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아스테르는 잘 보관해 둬라. 아직은 시기가 아니니까.”
셀레네라고 불리는 남자의 거미줄 같은 마나가 자카리와 내 몸을 칭칭 감기 시작한다.
‘내가 무슨 물건인 줄 아나?’
나를 보관하라는 남자의 말에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내 몸이 자신의 마나로 완전히 묶인 것을 확인한 셀레네가 자카리를 턱짓하며 교단의 병사들을 돌아봤으니까.
“검은 개는 사고로 보이도록 잘 처리해. 공작가가 물고 늘어지면 골치 아파질 수도 있을 테니 말이야.”
교단이 필요로 하는 나보다는 자카리가 훨씬 위험한 상황이었다.
‘아빠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만 해.’
나는 무슨 생각인지 제 그림자만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자카리 쪽으로 다급하게 몸을 틀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될락말락 한 애인데 얼마나 무서울까.’
셀레네의 거미줄 덕분에 팔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자카리의 손 정도는 잡을 수 있었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손등을 두드리며 위로하자 어이가 없다는 듯한 시선이 내 이마 위로 비스듬히 떨어진다.
“뮤리엘이 맡고 있던 제물(祭物)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레티샤를 말하는 걸까?’
나는 셀레네에게 공손하게 읍한 교단원을 힐끔하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헬리오스가 마력이 부족하다고 갖은 떼를 쓰고 있으니, 황실에 전달해.”
“존명.”
‘셀레네가 달을 의미했고, 헬리오스가 태양을 의미했으니 셀레네 같은 존재가 황실에 있다는 뜻이겠지.’
남자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던 나는 셀레네의 명령에 자카리를 끌고 가려는 병사를 향해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였다.
“자카리 오라버니에게 손대지 마!”
마나를 완전히 운용할 수는 없었지만, 기본적으로 언령을 쓸 수 있는 내 말에 병사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난다.
“금제구로 사지가 통제당한 주제에 누가 누구에게 명령하는 거지?”
나는 나를 비웃듯 이죽이며 걸어오는 셀레네를 향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죽어 버릴 거야.”
“…뭐?”
“죽어 버릴 거라고.”
“죽인다도 아니고 죽는다라, 우습군.”
내 협박에 셀레네가 여유롭게 조소했지만, 나는 그의 새파란 눈을 마주한 채 담담히 말을 이었다.
“당신, 살아 있는 내가 필요한 거잖아?”
“여물지도 않은 아스테르 주제에 어깃장 놓는 법만 배운 건가.”
“허세라고 확신할 수 있어?”
내 물음에 그제야 셀레네의 입이 딱 다물어진다.
‘역시 교단은 내 전생을 아는 거야.’
“혀 깨물고 죽을 수도 있어. 재갈을 물려서 끌고 가도 마찬가지야.”
나는 무표정한 표면 아래 느껴지는 셀레네의 당혹감에 이를 부득 갈았다.
“자결하는 방법 따위 스무 개 정도는 숙지하고 있으니까.”
미친개로 불리던 시절, 적에게 사로잡혔을 경우를 대비해 모든 요원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을 교육받았다.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지?
자카리의 소리 없는 원망이 들려오는 듯했지만, 나는 부러 그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셀레네를 향해 입을 벌렸다.
“정말 내가 아무런 대비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
물론 대비 따위 없었다.
게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더더욱 없다.
가스파르가 이제 막 돌아온 참이었고, 엄마가 살아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정말로 목숨을 끊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셀레네를 올려다보았다.
‘시간을 조금만 더 벌면 돼.’
히스가 단신으로 나를 추적할 수 있었던 곳이라면 공작성의 소울나이츠들이 뚫지 못할 리가 없었으니까.
‘그전까지는 그 누구도 자카리 손끝도 못 건드리게 할 거야.’
얼굴 몇 번 본 적 없는 나를, 가족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한 주제에 구하러 온 애다.
‘절대, 절대로 다치게 두지 않아.’
내 결연한 다짐을 느끼기라도 한 건지 셀레네가 입맛을 다시며 나와 자카리를 번갈아 바라본다.
“아스테르와 검은 개는 접점이 거의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희한하군.”
“네게 이해받고 싶은 생각 없어. 하지만 자카리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게 하면 바로 죽어 버릴 거야.”
으르렁거리는 내 말에 반응한 사람은 셀레네가 아니라 자카리였다.
여태 병사들이 제 몸에 손을 대든 말든 초연한 태도로 일관했던 그가 잘생긴 미간을 찌푸리며 내 어깨를 붙잡는다.
“이상한 말.”
“이상한 말 아니야, 오라버니. 나 진심이야.”
반 협박이긴 했지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내 말에 제 얄팍한 턱을 쓸어내린 셀레네가 어깨를 으쓱한다.
“좋다. 흑랑(黑狼)의 하룻강아지 따위 교단에 딱히 위협이 되는 존재도 아니니까. 둘 다 끌고 가.”
“존명.”
셀레네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병사들이 나와 자카리의 팔을 붙잡는다.
* * *
나와 자카리가 던져진 곳은 녹슨 쇠창살이 달빛에 반사되는 지하 감옥이었다.
“다친 곳은 없지?”
나는 바로 내 옆방에 구금된 자카리의 온전한 모습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내 물음에 입술을 질끈 깨문 자카리가 나를 노려보며 쇠창살을 움켜잡는다.
‘이젠 뒷말이 다 들리는 것 같다니까.’
“무슨 미친 짓을 한 거냐고요?”
나는 처음 마주하는 자카리의 명료한 눈빛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미친 짓이라면 오라버니도 했잖아요. 지원군도 없이 혼자 여길 쳐들어오면 어떡해요?”
“…그림자.”
“그림자로 내 도피를 도울 수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예요. 오라버니의 그림자를 이용해서 나만 도망치면, 오라버니는요?”
“…나는.”
“죽어도 괜찮다는 헛소리하지 말아요. 진짜 화낼 거야.”
나는 무슨 말을 더 하고 싶다는듯 입술을 달싹이는 자카리의 손등을 찰싹 내려쳤다.
“조금만 기다려요. 아빠, 실비, 그리고 에녹까지 모두 우리를 구하러 올 테니까.”
“어떻게….”
“그냥 믿어. 나 한 번만 믿어 봐요, 윽!”
말끝을 흐리는 자카리를 향해 눈을 부라리던 나는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가슴 통증에 쇠창살을 붙잡은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레오노라!”
놀란 자카리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고통을 감내하느라 그를 안심시켜 주지 못했다.
‘뭐지? 금제구 때문인가?’
아까부터 울렁이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이건 마나가 요동치고 있다는 신호였다.
나는 교단원들에게 들키지 않은 원작 책이 든 안쪽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빛이라도 새어 나오면 큰일인데.’
눈앞이 명멸하며 시야가 흐려질 찰나, 마치 다른 시공간에 휩쓸린 듯 자카리의 모습이 희미하게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허공에 번쩍 떠오른 원작 책의 표지에 새겨진 제목이 바뀌었다.
‘…아스테르(Astel)?’
오망성을 완성시킨 자수정이 흔들리며 책장이 휘리릭 넘어간다.
◈
< 외전: 심연의 별 >
“그럼 그동안 나를 이용만 한 거였어? 단순히 내 마력이 필요해서?”
“그게 아스테르의 운명이야. 날 원망할 필요 없어, 레오노라.”
레오노라의 절박한 목소리에 아이네스는 비죽 입꼬리를 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너는 에티모스 님의 부활을 위해 필요한 희생의 별, 나는 그분을 빛나게 할 태양이니까. 입장 차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레오노라의 마력을 전부 흡수한 덕분에 아이네스는 루에르병을 완치했을 뿐만 아니라 제국에서 가장 강한 마도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내게 마력을 빼앗긴 레오노라는 죽고 말겠지만, 그건 내 책임이 아닌걸.’
아이네스의 뻔뻔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레오노라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했어.”
“어머!”
레오노라의 말에 아이네스는 폭언이라도 들었다는 듯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천박한 사생아 공녀 따위가 고귀한 황녀인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네 문제야, 아스테르.”
◈
‘아이네스…. 이 싹바가지 없는 x!’
레오노라의 외전은 언제 읽어도 울화통이 터진다.
“정신 차려!”
누군가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킨 나는 왈칵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슥 닦았다.
다시금 시공간이 뒤틀렸는지 지하 감옥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레오노라!”
“나, 괜찮….”
놀란 자카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에게 손을 뻗는 순간, 멀리서 새어 나온 불빛이 강렬하게 그를 비춘다.
“공녀님과 공자님을 찾았습니다-!”
백랑(白狼)의 기사단장 로더릭의 익숙한 목소리가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을 밝히듯 크게 울린다.
“아빠 왔다, 리니. 더는 걱정하지 마라.”
나는 로더릭의 외침을 잇는 다정한 가스파르의 목소리에 꾹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렸다.
그러나 제대로 울기도 전에 쇠창살을 구부러뜨린 누군가가 나를 번쩍 안아 든다.
“아반니도 왔다.”
‘아반니? 뭐야, 그 유치한 호칭은.’
내가 어릴 때 루카스를 부를 때나 쓰던….
“…루카스?”
“그래.”
의식을 잃어 가면서도 그의 존재가 믿기지 않아 소매를 꾹 붙드는 내 손을 맞잡은 그가 내 등을 다독였다.
“그러니 잠시 쉬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