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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134화 (134/486)

제134화

머지않아 황도 외곽에 몰려 있는 빈민촌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한 전염병은 다름 아닌 천연두였다.

‘이 세계에서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병이긴 하지만, 완벽한 치료제 같은 게 있을 리 없지.’

흑사병처럼 중세유럽을 강타했던 전염병에 비해 치사율은 높지 않았지만, 천연두는 합병증으로 폐렴이 올 수 있는데다 발진까지 일어나 저주처럼 여겨져 이 세계 의사들은 치료를 꺼리는 병이었다.

‘게다가 빈민들이 신관이나 치료사를 불러 병을 치료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자르파라, 힐다가 개발한 약은 제대로 옮겨 놨지?”

“항구 근처에 있는 제 1창고로도 모자라 상단의 제 2창고를 가득 채울 만큼 준비해 놨습니다, 빛이시여.”

내 물음에 자르파라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내 손등에 입을 맞춘다.

“나의 태양께서는 역시 선구안이 있으신 겁니까? 어찌 황도에 천연두가 유행할 것을 예상하셨는지?”

“…다 방법이 있어, 자르파라.”

내게 아이네스의 흉계를 속속들이 읊어 주는 원작책이 있다는 사실은 차마 말해 줄 수 없어서 나는 두루뭉실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힐다의 움베르토 제약은 천연두 치료제 개발에 성공한 전적이 있으니까 효과는 확실할 거야.’

우연찮게 힐다를 내가 먼저 발견해 그녀의 움베르토 제약 설립을 돕게 되었지만, 본디 움베르토 제약은 주인공인 아이네스가 후원하는 사업 중 하나였다.

원작에서는 천연두가 단순히 재앙처럼 황도에 유행한 것으로 묘사되었고, 아이네스가 때마침 힐다의 움베르토 제약에 투자해 제국민 구호에 나서는 것으로 나온다.

‘그 에피소드가 제국민들의 충성심을 얻기 위한 주인공의 자작극이었다니….’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원작에서 천연두로 목숨을 잃은 황도의 제국민들은 결코 적은 수는 아니었다.

천연두가 가벼운 유행으로 끝났다면 폭군의 딸로 지탄받던 아이네스가 단기간에 온 제국민의 사랑받는 황녀님으로 급부상하진 못했을 테니까.

“좋아.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이라면 신분을 가리지 말고 무료로 약을 배급해 줘.”

“나의 태양께서는 어찌 이리 마음씨가 고우신지….”

나는 감동해 눈시울까지 붉히며 코를 훌쩍이는 자르파라의 반응에 머쓱한 뒤통수를 긁적였다.

‘다 꿍꿍이가 있어서 공짜로 약을 나눠 주는 거지만, 굳이 자르파라에게 설명해 줄 필요는 없겠지.’

“그레고르가 출입을 봉쇄한 빈민촌이 소르베 지구였지?”

“맞습니다, 태양이시여.”

“그럼 소르베 약 배급은 내가 직접 할게.”

“위험하실 텐데요. 소르베 사람들 대부분 천연두에 걸린 데다 황실이 치료제도 보급하지 않고 마을 전체를 봉쇄해 버려 매우 난폭해진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가겠다는 거야. 움베르토 제약의 직원들은 전부 일반인이잖아.”

책상 서랍을 뒤적여 작은 리볼버를 꺼낸 나는 마탄이 잘 장착된 것을 확인한 후 허벅지 장식에 총을 끼워 넣었다.

“자르사워 용병을 호위로 붙여 드릴까요?”

“아니, 호위를 잔뜩 달고 다니면 눈길만 끌걸. 나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해.”

나는 자르파라의 제안에 설레설레 고개를 저은 다음 중정을 지나 저택을 빠져나오기 위해 빠르게 걸음을 움직였다.

노란색 배낭에 든 천연두 치료제가 찰랑찰랑 흔들리는 맑은 소리에 내가 콧노래를 흥얼거릴 무렵, 현관에 막 발을 디딘 내 앞을 누군가가 막아선다.

“?”

나는 내 앞에 길게 뻗은 기사의 팔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틀었다.

“황실 근위병이 공작가의 저택에는 무슨 일이죠?”

나와 눈이 마주친 황실 근위병이 짐짓 엄한 얼굴로 입을 연다.

“황제 폐하께서 하차니아 공작가 전원의 가택 연금령을 내리셨습니다. 자카리 하차니아의 조사가 끝날 때까지 공녀님은 저택을 벗어나실 수 없습니다.”

“그래요? 아무런 언질을 받지 못해 미처 몰랐네요.”

“네, 그러니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 헉!”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모르련다.

나는 내 앞을 막아선 근위병의 투구를 붙잡아 뒤로 훅 꺾은 다음 손날로 그의 목젖을 내려쳤다.

다행히 이제 막 명령을 하사받았는지 수도 저택의 현관을 지키고 선 병사는 내가 기절시킨 남자 한 명뿐이었다.

“목격자 없으면 완전범죄.”

나는 이제 내 모토가 되어 버린 말을 작게 중얼거리며 기절한 근위병을 질질 끌어 수풀 사이로 던져 버렸다.

‘감히 미친개의 앞을 가로막은 대가다, 이 자식아.’

잔디에 가려진 병사의 몸을 힐긋한 내가 손을 탁탁 털며 다시금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담벼락의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인영이 느닷없이 튀어나와 느릿느릿 입을 움직인다.

“어디….”

말을 제대로 끝내는 법이 없는 우리집 장남이었다.

“어디 가냐고요?”

“가….”

“…….”

“는…거….”

나는 내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부 파악했음에도 기어코 말을 잇는 자카리를 뚱하니 노려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지….”

“오라버니가 황도로 몰고 온 고로나가 병을 옮기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치료제를 나눠 주러 가는 길이에요.”

“그렇…군….”

내 설명에 고개를 까딱한 자카리는 저택으로 도로 들어가는 대신 나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 따라오려고요?”

자카리는 의아한 내 물음에 대답하진 않았지만, 울화통이 터질 만큼 느린 말과 달리 다리는 느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를 저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뭐, 호위 대신 데려가는 건 나쁘지 않지.’

사람이 아니라 나무늘보에 가까워 보였지만 자카리는 무려 흑랑을 이끄는 강한 소울나이츠였으니까.

“따라오는 건 좋은데, 대신 이거 써요.”

말만 느린 건지 자카리가 내가 건넨 회색 후드를 빠르게 걸쳐 입는다.

깊게 후드를 눌러쓴 채 자카리의 손을 잡은 나는 그레고르가 전염병을 퍼뜨릴 위험성이 높다며 봉쇄시켜 버린 소르베 지구의 담벼락을 주먹으로 세 번 두드렸다.

“오셨습니까!”

이미 자르파라 상단을 통해 힐다의 약을 몇 번이나 공급받은 소르베 지구의 촌장이 임시로 쳐 둔 울타리를 들어 올리며 나를 반긴다.

“전에 주신 약효가 아주 좋았습니다. 사람들의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어요.”

“다행이네요. 그래도 천연두는 전염되는 속도가 빠르니까 안심하긴 일러요, 밀드레드.”

내 말에 소르베 지구를 관리하는 촌장, 아니, 정확히는 촌장의 딸이었던 밀드레드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공녀님께서 공짜로 주는 약이라 믿을 수 없다고 입을 놀리는 놈들도 없어졌습니다.”

소르베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인구 밀도가 높아 전염병이 급격히 빠르게 퍼지는 지역이었고, 내가 나눠 주는 약을 믿을 수 없다며 거부한 사람 대부분이 죽고 말았다.

‘촌장이었던 밀드레드의 아버지를 포함해서 말이지.’

“이제 다들 일간특급인지 뭔지, 그 쓰레기 가십지를 전부 불태워 버리자고 난리예요.”

나는 하차니아가 역모를 꿈꿨기 때문에 천연두 따위의 전염병이 황도에 돌기 시작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간특급의 기사를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고르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소르베를 아예 봉쇄해 버려서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사람들이 이렇게 치료받고 있다는 걸 들켜 버렸을걸.’

“오늘자 기사도 봤어?”

“네. 일간특급에서 소르베가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유가 우리 지구가 가난해서 그렇다고 하더군요. 신전에 헌금을 바치지 못해 전염병이 가장 심하게 도는 거라고.”

단순히 빈민촌이라 만만하게 여겨 제일 먼저 병을 퍼뜨렸을 뿐이면서.

나는 밀드레드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배낭을 풀어헤쳤다.

“밀드레드 말대로 쓰레기 가십지에 불과하니까 그런 말 신경 쓸 필요 없어.”

나는 배낭에서 꺼낸 치료제를 밀드레드에게 건네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자카리에게 턱짓했다.

“뭐하는 거예요?”

“흔…적….”

“아, 고로나의 흔적을 찾고 있어요?”

그래도 몇 번 대화를 나눠 봤다고 나는 이제 대강 자카리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바닥에 손을 뻗은 채 마물의 흔적을 추적하는 자카리를 빤히 지켜보는데 차분히 오러를 움직이던 그가 느릿느릿 나를 돌아본다.

“왜… 돕….”

“하차니아와는 상관도 없는 소르베 사람들을 어째서 돕냐고요?”

“…….”

“돕지 않으면 오라버니가 고로나를 몰고 와 황도에 전염병을 유행시켰다고 누명을 쓸 테니까요. 오라버니가 범죄자가 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잖아요.”

게다가 전염병은 초기 대응이 아주 중요했으니 소르베에서의 확산을 막아야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

내 말에 속내를 알 수 없는 새까만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자카리의 단정한 입술이 벌어진다.

“…가문은 나를 버렸다.”

자카리가 말하는 모습이라면 이미 몇 번이나 봤지만, 그가 말을 제대로 잇는 걸 보는 건 처음인지라 나는 그의 입술이 정상적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다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제 와서 네가 나를 돕는다고 달라질 건 없다. 전장이나 감옥이나 내게는 같은 의미니.”

아니, 왜 이런 못된 말을 할 때는 갑자기 청산유수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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