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내 욕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지은 세르주가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입을 연다.
“이제 와서 거칠게 말한다고 해도 소용없어. 네 마음 전부 들통났으니까.”
나는 세르주의 말에 동그랗게 눈을 뜬 채 바닥에서 주운 짱돌을 휙휙 허공에 날렸다.
“그래? 말로 해선 안 듣겠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어?”
“그런데 도대체 뭘로 이 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명색이 공녀인데 보검쯤은 내게 대령해야… 아악!”
콰직.
아까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내가 던진 짱돌을 얻어맞은 세르주의 머리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기 시작했다.
“악! 커억!”
나는 이에 그치지 않고 넘어진 세르주의 몸통 위에 올라가 소년의 뺨을 찰싹찰싹 내려쳤다.
“어린 놈이 어디서 못된 버릇을 배워서는! 싹이 아주 노랗네!”
나는 갑작스레 내게 얻어맞은 탓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세르주를 향해 눈을 흘긴 다음 손바닥을 탁탁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친척이라서 봐주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봐주겠어.’
흥, 하며 등을 돌리는 순간 코너 끝에서 우리를 훔쳐보고 있었는지 흠칫 놀라는 레티샤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
“아, 아, 안녕하세요! 레티샤예요!”
내가 자신을 발견했다는 것에 적지 않게 놀란 소녀가 순박한 눈을 크게 뜨며 허리를 꾸벅 숙인다.
“내가 네 오라버니를 조금 패 버렸어. 하지만 맞을 만했으니까 사과는 하지 않을 거야.”
“…네!”
내 당당한 말에 레티샤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인 다음 내게 폴짝 뛰어 다가섰다.
음?
나는 어린아이답게 짤막한 다리를 팔랑이며 뛰어오는 레티샤의 행동에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쟤 방금 세르주 밟고 오지 않았나?’
의구심에 미간을 좁히는 것도 잠시, 복도에서 일어난 소란을 눈치챈 둘째와 셋째가 허둥지둥 달려 나온다.
“리니! 괜찮아?”
“다친 곳은 없는 건가.”
실비와 에녹은 한눈에 봐도 생채기 한 점 없는 나와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세르주를 번갈아 보면서도 내 걱정부터 했다.
“응! 나 멀쩡해.”
“이놈이 무슨 짓을 했길래 때린 거야?”
내가 잘못했으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 에녹이 날카롭게 눈매를 추켜세우며 세르주를 노려본다.
“세르주가 하녀를 추행하기에 말렸더니, 자기 여자가 되고 싶어서 질투하는 거냐고 했어.”
나는 그리 달갑지 않은 공작가의 객에게 단단히 화가 난 듯한 오빠들에게 냉큼 세르주의 만행을 일러바쳤다.
“뭐? 이 미친 새끼가-!”
“근데 내가 혼내 줘서 이제 괜찮아!”
“어억!”
나는 발끈한 에녹을 말리듯 앞으로 나서며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세르주의 배를 꾸욱 밟았다.
“그래도 우리 친척이라니까 치료는 해 줘야 할 것 같아.”
“그렇다면 이 새끼, 아니, 이 친구는 내가 병동으로 부축해 주고 올게.”
내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인 에녹이 재빨리 세르주를 부축해 일으켜 세운다.
“필요 없, 커억!”
뚜각.
“나도 돕겠다.”
“괜찮, 억!”
뚜각뚜각.
“…부축해 주는 거 맞지?”
“그럼 그럼.”
나는 세르주의 몸에서 나는 기묘한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후작님이 이 일을 넘어가실 줄 알아?! 너, 두고 봐!”
양쪽에서 오빠들의 부축(?)을 받고 일어난 세르주가 제 팔다리를 아작 낸 에녹과 실비를 원망하는 대신, 나를 노려보며 씩씩 목소리를 높인다.
“두고 볼 필요 있어? 지금 봐. 난 너 못생겨서 두고 보기 싫어.”
나는 세르주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귀를 후벼 파며 괜히 레티샤에게 불똥이 튈까 소녀를 내 몸으로 가렸다.
“뭐? 누가 누구 보고 못생겼다는 거야! 네가 더- 아악!”
뚜가각.
악을 쓰던 세르주는 실비가 붙잡은 팔이 흐물거리게 되고 나서야 울먹이며 말소리를 죽였다.
“아, 맞다!”
나는 에녹과 실비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가는 세르주를 향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병동에 가는 김에 움베르토 제약에서 나온 약들 좀 둘러봐. 요즘 힐다가 탈모약 개발에 열을 올리는 중이거든.”
나는 끌려가는 와중에도 무슨 개소리냐며 표정을 풀지 않는 세르주를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너, 탈모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내, 내가 나이가 몇 살인데! 네 오라버니들과 차이도 안 난다고!”
“하지만 그 이마 모양… 익숙하거든. 헨리 이마가 딱 이랬지.”
“아가씨…?”
‘헨리는 또 언제 왔담.’
복도 구석에서 울망울망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헨리의 시선을 애써 피하는데 세르주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레티샤가 조심스레 내 손을 붙잡는다.
“응?”
“제가 지금 해드릴 수 있는 말이 이것뿐이에요.”
나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레티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주먹에 쥐여진 쪽지를 펼쳐 들었다.
부디 제 어머니를 조심하세요.
‘…이게 무슨 뜻이지.’
* * *
“그 미친년이 글쎄 저한테 짱돌을 던졌다니까요!”
뮤리엘은 이마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억울함을 호소하는 세르주의 어깨를 도닥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세르주, 그러니까 공작성에서는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했지 않니. 이곳은 이아론령이 아니라고.”
“그렇지만 그 비천한 계집이 제게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요!”
뮤리엘의 말에 울컥한 세르주가 목소리를 높이자, 그녀는 병동에 돌아다니는 고용인들의 눈치를 살피며 황급히 소년의 입을 틀어막았다.
“비천한 계집이라니! 말조심하지 못하겠니?”
“…어머니!!!”
울분에 찬 세르주의 목소리에 침대 주위에 커튼을 친 뮤리엘이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인다.
“레오노라는 ‘그분’을 위한 공물이 될 아이야. 비록 노엘처럼 천박한 계집의 몸을 빌어 태어난 아이지만, 영혼이 다르다고 말하지 않았니.”
달래는 듯한 뮤리엘의 다정한 말에 세르주는 그제야 진정하면서도 입술을 삐죽였다.
“그 왈가닥 계집이 신의 별인 ‘아스테르’라니, 전 믿기지 않아요.”
“영혼을 품은 그릇은 제 어미를 쏙 빼닮았으니까 그렇겠지. 하여간 제 잘난 맛에 사는 재수 없는 여자를 꼭 닮았으니.”
세르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뮤리엘은 젊은 시절의 노엘을 떠올리며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뭐? 공작의 귀환 연회가 열릴 테니 오셔도 좋을 거라고?’
“정말 닮았더구나. 아직 어린 계집이 벌써부터 공작가의 안주인이라도 된다는 양 설치는 꼴이.”
레오노라는 공작가의 영애님이었지만, 귀족의 딸들은 성인이 되자마자 출가외인이 되는 게 순서인지라 집안일에 관여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데도 제가 마치 꼬마 공작 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노엘은 후작 영애의 신분을 빌어 가스파르와 억지로 결혼까지 했으면서 안주인 노릇은 제대로 하지도 않고 바다에만 머물렀지. 제 맡은 임무를 수행하지 않으니 바다신도 노하신 거라고.”
“어머니랑은 전혀 다른 여자였다면서요. 공작 부인은 원래 어머니의 자리였다고.”
“그래! 노엘이 빼앗은 거야! 가스파르의 진정한 사랑은 나였으니까.”
뮤리엘은 공석인 공작 부인 자리를 떠올리며 이를 부득 갈다가도 심경을 다스리기 위해 깊게 심호흡했다.
‘뭐, 이미 죽은 여자를 떠올려서 화내 봤자 내 손해지.’
레오노라를 그분 앞에 대령하기만 하면 모든 게 순리대로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 * *
“공녀.”
레티샤의 쪽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내게 다가온 히스가 레티샤가 사라진 방향을 가리키며 입을 연다.
“저 아이에게서 나와 비슷한 냄새가 납니다.”
“응?”
킁킁.
나는 히스의 말에 나보다 조금 큰 그의 목에 얼굴을 쿵 받으며 코를 벌름거렸다.
“!”
“무슨 냄새? 히스, 아무 냄새도 안 나.”
놀란 히스가 바짝 굳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떼며 동그랗게 눈을 떴다.
“아, 레몬이나 민트향 같은 건 조금 난다.”
내 말에 내 코가 박혔던 곳을 지그시 누른 히스가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인다.
“…그런 게 아니라 저처럼 인간이 아닌 괴물인 것 같다는 말입니다.”
나는 히스의 말에 머리색을 제외하면 뮤리엘을 전혀 닮지 않은 레티샤를 떠올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개조된 것 같다는 말이면 나도 느끼고 있었어.”
‘아무래도 조사는 해 봐야겠지.’
나는 오감이 발달한 편이었고, 레티샤에게서는 구휼원 아이들과 비슷한 마력이 느껴졌다.
‘브리넨 후작이 키운 구휼원 아이들처럼 누군가 레티샤의 마력을 인위적으로 조작한 느낌이 들긴 했지.’
“하지만 히스, 그런 나쁜 말은 하지 마. 너 인간 맞아.”
나는 지금은 부모의 품을 찾았거나, 입양되었거나, 성인이 되어 제 한 몫을 다하며 살고 있는 구휼원 아이들을 떠올리며 히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처럼 순하고 귀여운 괴물이 어디 있다고.”
“공녀가 더….”
“응?”
“아닙니다.”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입술만 달싹이던 히스가 고개를 내저었지만, 소년은 끝까지 내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히스는 머리가 포슬포슬해서 쓰다듬을 때 느낌이 좋아.”
꼭 잘 만든 곰인형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빙그레 웃은 나는 복도 끝에서 느릿느릿, 반쯤 눈을 감은 채 걸어오는 자카리를 발견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
“오라버니! 훈련에서 돌아오시는 길이셨나 봐요.”
“…머리.”
“네? 머리요?”
내 인사에 뜬금없이 한마디를 툭 내뱉은 자카리가 나를 그대로 스쳐 지나간다.
‘방금은 무슨 말 한 건지 전혀 못 알아먹겠네.’
왜 매번 앞뒤를 다 잘라 말하는 걸까.
‘근데 방금 자기 머리를 내게 비스듬히 숙이는 것 같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