를 봐야 하는데?”

율리아는 아이네스의 말에 조금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선구자인 에티모스가 부재한 이 상황에, 퀴리오스는 교단의 일인자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퀴리오스 님은 알레테이아가 선구자를 잃은 지금 교주나 마찬가지라는 걸 아시잖아요.”

그리고 그 누구보다 에티모스의 부활에 힘을 쓰는 열혈 신도였다.

에티모스가 부활하는 날 비로소 자신들이 구원받으며 영생을 얻는다고 믿는 교단원들에게 퀴리오스는 그들의 길을 비춰 주는 인도자나 다름없었다.

“그래, 퀴리오스는 교단에서 중요한 인물이지. 하지만 아이네스는?”

아이네스는 퀴리오스처럼 헬리오스(태양)의 칭호를 받았을 뿐, 사실 현자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엔 부족한 면이 적지 않았다.

아이네스는 딱히 교단을 위해 이바지한 바가 없었으니까.

“화, 황녀 전하께서는….”

율리아가 말을 더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이죽이던 아이네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신다.

“아이네스는 헬리오스야. 퀴리오스만큼이나 교단에서 의미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잊었어?”

짜악-!

아이의 작지만 매서운 손이 율리아의 뺨을 강타했다.

“건방진 율리아.”

아이네스는 씩씩거리며 감히 자신과 퀴리오스를 비교한 율리아를 노려보았다.

“설사 퀴리오스가 교단 내에서는 아이네스보다 중요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네게는 아니어야지.”

“…….”

“아이네스는 아빠를 설득해 어떤 남자에게도 팔려 가지 못하고 매대 위에서 천천히 썩어 가는 과일 같던 너를 제국의 비(妃)로 앉혔어.”

율리아는 한 제국의 황비 자리를 과일 가게 매대 따위와 비교하는 아이네스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대꾸를 잘못했다간 더 패악을 부릴 거야.’

율리아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고 싶지 않은 듯, 콧잔등을 찡그린 아이네스가 그녀의 이마를 툭툭 밀며 말을 잇는다.

“그럼 고마운 줄 알아야 할 거 아냐?”

“예, 예….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전하.”

흥.

율리아의 말에 가볍게 콧방귀를 뀐 아이네스는 거드름을 피우며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공작가에서 이번 일을 빌미로 감히 아이네스를 추궁하려고 들지도 몰라. 잘 수습해.”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감히 황녀이자 교단의 태양인 자신에게 덤비려고 난리들이다.

“…못 하면, 알지?”

까드득.

아이네스가 탁자의 유리를 손톱 끝으로 긁으며 묻는 말에 율리아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칼리시만에 머물 때가 나았어.’

집착적인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기회라고 생각해 잡은 손이 되레 그녀를 옥죄고 있었다.

“네, 황녀 전하. 레이첼이라는 아이를 범인으로 지목할 생각인데 괜찮으시겠죠?”

“으응, 그런 건 네가 알아서 하고. 이만 나가 봐.”

아이네스의 축객령에 방을 벗어난 율리아는 자신이 떠난 칼리시만을 떠올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쿵!

앞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걷고 있던 그녀는 곧 단단하고 강직한 어깨에 이마를 박고 뒤로 휘청하고 말았다.

“아!”

명백한 자신의 잘못이었지만, 신경질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율리아를 향해 누군가가 정중히 손을 뻗는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십니까?”

바닥에 주저앉은 율리아는 묻는 이의 말에 대답해 주는 대신 스르르 내려와 제 얼굴을 가리는 머리칼을 정돈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러자 대답이 없는 율리아가 크게 다치기라도 했다고 오해했는지 허리를 숙인 남자가 그녀의 다리 쪽에 손을 뻗는다.

“어딜 감히 본비의 몸에 손을 대는가!”

화들짝 놀란 율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이내 제 몸을 꼼꼼히 살피는, 밤의 장막을 담은 듯 어두운 눈을 발견하고 말았다.

“…공작?”

가스파르 하차니아였다.

먼발치에서 봤을 때도 미남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가까이에서 목도한 가스파르는 영준함이 그레고르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예, 황비 전하.”

“그, 그만 됐네. 그대가 본비의 몸을 살필 필요는 없어.”

율리아는 붉어진 제 뺨을 감출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발목을 접질리신 것 같으니 의사에게 보여 주는 게 낫겠습니다.”

그런 율리아를 깃털 들듯 가볍게 부축해 세운 가스파르는 침잠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딸아이 걱정에 한눈을 파느라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돼, 됐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스파르의 말에 침을 꿀꺽 삼킨 율리아는 정중히 사과한 후 돌아서는 그를 붙잡지는 못했다.

그림자를 다루는 기사라더니, 일반인의 것보다 조금 더 짙은 그의 그림자가 화려한 황궁에 멍울처럼 남았다가 사라진다.

‘그림자도 잘생겼네….’

율리아는 불쑥 떠오르는 제 생각을 모르는 체하며 재빨리 복도를 벗어났다.

* * *

셀리아의 말에 허둥지둥 황궁에 당도한 나는 궁인들에게 뒷돈을 쥐여 주고 지하 감옥에 들어설 수 있었다.

“난 아니에요…!”

억울한 울음소리가 복도를 가득 메울 듯 울려 퍼진다.

“난 진짜 아니에요, 흐엉엉!”

어린아이의 호소는 들어 줄 필요도 없다는 듯 간수들은 제각기 귀를 틀어막고 우는 아이를 모르는 척할 뿐이다.

“노엘 님, 노엘 님은 내 말 믿어 줄 텐데!!”

아직 고신은 당하지 않았는지 기운이 남아 있는 레이첼은 엉엉 우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노엘을 찾고 있었다.

“노엘 님 어디 갔어…! 노엘, 노엘을 데려와 줘요!”

“제 자매에게도 독을 먹인 몹쓸 계집애가 울음소리만 크군!”

“안 먹였어, 안 먹였다고…!”

그제야 노엘도 독을 먹고 쓰러졌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는지, 레이첼은 간수의 말에 닭똥 같은 눈물을 후두둑 흩뿌리며 땅을 쳤다.

“이, 이게 다 교단 때문이야!”

‘딱히 내가 구슬리지 않아도 벌써부터 교단을 원망하고 있었네.’

잘됐다.

나는 생긋 웃으며 레이첼에게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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