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130화 (130/486)

제130화

“단장님의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십시오!”

내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응접실에 들어온 소년은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목뒤로 올라오는 기사 특유의 단정한 머리는 이 세계 ‘엑스트라’들의 공통점인 갈색 머리였지만 여름 햇살이 깃든 듯 찬란한 녹안이 눈에 띈다.

“위험합니다!”

“위험… 하다고요?”

나는 나를 알아보기는커녕 정신도 차리지 못하는 자카리와 그런 그에게 황급하게 다가와 뺨을 감싸 안는 소년을 번갈아 바라보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단장, 괜찮으십니까?”

“…….”

다급한 소년의 물음에도 곤히 잠이 든 자카리는 묵묵부답이었다.

“괜찮으시군요. 다행입니다.”

‘도대체 뭘 보고 괜찮다는 거야?’

자카리는 입 한 번 벙긋하지 않았지만, 그의 안색을 쭉 살핀 소년이 안도한 듯 한숨을 푹 내쉬며 나를 돌아본다.

“방금 전에는 소리를 질러서 죄송합니다.”

소년은 기사치고 고운 뺨을 긁으며 멋쩍은 입을 열었다.

“일반인은 단장과 접촉하면 위험해질 수 있어서.”

“무슨 위험을 말하는 건가요?”

“쉐도우나이츠의 그림자 오러가 몸을 잠식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소년의 설명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림자 오러 때문에 접촉하는 게 위험할 수 있다고?’

오러를 다루는 소울나이츠의 특징이라면 에녹을 훈련시키기 위해 원작은 물론 공작가의 도서관을 탈탈 털어 공부한 나였다.

“자카리는 흑랑을 이끌 정도로 무예가 뛰어난 기사인데, 제 오러조차 컨트롤하지 못한다는 건가요?”

제어하지 못하는 오러는 당연히 누구에게나 위험했지만, 그런 오러를 컨트롤할 수 있기 때문에 소울나이츠들은 평민이어도 작위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인정을 받는 법이었다.

“너, 너무 강력한 그림자라 아무리 단장이 억제해도 새어 나갈 때가 있습니다. 단장의 능력부족이 아니라요.”

의아한 내 얼굴에 소년이 자카리를 대신해 변명하듯 더듬더듬 대답한 뒤 고개를 숙인다.

“하차니아의 공녀님이시죠.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흑랑의 부단장, 우르시 슐레만입니다.”

“슐레만 자작가의 사람이었군요.”

슐레만이라면 하차니아의 봉신 가문 중 하나였다.

“기억나요. 막내 아드님이 흑랑에 입단했다고 들었어요. 우르시 알렌 슐레만.”

“…네. 어찌 공녀님께서 제 미들네임까지 기억하십니까?”

소년, 우르시는 내가 제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는 것에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하차니아를 위해 헌신하는 봉신 가문의 가주들과 직계의 이름을 외우는 건 공녀로서 당연히 해야 마땅한 일인걸요.”

나는 그의 물음에 말과 달리 도도하게 콧대를 세우며 어깨를 으쓱했다.

‘공작 부인 들여와라, 사생아인 나를 내쫓아라 난리난리를 치는 가신들을 잠재우려면 힘 있는 봉신 가문의 가주들에게 잘 보여야만 했으니까, 뭐.’

“우와! 대단하십니다. 단장은 제 이름을 외우는 데만 3년이 넘게 걸리셨는데요.”

“…그래요?”

“네. 아마 성은 아직도 모르실 겁니다.”

속내를 숨긴 나는 순수하게 감탄하는 우르시의 말에 그가 조금 짠하게 느껴져서 턱을 긁었다.

“자카리, 괜찮은 거 맞아요? 건강에 이상은 없는 건가요?”

명색이 단장이라는 인간이 제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인 부단장의 성조차 기억하지 못하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었다니.

나는 응접실 소파가 막사 안에 마련된 침대라도 된다는 양 평온한 얼굴로 자고 있는 자카리를 턱짓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역대 흑랑의 기사들 중 단장만큼 깊은 그림자를 지닌 기사가 없어 사실 상태를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단장께서 괜찮다하시니 괜찮으시구나 납득할 따름입니다.”

쉐도우나이츠는 소울나이츠 중에서도 소수 정예로 움직일 수밖에 없을 만큼 수가 많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자카리의 상태를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가스파르가 유일하다는 말이네.’

신전에 다시 한번 기별을 넣어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우르시가 자신을 들쳐 업어도 절대 잠에서 깨지 않는 자카리를 흘깃하며 입을 열었다.

“흑랑의 기사들이 절대 더럽혀지지 않는 순백의 성을 공격한 이유를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혹시라도 자카리에게 정말로 반역의 의지가 있었을까 싶어 묻는 내 말에 우르시가 서슴없이 대답한다.

“흑랑이 대륙 서쪽에서부터 추격해 온 마물이 성벽 안으로 숨어들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둠을 다루는 쉐도우나이츠로 이루어진 흑랑은 대개 마물이 국경선을 넘어오는 걸 방어하는 임무에 차출되었으니 우르시의 말에는 신빙성이 있었다.

“어떤 마물이에요?”

“고로나라는 마물로 그림자를 타고 움직이는데, 역병을 몰고 다니는 재앙 같은 놈입니다.”

‘원작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마물 같은데.’

나는 우르시의 대답에 비스듬히 고개를 꺾으며 의아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순백의 성은 신관과 주술사, 마법사들의 강력한 결계로 지켜지고 있는데 어떻게 마물이 성벽에 숨어들었을까요?”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마치 제집에 돌아가는 양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제집에 돌아가는 것 같았다고?’

나는 누군가의 꿍꿍이가 느껴지는 듯한 우르시의 설명에 콧잔등을 움찔했다.

‘원작의 아이네스는 마물을 길들일 수 있는 테이머(tamer)이기도 했었지.’

고로나는 그녀가 원작에서 길들였다고 언급된 마물은 아니었지만, 의구심이 솟구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설마. 그래도 황녀인데 황도에 역병을 몰고 올 마물을 불러들였으려고.’

“하차니아가 역모죄를 뒤집어쓰지 않으려면 고로나의 정체부터 소상히 알아봐야겠네요.”

불길한 생각에 고개를 저으며 막 응접실을 나서려는 우르시에게 말을 꺼내자, 그가 잊고 있었다는 듯 이마를 탁 치며 제 품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들었다.

“아, 예! 저희가 황가에 올렸던 보고서들인데 공녀님께 참고가 될까요?”

“당연하죠. 그런데 이미 황가에 고로나에 대해 보고를 했었단 말이에요?”

황군 바로 아래에서 일하는 치안대장 브리우스는 고로나는커녕 흑랑이 왜 황도로 올라왔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는데.

내 의아한 물음에 우르시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입을 연다.

“네. 아마 제국 서부를 지키는 변경백 해리 클레븐 경께서 흑랑이 성벽을 공격한 이유에 대해 황실에 설명해 주실 겁니다. 경의 부대가 저희와 함께 고로나를 궁지로 몰았으니까요.”

“클레븐 경이라면 서부의 사자라고 불리우는 명예 높은 변경백이잖아요?”

나는 우르시의 말에 안도하며 생긋 웃었다.

“다행히 일이 쉽게 풀리겠어요!”

‘클레븐 같은 사람이 보증을 서준다면 마물에게서 수도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성벽을 공격했다는 흑랑의 주장에도 신빙성이 생기겠지.’

“이렇게 서류까지 꼼꼼하게 정리해 줘서 고마워요, 슐레만 경. 자카리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내 말에 방을 막 나서려던 우르시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선 채 나를 돌아본다.

“…왜 울려고 그래요?”

나는 울망울망해진 그의 녹안에 당황해 더듬더듬 입을 벌렸다.

“내가 무슨 말실수했어요?”

“절대 아닙니다. 그저 누가 제게 임무를 다했다고 고맙다는 말을 해 주는 게 처음이라….”

크흡, 훌쩍훌쩍.

덩치만 커다랬지 어린 티가 나는 우르시가 자카리를 들지 않은 팔로 제 붉어진 눈시울을 가리며 어깨를 들썩인다.

‘…자카리, 제 밑의 기사들을 도대체 어떻게 다루는 거야.’

한숨을 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우는 우르시를 배웅한 나는 곧바로 집무실에 올라가 헨리(가스파르의 부관)를 찾았다.

‘마침 헨리가 수도 저택에 와 있어서 다행이지.’

헨리는 여러 행정 분야에서 특출한 재능을 보이는 인재 중의 인재였지만, 보고서 쓰기의 달인이기도 했으니까.

“고로나라는 마물 관련 서류를 정리해 클레븐 변경백의 보증서와 함께 황실에 보고해 줘.”

나는 고로나 관련 서류를 헨리에게 넘기며 짐짓 굳은 얼굴로 그의 손을 붙들었다.

“헨리 마사드, 공작가 장남의 미래가 헨리 손에 달려 있어.”

“듣기 무척 부담스러운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네요, 아가씨.”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가 자신을 인정해 준 게 기분이 좋은지 헨리의 입꼬리는 배실 올라간 상태였다.

“아, 고로나를 막지 못하면 수도에 사는 제국민들이 큰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경고도 보고서에 포함시키는 게 좋겠어.”

우르시가 정리한 서류에 따르면 고로나라는 마물은 일반 몬스터처럼 직접적으로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마물이 아니었다.

‘대신 역병을 퍼뜨려 황도 전체에 큰 데미지를 입힐 거야.’

아무리 그레고르가 폭군이라지만 역병을 부러 방치할 만큼 멍청하진 않을 테니까.

‘변경백의 보증도 있겠다, 당연히 흑랑에게 죄를 묻지 않고 황군과 치안대를 도와 고로나 박멸에 힘써 달라는 대답이 돌아오겠지.’

아, 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어쩌죠, 공녀님.”

“이게 정말 황도 치안대장 브리우스가 보낸 답신이야? 우리가 보낸 보고서는 물론 변경백의 보증조차도 믿을 수 없다고 박박 우겨 대는 이 무식한 편지가?”

“네….”

나는 나를 볼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수그린 헨리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아 좍좍 찢어 버렸다.

‘황실에서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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