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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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가 여기 있다고 들었는데.”
뮤리엘을 밀어내듯 정원에 들어선 사뮈엘 대공이 깔끔하게 정돈된 제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연다.
“그게 사실인가?”
“네. 루카스 선황자 전하께서 지금 공작성에 머물고 계십니다.”
코제트의 대답에 대공은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지은 다음 가스파르와 나를 돌아보았다.
“그 녀석을 한번 봐야겠는데, 안내해 줄 수 있겠나?”
“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나는 가스파르가 대답하기도 전에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아빠의 소맷부리를 붙들었다.
“그래도 될까요, 아빠?”
“그래. 의료원의 복도는 미끄러워 넘어지기가 쉬우니 조심하고.”
‘내가 무슨 앤 줄 아나.’
웬만해선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 가스파르의 걱정에 흥, 콧방귀를 뀐 나는 대공에게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저를 따라오시면 되어요.”
“고맙구나.”
사뮈엘 대공은 노인이었지만 허리가 꼿꼿한데다 웬만한 기사들 못지않은 장신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내가 제게 매달리는 것이 힘들지 않도록 상체를 숙여 준 덕에 나는 무난하게 그에게 팔짱을 낄 수 있었다.
‘으음. 그런데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보이지?’
나는 쁘띠 플뢰르에서 봤던 모습과 달리 피로가 눅진하게 늘어 붙은 듯한 대공의 안색에 조심스레 운을 뗐다.
“혹시 오늘 오찬 드셨어요?”
“아니. 안 먹었단다.”
나는 대공의 대답에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어쩐지 기력이 없어 보인다 싶더니.’
나는 식욕이 왕성한 편은 아니지만, 끼니는 대체로 챙겨 먹는 편이었다.
안 먹으면 오빠들을 위시한 공작가의 사람들이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난리를 쳐 대기도 했고, 노인과 아이는 잘 먹어야 하는 법이니까.
‘흐음. 조금 아깝지만, 어쨌든 점수를 따 놔야 하는 대상이니까.’
나는 주머니 속에서 옴질거리던 손을 꺼내 대공 앞에 펼쳐 보였다.
“…이거 리니가 이따 먹으려고 숨겨 놓은 건데, 대공 할아버지 드릴게요.”
자그마한 손바닥 위에 올라간 것은 반질반질한 핑크색 봉지로 감싸인 파인애플 절임 사탕이었다.
‘혀에 착 달라붙는 식감이 예술인, 무려 우리 롬바르디 주방장이 개발한 신메뉴라고.’
“어-엄청 맛있어요. 리니 믿고 드셔 보세요, 할아버지.”
잡숴 봐, 잡숴 봐.
제 앞에서 나비처럼 팔랑이는 내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대공이 뭐가 우스운지 비스듬히 입꼬리를 들어 올린다.
“…할아버지?”
“앗. 대공 전하라고 불러야 하는 거죠? 죄송해요.”
나는 화들짝 놀랐다는 양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껄껄. 아니다. 내가 할아버지가 맞기는 하니까 그리 불러 다오.”
그러자 사탕을 가져간 대공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나는 대공의 반응에 흡족한 웃음을 만면에 띄우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 귀여워 죽겠지?’
내가 백 날 천 날 인상만 써 가면서 에녹과 실비를 잡느라 귀여움이 조금 떨어져 보이는 거지, 어디 나가서 안 귀엽다는 소리 들을 어린이는 아니라고?
대공에게 ‘천진한 어린이’처럼 보이는 데 성공한 나는 의기양양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곧 의료원에 당도하자마자 안쪽에서 우당탕탕 뛰어 나오는 힐다가 눈에 들어온다.
“아가씨!”
“무슨 일이야, 힐다?”
“벼, 병동에…!”
나는 힐다의 초조한 목소리에 다급하게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왜? 설마 상태가 악화되기라도 한 거야?!”
루카스라면 사뮈엘 대공에게 자신의 상태를 감추고 싶어 할 것 같아서 주어를 쏙 빼먹은 나는 숨을 몰아쉬는 힐다를 올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아니고- 허억.”
“응?”
“공자님들이 전부 아프다고 드러 누워계셔서 아가씨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어요!”
눈치 빠른 힐다가 대공을 힐끔하며 ‘내 명령’의 정체를 얼버무린 것에 만족하는 것도 잠시, 나는 이어지는 힐다의 말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들 열도 안 나는데 열이 나는 것 같다고 하시고, 복통과 두통을 호소하셔서 진통제를 드렸는데도 아가씨를 봐야 나을 것 같다고 난리들이세요!”
‘아, 이 미친 것들이 진짜…!’
“그래? 아프면 굴러야지.”
“네?!”
이를 부득 갈며 하는 말에 힐다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뜬다.
“꾀병에는 훈련만이 답이거든. 전부 연무장에 집합하라고 해.”
나는 돌아가는 상황이 이해 가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모은 대공에게 공손히 읍한 다음 힐다를 가리켰다.
“대공 할아버지, 힐다가 선황자 전하가 계시는 곳을 아니까 따라가시면 돼요. 힐다, 대공 전하의 안내를 부탁해.”
“네, 아가씨.”
나는 어리둥절한 둘을 놓고 씩씩하게 의료원을 벗어났다.
* * *
연무장에 들어선 나는 나란히 도열한 자카리, 실비, 에녹을 훑어보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잠깐만. 자카리는 왜 있는 거야?’
설마 자카리까지 에녹과 실비와 함께 꾀병 난동을 부리기라도 했다는 걸까.
“…룰루. 자카리도 병동에 있었어?”
“네. 머리가 아프시다고 하시던데요.”
나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으며 룰루가 내놓은 대답에 멀쩡하다 못해 평소보다 졸려 보이지도 않는 자카리의 얼굴을 힐끔했다.
“진짜 아픈 게 뭔지 보여 줘야지, 안 되겠네.”
손바닥을 마주치며 먼지를 탁탁 털어 낸 나는 형제들에게 다가서며 왼쪽으로 손을 뻗었다.
“룰루, 교관모.”
착.
“랄라, 썬글라스.”
처억.
룰루와 랄라가 내 몸에 장착해 준 훈련 교관 아이템을 확인한 나는 당찬 걸음으로 형제들 앞에 당도했다.
“다들 준비됐습니까?”
연무장 단상 위에 오른 내 물음에 제일 먼저 나를 발견한 에녹이 인상을 찌푸린다.
“리니, 나는 진짜 아픈데 왜 연무장으로 부른 거야? 이따 같이 자기로 한 거 안 잊었지?”
“안 잊었었습니다, 에녹 훈련병.”
나는 에녹을 딱딱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아픈지 안 아픈지 확인할 필요는 있지 않겠습니까?”
“…왜, 왜 또 그런 말투야? 우리 오늘 훈련 일정 없었잖아!”
“다들 얼굴에 핏기가 없습니다! 에녹, 실비, 자카리 훈련병 모두 혈액순환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에녹의 말에 반박하듯 크게 발을 구르며 확성기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래서 아프다고 병동에 드러누운 것이 아닙니까?”
“…….”
“대답합니다!”
“마, 맞습니다!”
셋 중 제일 내 ‘교관 모드’에 익숙한 에녹이 재빠르게 대답한다.
“혈액순환에는 달리기가 제일입니다! 자, 다들 가볍게 30바퀴만 돕니다!”
주르륵 콧잔등 아래로 미끄러진 선글라스를 추켜세우며 외치는 내 말에 번쩍 손을 든 실비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레오노라, 나는 에녹과 첫째 형님과 달리 정말로 아프다.”
나는 이제는 웃음도 안 나는 둘째의 거짓말에 활짝 웃으며 아래를 돌아보았다.
“제일 먼저 도는 사람은 리니가 병간호를 해 줍니다!”
“정말?”
“호-도 해 주고, 물수건도 갈아 주고, 밤에 꼬옥 안아 주면서 잘 겁니다!”
확성기에 고래고래 포상에 대해 설명하면서도 나는 말아 쥔 작은 주먹을 움찔 떨었다.
‘자카리에게는 이게 보상이 될지 모르겠는데….’
싶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가장 먼저 연무장을 뛰기 시작한 자카리의 열성적인 모습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뜨렸다.
‘되네. 아주 잘돼.’
“와, 형님! 치사하게 먼저 출발하는 게 어디 있어요!”
“…네가 느린 것.”
“씨이!”
자카리를 뒤따라 에녹이 달릴 태세를 갖추자마자 나는 호루라기를 높이 치켜들었다.
“출발합니다!”
삐익-!
실비까지 내가 힘차게 호루라기를 불자마자 재빠르게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나는 부연 먼지를 일으키며 연무장을 뛰는 형제들을 바라보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다들 흑랑(黑狼), 백랑(白狼), 적랑(赤狼)의 주력이나 마찬가지인데 정신상태가 이 모양 이 꼴이라니….’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기사단들의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뭐, 새로 제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용병단을 꾸릴 생각인 내게는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어.’
내가 가족들을 위해 품은 원대한 꿈은 하차니아의 독립.
황실과 루엘라드교가 장악한 이 윌레닌 제국의 영향을 받지 않는 완벽한 독립국을 세우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려면 일단 온전한 군사력부터 갖춰야겠지.’
그리고 군사를 꾸리는 데는 돈과 인맥이 필요했다.
‘그 첫 단추를 꿰어 줄 인물이 루카스의 친척이라니!’
나는 병동으로 걸어 들어가던 사뮈엘 대공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
‘이게 바로 빙의자 버프인 걸까?’
“움화화!”
“어머, 역시 우리 아가씨는 음흉하게 웃을 때가 제일 귀여우셔.”
악당 같은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구령대 아래에서 빤히 올려다보던 룰루가 찰칵, 찰칵 소리가 나는 아티팩트를 열심히 움직이며 랄라를 돌아본다.
“랄라. 영상구에는 다 담았지?”
“그러엄. 우리 아가씨 웃는 영상이 얼마짜린데?”
음? 잘못 들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