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나는 물에 젖은 수채화처럼 흐린 루카스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힐다를 불러올게.”
“괜찮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지금 루카스, 꼭 유령 같단 말이야!”
루카스의 말에 빽 소리를 지르고 만 나는 그의 무감한 얼굴을 노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병인지 알아야 치료를 할 거 아냐….”
육체를 되찾은 후유증이라거나 저주라면 힐다의 능력으로 가능한 영역이 아니었지만, 병이라면 치료할 수 있었다.
“괜한 걱정하지 마. 우리 힐다는 천재니까.”
나는 내 말에 대꾸 없이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는 루카스의 어깨를 달달 흔들며 재촉했다.
“응? 불러오는 게 싫으면 나랑 같이 잠깐 병동에 다녀오자.”
“…알겠다.”
결국 내 채근을 이기지 못한 루카스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킨다.
나는 오늘따라 반응 속도가 느린 것 같은 그를 이끌고 다급하게 힐다를 찾아 나섰다.
“힐다! 루카스 선황자 전하께서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아.”
연구실에 가까운 형태를 띤 의료원 원장실에서 여러 가지 약물을 섞고 있던 힐다가 내 말에 안경을 추켜올린다.
“네! 제가 상태를 봐 드릴게요.”
힐다의 말에 루카스의 등을 떠밀자 그녀에게 다가선 그가 속삭이듯 입술을 움직인다.
‘뭐야. 웬 귓속말?’
“공녀님, 죄송하지만 잠깐 나가 주실 수 있을까요? 선황자 전하께서 제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요.”
“아, 으응! 나 복도에 서 있을게. 편하게 살펴봐.”
내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 모양이었다.
루카스의 괜한 고집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하며 초조하게 복도를 서성이는데, 곧 힐다가 빼꼼 고개를 내민다.
“공녀님.”
“응, 힐다. 선황자 전하가 앓고 계시는 병이 어떤 건지 알아낸 거야?”
내 물음에 힐다가 답지 않게 대답을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인다.
“…네. 키페르병이라고 희귀병이지만 치료할 수 있을 거예요, 아가씨.”
나는 힐다의 대답에 크게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다행이다!”
“제가 연구실로 돌아가서 치료약을 만들어 볼게요.”
“응, 부탁해.”
나는 내 말에 생긋 웃으며 멀어지는 힐다를 배웅해 준 후, 루카스를 찾아 원장실 안에 들어섰다.
“어쩐지 연락이 없다 싶었는데, 아파서 그런 거였어?”
햇빛 아래 늘어져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빛이 나는 루카스가 고요한 눈으로 나를 돌아본다.
“그냥 나한테 바로 오지. 그럼 내가 바로 힐다를 불러 줬을 텐데.”
“레오노라.”
투덜거리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루카스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나는 네 가족이 아니다.”
“…뭐?”
“나는 네 가족이 아니니 내게 신경 쓸 필요 없다.”
나는 루카스의 딱딱한 말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못되게 해?”
아프다고 해서 의료원까지 데려왔더니 심술은.
“네가 착각하는 것 같기에 되새겨 주는 것뿐이다. 넌 나와 마나의 파동만 같을 뿐, 내 피가 섞인 건 아니니까.”
“…알았어, 알았으니까 힐다가 가져다줄 약이나 챙겨 먹어.”
나는 루카스의 말에 기분이 상해 인상을 찌푸린 채 방을 벗어나 버렸다.
* * *
“가스파르, 정말로 그날 밤을 잊어버린 건가요?”
‘밤? 무슨 밤?’
본성으로 돌아가려던 나는 뮤리엘의 끈적끈적한 목소리에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네. 저는 기억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달라붙는 그녀를 쳐내듯 무뚝뚝한 가스파르의 대답이 뒤를 이어 들려온다.
“하지만 기억하지 못한다고 없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레이디 뮤리엘, 맹세코 나는 노엘을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 그 아이는요. 그 불쌍한 아이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아이가 되는 건가요?”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답하지 못하는 가스파르의 옆얼굴을 살피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뮤리엘이 교단의 제단 위에서 들었던 그 헛소리를 아빠에게도 하는 모양이네.’
가스파르에게 그가 존재조차 몰랐던 사생아가 있다는 주장이었는데, 내 상식으로는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한 번 만나기라도 해 봐요. 만나면 반드시 당신 딸이라는 걸 알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지 뮤리엘의 얼굴에는 묘한 확신이 맴돌고 있었다.
“…레이디 뮤리엘. 미안하지만-”
“흐윽!”
그럼에도 아빠가 거절의 말을 내놓으려고 하자, 뮤리엘이 다짜고짜 울음을 터뜨린다.
‘저 미친 아줌마가 우리 아빠를 호구 잡으려고 드네.’
“흡, 끄읍! 죽은 그 여자에게 너무 미안해서 나는 마음이 늘 괴로워요, 가스파르.”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신이 미안할 일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가스파르는 뮤리엘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는 듯 보였지만 어찌 됐든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너무 정중한 신사라서 탈이라니까, 우리 아빠는.’
이럴 때면 가스파르 몸속에 들어가 있던 루카스가 그리워지곤 했다.
‘루카스였다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고 뮤리엘이 울든 말든 정원을 뛰쳐나오거나 저 여자를 확 밀어 버릴 텐데.’
“데려오세요, 그 아이.”
내가 나서야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아빠의 호구 같은 면까지도 사랑하니까.
“레오노라?”
불쑥 고개를 내민 나를 발견한 가스파르가 눈매만 날카로운 순한 눈을 틀어 나를 바라본다.
‘설마 나를 믿지 못하는 거니, 리니야.’ 따위의 심정을 담은 그의 흔들리는 시선을 애써 무시한 나는 뮤리엘을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이모님이 우리 아빠 애라면서요. 그럼 가족인데 당연히 데려와야죠.”
“그래, 데려오마.”
내 말에 당당하게 어깨를 핀 뮤리엘이 콧잔등을 찌푸린다.
“그런데 그 눈빛은 뭐니?”
“네?”
“마치 나를 의심하기라도 하는 눈빛이구나. 나는 네 엄마인 노엘의 사촌이야. 내가 가스파르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 따위는 없다고.”
‘찔리기라도 하는 건가.’
나는 뮤리엘의 말에 콧방귀를 뀌며 어깨를 으쓱했다.
“의심이라뇨. 이모님 말대로 리니는 이모님의 조카인데 이모님을 의심하겠어요?”
나는 대놓고 그녀를 믿지 않고 있다는 걸 어필한 다음 가스파르를 돌아보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아무튼 아빠, 리니는 아빠 딸이라는 그 애를 한 번 만나 보고 싶어요.”
뮤리엘이 데리고 있는 아이라면 분명 교단과 관계가 있을 테니까.
‘게다가 자꾸 공작가와 관련된 사생아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것도 이상해.’
아무리 5대 귀족에 속한 명문가라지만, 다른 귀족들에게도 사생아라면 차고 넘쳤다.
“…리니.”
나는 짐짓 억울한 듯 미간을 좁히는 가스파르를 올려다보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요.”
“그래, 알겠다.”
내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려고 하는 가스파르의 대답에 방긋 웃으며 그에게 안기자, 뒤에서 뮤리엘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애한테도 질투하는 건가.’
나는 잔뜩 굳은 그녀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는 듯 아빠 품에 기댄 채 머리카락을 베베 꼬았다.
‘잘됐어. 이번 기회에 자르파라와 개발한 아티팩트를 써 볼 수 있겠네.’
여태껏 친자 확인은 오직 루엘라드 신전 내에 머무르는 신관들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계급 사회인 만큼 세심한 검증이 필요한 검사였지만, 검사를 진행할 수 있는 곳이 신전뿐이니 따로 교차 검증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신전에서 내가 사생아이며 사실은 루카스의 딸이라는 신탁을 퍼뜨리자마자 그게 기정사실화가 되어 버린 거겠지.’
하지만 신전에서 진행할 수 있는 친자 확인은 완전하지 못했다.
마나 고유의 색과 특성으로 혈연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방식인지라 부모 자식 모두 오러 발현자나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이능력자여야만 확인이 가능했으니까.
‘게다가 대신전 신관들 중에 뒷돈을 받고 검증을 조작해 주는 신관들도 있다고 했어.’
대신전은 썩어 문드러졌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타락해 버려서 발레리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나는 귀족의 사생아라는 이유로 구휼원이나 고아원에 버려져 후원금으로 겨우 생을 잇는 아이들이나 태어난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바득바득 우기며 양육비 부담을 거부하는 부모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모았다.
‘루카스의 마나와 내 마나가 같은 파동을 지녔다기에 호기심에 개발하긴 했는데, 딱히 사업적인 메리트를 느끼지 못해 묵혀 놨던 건데….’
그 발명품을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뭐, 진짜 아빠 딸이면 언니 동생 하면서 잘 지내면 되지 않을까.’
나는 뮤리엘이 데려올 아이가 공작가에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채 어깨를 으쓱했다.
“각하, 사뮈엘 대공 전하께서 공작성을 방문하셨습니다.”
정원 문턱에 선 코제트가 가스파르에게 공손히 읍한 후 나를 알은체하며 윙크한다.
‘사뮈엘 대공? 조카인 루카스 때문에 온 건가?’
나는 코제트의 말에 움후후 비열한 웃음이 흘러나오는 입가를 애써 손바닥으로 가렸다.
‘일이 잘 풀리려니까 또 이렇게 되네.’
안 그래도 찾아가려던 사람이 먼저 공작성에 찾아와 주다니.
“리니도 대공 전하 만날래요, 아빠.”
“그래.”
“가스파르, 레오노라를 너무 응석받이로 키우는 거 아닌가요?”
내 말에 아빠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까부터 불만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노려보던 뮤리엘이 툭 말을 던진다.
“아직 예법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아이가 단순히 황족을 만나고 싶어 한다고 데려가다뇨. 대공 전하께 실례이지 않겠어요?”
“전혀 실례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그대 앞가림이나 잘하게나, 레이디 뮤리엘.”
정원 밖에서 들려오는 노회한 목소리에 그녀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