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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화 (162/486)

제168화

노엘 이아론은 달콤한 외모와 달리 거절에 망설임이 없는 여자였다.

“미안해, 그레고르.”

말로는 미안하다면서 딱히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잘 단정된 제 손톱만 내려다보던 노엘은 시큰둥하게 그레고르의 청혼을 거절했었다.

“나는 미래를 꿈꾸는 정혼자가 있어. 그리고 네게는 이네스가 있지.”

이네스.

그레고르는 노엘의 입에서 나온 제 약혼자의 이름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날카로운 미간이 일그러지는 것을 뚱하니 바라보던 노엘이 경고하듯 말을 덧붙인다.

“이네스에게 충실해, 그레고르.”

이네스는 노엘이 아끼는 몇 안 되는 친우 중 한 명이었다.

성인이 된 지 오래인데도 아직까지 파스텔톤의 레이스 원피스를 즐겨 입는 하늘하늘한 여자를 떠올린 그레고르가 이를 부득 간다.

그가 이네스를 제 약혼 상대로 정한 이유는 단 하나, 아니, 단 한 명이었으니까.

“…난 황제가 될 사람인데도.”

그레고르가 잔혹하게 제 형제들을 모두 쳐내고 황위를 거머쥘 수 있었던 이유도 단 한 명이었다.

“내가 남편을 고르는 기준에 신분이나 작위는 없어.”

그러나 그 이유가 된 여자는 그레고르의 번들거리는 욕망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 깨끗한 얼굴을 저을 뿐이다.

“네가 윌레닌이 아니라 대륙을 재패한다고 해도 내가 널 남편으로 고르는 일은 없을 거야.”

“왜지?”

왜, 내가 아니라 껍데기만 번지르르할 뿐인 공작을 고른 거지.

그레고르의 물음이 제 정혼자를 상기시키기라도 했다는 듯 노엘은 설레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는 호화롭게 사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내가 원하는 건 자유야.”

“…….”

“그리고 공작은 내 선택을, 내 자유를 존중할 만한 사람이고.”

“헛소리.”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레고르는 텅 빈 술잔을 탁자에 거칠게 내려놓으며 이죽였다.

‘그렇게 자유를 갈망하더니 결국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지.’

노엘 이아론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에 다급하게 그녀를 찾아 나선 건 하차니아 공작가만이 아니었다.

제국의 유일한 제독이라는 이유를 핑계 삼아 그레고르는 황실 소유의 함대까지 풀어 노엘을 찾았다.

‘하지만 찾지 못했지.’

손아귀에 잡힐 듯 잡히지 않던 그녀를 떠올리며 쿵! 탁자를 발로 걷어찬 그레고르는 신경질적으로 침실에 걸린 이네스 황후의 초상화를 노려보았다.

‘이네스만 처리할 생각이었다. 설마 노엘까지 휩쓸릴 줄은 몰랐어.’

결국 돌아온 건 노엘도, 이네스 황후도 아니었다.

“아빠!”

그레고르는 황제의 침실 문을 겁 없이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오는 아이를 돌아보며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아이네스로구나. 늦은 밤에 무슨 일이냐.”

“아이네스, 배동으로 삼고 싶은 아이를 골랐어요. 아빠의 도움이 필요해요.”

이네스 황후를 쏙 빼닮은 아이네스는 순진했던 제 어미와 달리 손익 계산이 빠르고 황족다운 욕심을 부릴 줄 아는 아이였다.

“아빠, 저는 레오노라 공녀를 가지고 싶어요. 가지지 못한다면 망가뜨리기라도 하고 싶어요.”

“…….”

“제가 갖지 못한다면 남이 갖지도 못하게 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래, 자신이 분명 그리 가르쳤었다.

그레고르는 아이네스가 이네스를 빼닮듯 노엘을 빼닮은 작은 아이를 떠올리며 턱을 매만졌다.

* * *

노엘은 본궁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정원수에 기대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소녀에게 서둘러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왜 그래요? 어디 아픈 거예요?”

“황제, 아니, 폐하를 만나는 순간부터 계속 속이 울렁거려서….”

답지 않게 더듬더듬 입을 여는 노엘은 정말 아파 보였다.

희붐한 달빛 아래 빛나는 창백한 뺨을 힐끔한 나는 턱을 손가락에 얹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러지? 냄새나서 그런가?”

변태 냄새.

내 말에 아픈 와중에도 피식 웃음을 흘린 노엘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인다.

“폐하를 두고 말조심할 줄 모르는군… 요.”

“노엘도 공녀를 앞에 두고 말조심할 줄 모르잖아요.”

“죄송합니다.”

나는 내게 공대를 했다 하대를 했다 제멋대로 구는 노엘을 빤히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에요. 내가 한참 어리니까 하대해도 괜찮아요.”

물론 평민인 그녀가 내게 반말을 하는 건 예법에 어긋나도 크게 어긋났지만, 묘하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으니까.

“어찌 됐든 폐하를 조심해요. 예쁘면 나이 불문하고 달려드는 변태 새… 크흠. 어쨌든 조심해요.”

“…왜 나를 돕는 거지?”

“내 언니일 수도 있다면서요?”

“레이디 뮤리엘의 헛소리를 진심으로 믿는 건가.”

뮤리엘의 말을 믿지 않는 건 아빠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나도 믿고 싶진 않지만….’

나는 노엘의 시큰둥한 목소리에 어깨를 으쓱하며 등을 돌렸다.

삐익- 삐익-

‘친자 판별기가 너무 잘 작동하는걸.’

노엘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마도구의 진동이 손안에 울려 퍼지고 있었으니까.

* * *

“그럼 드디어 오늘 아이네스 황녀 전하의 배동을 선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시종의 말에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예비 황녀군까지 동원해 화려하게 치렀던 예선과 달리 본선은 딱히 구경거리도 없을 만큼 볼품없었다.

‘…후보들이 전부 자진 사퇴해서 노엘이랑 나밖에 남지 않았잖아.’

후보도 후보였지만, 주제 선정도 너무 편파적이었다.

‘티파티를 주도하라니?’

이게 만약 공식적인 대회였으면 미리 합격시키겠다고 점찍은 후보가 있는 게 아니냐며 사람들이 들고 일어설 만한 주제였다.

‘이건 나를 배동으로 선발해 주겠다고 대놓고 말하는 거나 다름이 없는 거잖아.’

꺼림칙한 기분에 고개를 들자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네스가 만개한 달리아처럼 활짝 웃는다.

‘원작 책 펼쳐 보지 않아도 알겠네.’

나는 황녀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내 마나통! 외치면서 헤죽헤죽 웃고 있는 거.’

내 앞에 놓인 티팟만 옴질옴질 만지작거리는 내 정수리 위로 노엘의 차분한 목소리가 떨어진다.

“할 말이 있는데.”

“응?”

“공녀님께서는 황녀 전하의 배동으로 선발되어도 얻을 수 있는 이점이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데도 나를 경쟁 상대로 보고 견제하는 느낌이 없는 게 신기하네.’

“노엘 말이 맞아요.”

나는 노엘의 새까만, 그러나 가스파르의 것과 달리 맑은 느낌이 나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당신에게 배동 자리를 양보해 줄 수는 없어요.”

너무 위험하니까.

나는 배동 선발전을 통해 노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소녀가 얼마나 대단한 인재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군대를 통솔해 본 경험도 없을 텐데 몇 번의 훈련만으로 병사들을 제게 종복시키는 카리스마하며, 군더더기 없는 지휘와 명석한 두뇌 회전까지….’

그런 사람을 아이네스가 꼭두각시로 삼게 둘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내 가족일 수도 있는 사람인데.’

친자 판별기가 아직 완성되었다고는 볼 수 없는 단계였으니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노엘의 무덤덤한 얼굴을 마주한 채 활짝 웃었다.

“그러니까 우리 정정당당하게 승부해요!”

그럼 내가 이길 테니까!

비겁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번 본선은 내가 승리를 거머쥐게 될 것이다.

‘평민인 노엘이 언제 티파티 같은 걸 열어 봤겠어?’

“알겠습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다음 제자리로 돌아간 노엘을 지켜보다 자그마한 미간을 좁혔다.

‘엥?’

이게 아닌데.

정원의 왼편에 자리 잡은 노엘이 차를 따르는 솜씨가 너무 심상치 않았다.

‘…어떻게 저렇게 매끄럽게 진행을 잘하는 거지?’

무슨 농담을 했길래 저 철옹성 같은 귀부인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 걸까.

누가 보면 어디서 귀족 가문 안주인 노릇이라도 하다 온 줄 알겠다.

당황한 내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어린 시녀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연다.

“폐하께서 배동 선발전을 기리기 위해 특별히 공녀님께 하사하신 찻잎으로 끓인 홍차입니다.”

나는 시녀가 내민 찻잔 위로 뿌옇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힐끔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약을 타도 좀 티 안 나게 탈 것이지….’

“노엘 양에게는 론도산에서 나오는 잎을, 그리고 레오노라 공녀님에게는 에멜 평야에서 생산되는 잎을 하사하셨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론도산 찻잎 맛이 너무 궁금해서 그런데 제가 노엘 양의 차를 먹어 봐도 될까요?”

“아니!”

내 물음에 시녀 대신 냉큼 대답한 아이네스가 황급하게 고개를 젓는다.

“네?”

“아빠, 아니,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찻잎이야. 멋대로 바꿔서 마시는 건 실례라고 생각해.”

“…아.”

그렇지.

너는 어떻게든 내게 이 차를 먹이고 싶겠지.

“그렇네요. 제가 너무 예의가 없었어요, 황녀 전하.”

나는 아이네스가 권하는 대로 찻잔을 들어 올리는 모션을 취하다 재빨리 노엘의 것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맛이 너무 궁금한걸요!”

실수인 척 내 찻잔은 엎어 버려야겠다 마음먹은 내가 재빨리 노엘의 차를 한 모금 머금은 순간이었다.

‘…뭐지?’

아이네스가 징그러울 정도로 크게 입을 벌리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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