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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3화 (143/486)

제143화

“마님의 사촌동생이신 뮤리엘 이아론 님과 자제분들이시라는데, 면구하게도 제가 그분들의 신분을 보증할 수 없어 각하의 확인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공손하게 읍하며 코제트가 하는 말에 가스파르가 턱을 까딱인다.

“그래. 내가 레이디 뮤리엘의 얼굴을 기억하니 확인하도록 하지.”

중정이 소란스러운 것을 눈치챘는지 한달음에 달려 나온 헨리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돌아오셨군요, 각하!”

그를 위시한 행정관들은 귀환한 가주에게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제국의 가장 깊은 그림자를 뵙습니다.”

“제국의 가장 깊은 그림자를 뵙습니다. 무사히 영지로 귀환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래. 다들 오랜만에 보는군.”

그들이 언급하는 ‘귀환’은 황도에서 돌아왔음을 의미했지만, 가스파르는 퍽 감회가 새롭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얼굴들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다정한 가스파르의 말에 당황한 헨리가 무례도 잊고 인상을 찌푸린다.

“…예?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장장 5년간 루카스를 보좌하며 칭찬 한 번 들어 보지 못한 헨리였다.

나는 가스파르의 몸을 루카스가 차지했을 때처럼 의심쩍은 시선을 보내 오는 헨리 앞에 허둥지둥 나서며 아빠를 돌아보았다.

‘루카스는 그런 말 안 해!’

“아, 아빠! 일단 우리 집무실로 가요!”

“그러자꾸나.”

나는 별거 아닌 대답에도 다감함이 묻어 나오는 가스파르의 팔을 붙든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쾅!

달칵.

이제는 아주 익숙한-거의 내가 사용했으니- 가주의 집무실에 당도한 나는 가스파르를 안으로 밀어 넣자마자 문부터 걸어잠갔다.

“아빠, 이제 우리 대화 좀 해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음?”

내 물음에 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휘둥그레 눈을 뜬다.

나는 순진한 아빠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어떻게 돌아오실 수 있었느냐고 묻는 거예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은근슬쩍 내 시선을 피하는 게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느낌이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눈을 가늘이며 아빠에게 천천히 다가가자 그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난다.

“정말 모르겠다.”

“아빠, 리니한테 거짓말하지 마세요.”

결국 벽까지 가스파르를 몰아붙인 나는 그의 양옆으로 팔을 짚으며 후, 앞머리를 불었다.

“응? 좋게 좋게 말할 때 털어놓으세요.”

‘우리 쉽게 가자~?’

미친개였던 시절의 카리스마까지 뿜뿜했는데도 가스파르의 다정하지만 차분한 얼굴에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털어놓을 게 없다, 리니.”

‘작전 변경이다.’

“…리니가 얼마나 아빠를 보고 싶어 했는데!”

결국 나는 태도를 바꾸고 볼을 잔뜩 부풀렸다.

“아빠가 너무 너-무 보고 싶어서 마음이 다 닳아 없어지는 줄 알았어요.”

내가 가파르게 솟는 작은 가슴팍까지 내밀며하는 말에 가스파르의 눈이 크게 흔들린다.

“리니, 이러다 죽는 줄 알았어!”

“…미안하다. 내가 못나서 네 곁을 지키지 못했구나.”

‘옳거니, 걸려들었고.’

“그런데 그런 리니한테 거짓말하실 거예요?”

나는 큼지막한 두 눈을 느릿느릿 깜빡이며 가스파르를 올려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내젓는다.

“거짓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루카스 황자와 약조한 것이 있어.”

“루카스랑요?”

내가 아빠의 말에 미간을 모으자 그가 내 주름 잡힌 이마를 꾹 누르며 말을 잇는다.

“그래. 해서 네게 모든 걸 다 말해 줄 수는 없구나.”

“도대체 무슨 약속이길래요?”

“어찌 됐든 나는 그와 교황 성하의 도움으로 몸을 되찾을 수 있었다.”

가스파르는 내 시선을 묘하게 피하며 나를 번쩍 안아들었다.

“다행인 일이지.”

“…아빠. 그럼 루카스는 어떻게 됐는데요?”

나는 사실 가스파르가 돌아온 순간부터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천천히 입에 담았다.

‘설마 잘못된 건 아니겠지?’

“…그의 육체를 되찾았을 거다.”

“후우, 다행이다.”

나는 가스파르의 대답에 안도하며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럼 루카스가 곧 공작성에 찾아올 수도 있을 거예요. 그레고르와 대적하려면 공작가의 도움이 필요할 테니까요.”

나는 5년 전, 루카스와 했던 약속을 떠올리며 결연하게 눈을 빛냈다.

“그렇게 되면 최선을 다해서 그를 도와줘야 해요, 아빠. 내가 그러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래, 그러마.”

내가 왠지 모르게 미적지근한 가스파르의 반응에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는 순간, 누군가가 집무실 문을 또도독 다급하게 두드린다.

“아가씨! 룰루예요!”

“응, 들어와.”

“목욕하실 시간이라 모시러 왔어요!”

‘벌써 목욕을 시킨다고? 이 시간에?’

아직 낮인데.

초저녁부터 나를 재울 게 아니라면 지금 목욕하는 건 스케줄에 맞지 않았다.

“…아가씨가 이렇게나 오랜만에 공작성에 오셨는데, 저희는 아가씨를 씻겨 드리지도 못하나요?”

의구심에 고개를 갸웃하는 나를 빤히 바라보던 룰루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입술을 짓씹는다.

“내가 그냥 죽어야지.”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랄라는 복도에 주저앉아 통곡하듯 바닥을 탕탕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가씨를 씻겨 드리지도 못하는 이 몹쓸 손, 확 잘라 버려야지!”

아니, 손 자를 이유도 참 많다.

“씨, 씻을게!”

랄라의 말을 전부 다 믿는 건 아니지만, 그녀는 다혈질이라 손을 자르진 않더라도 정말로 단도를 꺼내 들 확률이 있었다.

“정말요?!”

나는 내 말에 단박에 화색이 도는 룰루랄라의 얼굴을 돌아보며 엉거주춤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안 그래도 몸이 조금 간지러웠어.”

“네! 뽀득뽀득 씻겨 드릴게요, 아가씨!”

“저는 보송보송 말려 드릴 거예요!”

그러더니 나를 서로 안겠다고 아웅다웅한다.

“두 사람 손 잡고 걸어갈래.”

“앗, 그럴까요?”

“우리 아가씨 손은 어쩜 이렇게 보들보들~ 말랑말랑~ 하실까요?”

나는 양손으로 룰루랄라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에효. 하녀들 달래 주는 것도 일이야, 일.’

* * *

수도 저택의 시설이 낙후된 건 절대 아니었지만, 역시 본성만은 못했다.

‘공작성에서 목욕하는 것도 오랜만이네.’

아빠가 나를 황실에게서 보호하기 위해 숨겨 둔 본성의 별관은 자르파라 상단의 자금력으로 내 개인 건물로 재탄생했는데, 리모델링을 맡은 자르파라는 황금이라면 죽고 못 사는 인간이었다.

‘눈부셔….’

내가 빛과 태양이니 나를 담는 그릇도 태양과 같아야 한다나.

나는 바닥을 수놓은 화려한 흑자개 무늬와 작은 수영장만 한 욕조의 테두리를 두르는 황금에 혀를 내둘렀다.

“아가씨가 오늘 돌아온다고 하셔서, 원래도 관리하고 있기는 했지만 룰루와 제가 다시 직접 청소했어요.”

나는 칭찬을 받기 위해 안달 난 강아지처럼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랄라에게 손을 뻗어 그녀의 부스스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욕조가 넓어서 꽤 힘들었을 텐데, 고생했어.”

“아이, 머리 쓰다듬는 것 말고요.”

“나 이제 뽀뽀할 나이 아니야.”

“에잇, 아가씨 뽀뽀도 못 받는 이 몹쓸 뺨! 그냥 확 떼 버려-!”

쪽.

쪽쪽.

방년 8세, 이제 곧 9살이 되는 나는 자해 위험이 있는 하녀 덕분에 수치도 잊고 뽀뽀 세례를 날려야만 했다.

“헤헤. 아가씨, 얼른 들어가세요. 아가씨가 좋아하시는 라일락 오일을 풀어 놨어요.”

랄라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녀에게 달랑 들려 욕조 안에 안착했다.

‘아, 따뜻해.’

딱히 목욕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막상 장미 꽃잎이 둥둥 떠 있는 뜨끈뜨끈한 욕조에 몸을 담그자 기분이 좋아지긴 했다.

‘아아, 향기로워….’

이런 게 바로 귀족 영애의 삶이지.

황도에서는 쁘띠 플뢰르 참가하랴 아이네스 견제하랴 일밖에 안 해서 쉴 시간도 없었다.

나는 몽글몽글하게 올라온 거품을 손가락 끝으로 푹 누르며 헤죽 웃었다.

“밀크티 드실래요, 아가씨?”

“고마워, 랄라.”

“그리고 아가씨 좋아하시던 아기 오리, 아기 돌고래, 그리고 작은 함선도 가져왔어요.”

“나 이제 이런 거 안 가지고….”

“흐윽!”

나는 신이 나서 장난감을 잔뜩 안고 들어서던 랄라의 얼굴이 새까맣게 굳는 것을 확인하고 어쩔 수 없이 손뼉을 쳤다.

“놀지 않지. 와아~! 재밌겠다아!”

“역시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하녀들이 나를 돌보는 게 아니라, 내가 룰루랄라를 돌보는 느낌이었다.

‘음. 그래도 막상 가지고 노니까 손이 심심하진 않네.’

나는 장난감 주제에 새까만 흑요석이 박힌 아기 오리를 만지작거리다 실제 함선을 그대로 본떠 만든 정교한 함선 장난감을 힐끔했다.

‘…노엘, 이제 노엘을 찾을 때가 됐어.’

아빠를 되찾았으니까 이제 엄마 차례였다.

‘그러려면 루카스 도움이 필요한데 몸 찾았다고 바로 연락을 끊어 버린 거야?’

나는 루카스의 잘생긴 얼굴-어차피 가스파르의 찡그린 표정이었지만-을 떠올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쳇.”

‘짐을 풀자마자 루카스의 행방부터 알아봐야지.’

몸 찾으면 제일 먼저 나를 찾아올 줄 알았는데, 연락도 없는 건 예상 밖이었다.

쪼-금.

아주 쪼금 서운하지만 어쩔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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