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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화 (156/486)

제16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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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품에 안긴 내가 울음을 그치자 뮤리엘에게 사나운 시선을 던진 아이네스가 손뼉을 치며 단상 위에 올라선다.

“…자아! 소란이 일단락된 것 같으니 아이네스가 여러분들에게 전해 드릴 소식이 하나 있어요.”

일단락이 된 건 아니었지만, 연회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황녀가 사건을 수습하자 사람들이 애써 나와 뮤리엘에게서 시선을 떼 낸다.

“아이네스가 아직도 배동이 없다는 건 모두 잘 알고 계시겠죠.”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데 성공한 아이네스는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자그마한 제 가슴을 양팔로 끌어안았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배동을 선발하려고 해요.”

“배동을 선발하신다는 게 무슨 뜻이죠?”

“공개적이라는 말은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는 거 아닐까요?”

아이네스의 선언에 그녀 또래 아이가 있는 귀족들이 반응을 보이며 술렁이기 시작한다.

나는 한 번 거절한 전적이 있는 자리이긴 했지만, 아이가 황녀의 배동이 되면 가문이 한미할지라도 중앙 귀족에 발을 들일 수도 있는 기회가 될 테니까.

“공개 선발전이니만큼 배동으로 뽑힌 아이에게는 특별한 선물도 준비했답니다!”

나는 팔을 짜잔- 펼치며 대단한 상품이라도 준비한 것처럼 활짝 웃는 아이네스의 얼굴을 힐끔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이네스가 준비한 선물이래 봤자 기대도 되지 않는다.

‘사이코패스가 준비한 선물을 누가 받고 싶겠어.’

설마 사람 머리 같은 건 아니겠지…?

나는 의구심 섞인 시선으로 아이네스가 품에 안은 상자를 노려보았다. 내가 여태 지켜본 아이네스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애니까.

“바로 황궁 서고 열람권이에요!”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네스가 뚜껑을 연 상자 속에는 사람 머리 대신 고급스럽게 포장된 양장 봉투가 들어 있었다.

“진귀한 자료가 많아서 배동으로 선발될 만큼 똑똑한 아이라면 드나들고 싶어할 만한 곳이라는 거, 배려심 깊은 아이네스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나는 선포하듯 말을 잇는 아이네스의 태도에 흠칫 몸을 떨었다.

“황비 전하, 알레테이아 교단에 대해 알아보셨나요?”

“미안하네요. 주목나무의 모든 길드원을 동원해 정보를 모아 봤지만, 겨우 이런 기본적인 정보들밖에 수집하지 못했어요.”

“제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네요.”

“네. 이외의 정보는 알아낼 수가 없었어요. 선선대 황제가 기를 쓰고 자료를 삭제한 것 같아요.”

“니드리만 3세가요?”

“그가 알레테이아 교단에 대한 모든 기록을 없애라는 황명을 내린 적이 있어요. 그래서 교단에 대한 정보가 남아 있는 곳이라면 제국에 단 한 곳뿐이에요.”

“그곳이 어디인데요?”

“본궁의 서고. 황명이 피해간 유일한 곳이죠.”

‘마치 내가 황궁 서고를 열람하고 싶어한다는 걸 아는 것 같은 눈빛이잖아.’

아이네스의 꿍꿍이를 눈치챈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럼 난 절대로 참가 안 해야지.’

파놓은 게 뻔한 함정에 누가 굴러가고 싶겠나.

“자아, 아이네스의 배동이 되고 싶은 아이들은 앞으로 나와 주세요!”

발랄한 아이네스의 외침에 나서지 말자고 결심하며 뒤로 반보 물러난 순간,

퍽-!

누군가가 내 등을 떠밀었다.

퉁, 퉁, 탁!

넘어지지 않기 위해 단상 앞으로 튀어 나간 나를 발견한 아이네스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를 껴안는다.

“꺄아-! 공녀가 참가해 주다니 아이네스, 너무 기뻐요!”

나는 천진난만하게 기뻐하는 원작 여주의 얼굴을 멀뚱멀뚱 바라보다 뒤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누구야?’

아이네스의 배동 자리따위, 절대 탐나지 않는데!

“훗. 아깐 그렇게 가련한 척을 하더니 지금은 악독한 표정을 못 숨기네?”

나와 눈이 마주친 소녀-노엘을 따라다니던-가 후훗, 웃으며 내게 짧은 귓속말을 속삭인다.

‘이게 봐주니까 밑도 끝도 모르고 기어오르네.’

“황녀 전하, 저 잠깐 이 친구와 산책 좀 다녀올게요.”

어디 가냐며 따라붙는 아이네스에게 방긋 웃어보인 나는 내게 다가온 소녀의 팔뚝을 거칠게 움켜잡으며 등을 돌렸다.

“야, 나 따라와.”

“…어?”

“따라오라고. 이 미친 계집애야.”

“뭐, 뭐야…! 노엘! 나, 나아-!”

“죽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고 친한 척해. 티 내지 말고.”

발버둥치던 소녀가 내 경고에 흠칫 놀라며 입을 다문다.

결국 아이는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질질 정원까지 끌려나올 수밖에 없었다.

“무, 무슨 용건인데!”

정원에서 내가 제 팔을 놓아주자마자 눈물까지 고인 눈으로 씩씩거리던 아이가 목소리를 높인다.

“너 뭐야?”

“나, 나? 레이첼.”

나는 휘둥그레 눈을 뜬 레이첼이란 아이를 노려보며 미간을 좁혔다.

“누가 이름 물어본 줄 알아? 왜 자꾸 시비냐고?”

카악-! 퉤!

어려서 봐주려고 했더니만.

“비 오는 날 아주 먼지 나게 맞아 볼래?”

손까지 탁탁 털며 묻는 내 말에 레이첼이 기겁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이, 이렇게 사나운 애가 쁘띠 플뢰르라니 말이 안 되니까!”

쁘띠 플뢰르?

내 기억이 맞다면 나는 레이첼이라는 아이를 이번 연회에서 처음 본다.

“너, 선발전에 안 나왔잖아? 본 기억이 없는데.”

“나 같은 건 선발전에 나가지도 못해! 노엘이 예선에 나갔었어!”

‘아빠의 사생아라면… 나랑 나이가 겹치지 않으니까 못 봤을 수도 있지.’

나는 울화통이 터진다는 듯 새빨개진 얼굴로 입술을 짓씹는 레이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엘이 얼마나 열심히 올해 쁘띠 플뢰르를 준비했는지 네가 알기나 해?! 부상을 당하는 일만 없었어도, 너 같은 건 승부도 안 됐을 거라고!”

나는 울먹이는 레이첼의 말에 기가 막혀 턱을 긁었다.

‘뭐야. 진짜 어린애 울린 것처럼 왜 씩씩거리고 난리야….’

열이 받아서 끌고 오긴 했는데, 막상 어린애-겉보기엔 내 또래였지만-를 울렸다는 생각에 양심이 따끔따끔 아파온다.

‘게다가 왠지 내버려 두면 알아서 정보를 술술 불 것 같은 관상이란 말이지.’

내가 로판에 빙의해 봐서 아는데, 이런 애들은 조금만 더 약을 올리면-

“혼자 힘든 임무란 임무는 전부 떠맡으면서 힘겹게 준비했는데, 너 때문에 다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도 모르면서!!”

옳지.

“임무?”

나는 알아서 덫에 걸려들어온 레이첼을 내려다보며 히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췄다.

“그게 무슨 말이야? 누가 노엘에게 임무를 준 건데?”

속내를 감추고 아이를 캐물으려는 순간, 정원 입구에서 단호하지만 차분한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레이첼, 그만 울고 이리와.”

나는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새까만 눈동자를 돌아보았다.

“내가 울린 거 아니에요.”

나도 모르게 변명을 내놓자, 노엘이 상관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레이첼에게 손을 뻗는다.

“이제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공녀님.”

고저없는 레이첼의 목소리에 내가 입을 헤 벌리는 사이, 노엘은 이미 레이첼을 챙겨 정원을 벗어난 후였다.

“흐음.”

나는 멀어지는 노엘의 등을 바라보며 콧잔등을 움찔했다.

‘자카리 또래 같은데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란 말이지.’

곧 친자 확인 마도구를 완성시키긴 하겠지만, 저 정도 카리스마라면 안 해도 될 것 같기도 했다.

물렁물렁한 성정으로는 따라올 사람이 없는 가스파르의 사생아가 저렇게 포스를 풀풀 날릴 리 없으니까.

* * *

“포기해라.”

내가 저를 두고 어떤 평가를 내렸는지 눈치라도 챈 건지, 가스파르는 답지 않게 단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 포기해.”

가스파르의 말에 맞장구라도 치듯 실비가 그의 옆에서 냉큼 고개를 끄덕인다.

“응, 리니. 이번에는 네가 물러나는 게 맞는 것 같아.”

“뭐라구?!”

혼내는 아빠보다 말리는 오빠가 더 얄밉다더니, 나는 괜히 에녹을 살벌하게 노려보며 야무지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리니 사전에 포기란 없어. 그건 김치 셀 때나 쓰는 단어야.”

“김치? 그게 뭔데?”

“있어, 그런 게!”

나는 어리둥절한 에녹의 잘생긴 얼굴에 대고 소리를 빽 내지르며 콧김을 뿜었다.

“왜 다들 안 된다고만 하는 거야?”

나도 딱히 아이네스의 배동이 되고 싶진 않았지만, 가족들이 득달같이 말리는 모습을 보니 내가 그정도로 어리숙해 보이나 싶었다.

‘쁘띠 플뢰르 선발전에 나간다고 했을 때도 아무도 안 말렸으면서!’

“이미 배동이 하고 싶다고 해 버렸는데 지금 안 하겠다고 나오면 내가 지레 포기하는 것처럼 보일 거 아냐.”

아이네스의 배동이 되겠다고 나선 아이들은 스텔라 솔로아-발렌, 레티샤, 노엘, 그리고 리콘 남작가의 차남인 에네스 리콘을 포함한 몇몇 귀족 아이들이었다.

그중 스텔라는 내가 포기한 이유가 분명 저 때문일 거라며 입을 놀릴 게 뻔했다.

‘게다가 레티샤가 배동이 되는 것도 막아야 해. 안 그러면 아이네스가 그 불쌍한 아이를 한입에 꿀꺽…!’

“다들 나 못 믿어? 리니 너무 서운해.”

나는 결국 연회에서 선보였던 눈물연기 카드를 다시금 꺼내 들었지만, 움찔하는 가스파르나 오빠들과 달리 루카스는 냉철한 얼굴로 내 볼살을 꾹 누를 뿐이다.

“레오노라. 황궁은 지금 네게 특별히 위험한 곳이다.”

‘고작 황녀의 배동 선출인데 위험하긴 뭐가 위험하다는 거야?’

“왜? 아, 아니, 왜요?”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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