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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6화 (152/486)

제156화

“꼴이 이게 뭐냐, 하잘것없는 녀석.”

혀를 끌끌 차는 대공의 말에 루카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닙니다.”

“지금 그게 숙부인 내게 못 볼 꼴을 보여 줘 놓고 할 소리냐!”

“찾아오지 않으셨다면 될 일 아닙니까?”

오빠들의 훈련이 끝나자마자 병동에 들어선 나는 울화가 치민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는 대공과 절세가인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반반한 낯짝을 뺀질하게 들이미는 루카스를 번갈아 바라보다 앞으로 나섰다.

‘어린놈(?)이 싸가지도 없지!’

찰싹.

“루카스, 그런 못된 말 하면 안 돼!”

병동 침대 위로 폴짝 뛰어오른 나는 장유유서의 정신을 지키지 않는 루카스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떼찌, 떼찌!”

“둘 다 나가.”

달라붙는 개를 쫓아내듯 내 목덜미를 덥석 잡은 루카스가 사납게 미간을 좁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침대 근처를 서성이는 사뮈엘 대공을 가리켰다.

“나가라니! 대공 할아버지 상처받으니까 그런 말 하지 마!”

“뭐? 상처?”

내 말이 농담이라도 된다는 듯 루카스의 잘생긴 입매가 비스듬히 올라간다.

“저 영감탱이는 마음의 상처 따위는 평생 모르는 인간이다.”

“바보! 그걸 루카스가 어떻게 알아!”

나는 루카스의 말에 버럭 호통을 치며 왠지 모르게 뻘쭘해 보이는 대공을 돌아보았다.

‘이 초라한 어깨 좀 보라고!’

축 처져서-딱히 엄청 처진 건 아니었지만- 도무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이 어깨를 보란 말이다.

“루카스가 걱정이 되어서 찾아온 할아버지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얼른 사과해!”

“…….”

“안 해?!”

내 호통에도 루카스는 나뭇잎이 나붓나붓하게 흔들리는 창가만 흘깃할 뿐이었다.

양옆구리에 손을 올린 나는 단호한 결심을 굳혔다는 듯 거친 콧김을 흥, 뿜었다.

“좋아. 그럼 리니 오늘부터 굶을 거야.”

“뭐?”

“아주 쫄쫄 굶어. 배가 납작이가 될 때까지 물도 한 모금 안 마실 거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루카스는 내 협박에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지만, 나는 그의 눈가가 초조하게 떨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흥. 걱정되지, 요놈아?’

내가 배고파지면 마나가 닳기 때문에 루카스 입장에서도 큰 손해였으니까.

“싫으면 따라 해. 미안합니다.”

“…미안.”

나는 말을 뚝 잘라먹는 루카스의 손등을 찰싹 내려치며 눈을 부라렸다.

“미안합니다, 할아버지 해!”

“미안합니다, 영감탱.”

차라리 영감탱을 붙이지 않는 게 나았겠지만, 나는 씰룩이는 대공의 입꼬리를 목격하곤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 정도만 해. 괜찮죠, 대공 전하?”

“그래. 오래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보는구나.”

내 물음에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뮈엘 대공에게 나는 아까 그에게 넘겨준 것과 비슷한 간식을 꺼내 보였다.

“자. 이거 리니가 챙겨 온 거니까 선황자 전하랑 나눠 먹으세요.”

단 게 입에 들어가면 아무래도 사람이 조금 더 유해지기 마련이니까.

“고맙구나.”

“둘이 편히 대화 나누세요!”

나는 루카스와 사뮈엘 대공 사이에 대화의 물꼬를 터 줬다는 생각에 씩씩하게 병동을 나섰다.

‘이 정도 해 줬으면, 사뮈엘 대공도 내게 호감을 보이겠지!’

* * *

자그마한 아이의 의기양양한 뒷모습을 지켜보던 사뮈엘은 흥미롭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재밌는 아이로구나.”

그러자 루카스의 눈빛이 변태를 마주한 듯이 날카로운 예기를 띤다.

“괜히 껄덕대지 마십시오.”

“나를 뭘로 보고? 사고뭉치 제자라면 너 하나로 차고 넘친다.”

차고 넘치다 못해 아주 인생이 피곤해졌다.

사뮈엘은 피로가 가득 메운 관자놀이를 손목에 기대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네가 아이 밥 굶는 것 따위를 신경 쓰다니, 핏줄이 아니라더니 정말 네 자식인 것이냐?”

“마나의 파동이 같을 뿐입니다.”

“그럼 더 네 자식인 양 느껴지겠구나. 마법사인 우리들에게 영혼의 마나는 육체에 흐르는 피보다 소중한 것이니.”

마법사에게 중요한 건 결국 영혼에 귀속된 마나였으니까.

사뮈엘의 말에 잠시 말을 고르듯 입술을 달싹인 루카스는 냉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봤자, 아닙니다.”

그의 대답은 어쩐지 조금 우울하게 들려왔다.

“결국 제 자식은 아닙니다.”

사뮈엘은 루카스의 입가에 맺힌 씁쓸한 미소를 비웃으며 혀를 찼다.

“황자로 태어나 황태자 자리에도 올랐던 놈이 아직도 혈육에 목을 매느냐?”

“당신은 이해 못 합니다.”

“부모 자식이란 꼭 핏줄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닌 것을…. 단순한 스승과 제자 사이도 피로 이어진 부모 자식의 연보다 질길 수 있는 법이다.”

대공의 잔소리에 루카스가 뚜한 얼굴로 미간을 좁힌다.

“꼭 겪어본 사람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겪어 봤다.”

“누구랑 겪어 봤다는 말씀이십니까?”

“…늙은이 마음이라곤 쥐똥만큼도 모르는 놈 같으니!”

사뮈엘은 늙었지만 아직 정정한 팔을 번쩍 들어 루카스의 등을 내려쳤다.

퍽-!

“…왜 때리십니까?”

“됐다, 이 망할 놈아! 그냥 죽어 버리지 왜 여태 살아남아서 속을 썩이느냐?!”

루카스는 사뮈엘의 질책에 한숨처럼 웃으며 제 팔을 뻗어 보였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영감… 아니, 대공 전하라면 느끼시겠지만.”

“…네 마나 그릇이 텅 빈 것은 진즉 알아봤다.”

그의 등을 철썩철썩 내려치던 사뮈엘의 시선이 흐릿한 팔로 떨어진다.

투명하다 못해 사물을 투영할 정도로 흐릿한 루카스의 모습에 노회한 눈에 결국 눈물이 맺힌다.

“…늙은 나보다 먼저 갈 작정인 게야!”

“어차피 이 세상에 그 무엇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미련이 없습니다.”

자조하는 루카스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던 사뮈엘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레오노라라는 아이는 네 미련이 못 되는 것이냐.”

“저 말고도 레오노라를 지켜줄 사람은 많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아이를 알레테이아의 손길에서도 지켜 줄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겠느냐?”

“…….”

“가스파르 하차니아는 강한 기사이지만 태생이 점잖은 자다.”

사뮈엘은 고귀한 검은 늑대의 것처럼 반질반질한 가스파르의 눈빛을 떠올렸다.

“엄격하고 숭고하지만, 적의 뒤를 노리지는 못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제국의 어둠을 집어삼킨 알레테이아를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야?”

“알레테이아는 결국 제 마나를 노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만 사라지면-.”

“너는 여전히 어린 황자 시절만큼 어리석고 눈앞에 놓인 위험만 견제하는구나.”

사뮈엘은 루카스의 말을 반으로 뚝 자르며 쯧쯧 혀를 찼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알레테이아가 궁극적으로 노리는 마나는 너의 것이 아니라 레오노라라는 아이의 것이다.”

대마법사 루카스에 비하면 레오노라의 마나는 질도 양도 현저히 떨어졌다.

하지만 교단에게 유의미한 것은 마나의 방대한 양이나 흠결 없는 질 따위가 아니었다.

“…그 아이가 교단에게 무슨 의미가 있기에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아스테르.”

사뮈엘은 교단을 위한 숭고한 희생이라는 명목하에 학살된 수많은 아스테르들을 떠올리며 침음을 흘렸다.

“…그것도 이세계의 하늘에 떠오른 아스테르다.”

오랜 세월 교단에 몸을 담근 사뮈엘조차 ‘이세계의 하늘’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랐지만, 레오노라를 교단이 집요하게 노리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하차니아 공작가의 핏줄은 대대로 아스테르를 만들어 내는 가문이라 교단에게 지독히도 이용당해 왔다는 것을 너도 알 것이야.”

교단은 끊임없이 하차니아에게 접근해 사생아를 만들어 빼돌렸고, 그렇게 탄생한 아스테르를 선구자의 부활을 위해 희생시켰었다.

“게다가 레오노라는 교단이 처음으로 ‘완성’시킨 아스테르다.”

사뮈엘의 엄숙한 경고에도 루카스는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비웃을 뿐이다.

“그걸 아시는 것을 보아하니 아직도 그놈의 현자 노릇을 하고 계시는 모양입니다.”

“이중첩자라 내 처지를 비꼬아도 상관이 없다. 나는 내 몫의 희생을 치렀으니까.”

루카스가 사뮈엘이 한때 알레테이아의 교리에 깊게 심취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꼬집었지만, 사뮈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의 아스테르는 네 마나를 이용해 완성시켰으니 교단이 그 아이를 노리는 데 네 몫이 없다 할 수는 없겠지.”

사뮈엘은 루카스가 황자였을 때처럼, 아니, 그때보다도 더 엄한 얼굴로 자신의 제자를 질책했다.

“그러니 정신 차리고 살아남을 생각을 해라, 루카스. 내가 누누이 말해 왔지 않느냐. 지킬 것을 만들라고.”

“소중한 것은 약점이 될 뿐입니다.”

“아니, 소중한 것이 없는 사람은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을 이길 수 없는 법이다.”

“…….”

“그리고 너도 이미 느꼈겠지. 레오노라는 …이라는 걸.”

사뮈엘의 말에 입술만 달싹이던 루카스는 결국 제 흐릿한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몸을 일으켰다.

“공작을 불러 주십시오. 긴히 할 말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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