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후. 투구부터 벗겨라!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안 들리니, 원.”
자카리가 답답했는지 브라우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명령을 내린다.
“네, 대장!”
병사들에 의해 투구가 벗겨진 자카리의 뽀얀 얼굴이 그제야 투명한 햇살 아래 드러났다.
“…여러분! 속보입니다!”
상황을 멀리서 중계만 하던 발렌타인사의 기자가 화들짝 놀라 마경을 그쪽으로 가까이 움직인다.
“반란군 수괴 자카리 카르스텐 하차니아는 엄청 잘생겼습니다…!!!”
‘그게 정말 속보감인가…?’
나는 사심이 가득한 기자의 중계에 미간을 좁히며 투구를 벗은 자카리의 얼굴을 힐끔했다.
‘가스파르랑 많이 닮았네.’
자카리는 실베스테르나 에녹보다도 단정한 가스파르를 쏙 빼닮은 미모의 소유자였다.
‘아빠의 검은 눈은 조금 붉은기가 도는데 얘는 완전히 새까만 색이라는 것만 빼면 말이지.’
목끝에 닿지 않을 정도로 짧게 자른 단정한 검은 머리칼이나 조금 처진 듯한 눈꼬리가 ‘루카스가 차지한 가스파르’가 아닌 진짜 가스파르를 연상시켰다.
‘키는 가스파르보다도 큰 것 같고.’
이제 곧 열여덟 생일을 맞는 자카리는 아직도 솜털이 보송보송한 소년이었지만, 너른 어깨나 건장한 체구는 성인 기사를 뛰어넘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애였잖아?”
그러나 아무리 컸어도 애는 애였다. 드러난 자카리의 얼굴에 브라우스가 기가 막히다는 듯 이마를 짚는다.
“하지만 카르스텐 경이라도, 아니, 하차니아의 어린 공자라고 할지라도 황성에 공격을 감행한 건 반역죄에 해당됩니다. 단순한 경범죄처럼 처벌을 하차니아에 넘길 수는 없습니다.”
“그럼 부디 구류만 하지 말아 주세요.”
나는 당장 자신이 구금될 위기에 처했는데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무감한 눈으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는 자카리를 가리듯 앞에 서며 말을 덧붙였다.
“보석금도 내고, 조사에는 성실히 임하도록 할게요.”
내 간절한 얼굴에 치안 대장은 씁쓸하다는 듯 턱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공녀. 카르스텐 경이 제 가문과 연을 끊었다는 건 기사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나는 치안 대장의 말에 화들짝 놀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나만 아는 거 아니었어?’
원작에만 등장하지 내 삶에는 등장조차 하지 않는 자카리의 행방에 대해 캐묻기도 전에 가스파르가 사라져 버려서, 나조차 그가 왜 전쟁터에 그토록 일찍 차출되었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서브 남주라서 가족을 배신하고 아이네스에게 붙을 애라는 생각에 나도 신경을 안 쓰고 있긴 했지만….’
그런데 자카리가 제국 전역에 소문이 날 정도로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다고?
나는 불쑥 고개를 치켜드는 배신감에 자그마한 미간을 좁힌 채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설마 가족들 뒷담이라도 하고 다닌 거니, 첫째야?’
“큼. 흠흠.”
내가 자카리와 말다툼이라도 할 것 같았는지 헛기침으로 내 주위를 빼앗은 치안 대장 브라우스가 다시금 말을 잇는다.
“어쨌든 지금에 와서 괜히 카르스텐 경을 보호하겠다고 하차니아 공작가가 나서 버리면, 경의 반역죄에 가문까지 엮일 수 있습니다, 공녀님.”
나는 브라우스의 말에 제 손목에 구속구가 채워지든 말든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듯 나른한 얼굴의 자카리와, 엄중한 얼굴로 나를 압박하려 드는 치안 대장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뒷감당,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제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내 태도에 내가 자카리를 포기한 것으로 이해했는지, 브라우스가 한손을 들며 짧게 명령한다.
“끌고 가.”
“네, 대장!”
‘…어떡하지.’
아무리 사이가 데면데면한다고 해도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우리 집 애를-엄연히 내 오빠지만, 어쨌든 애다.- 감옥에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할게요!”
까짓거, 하면 되지!
어차피 반역도 곧 저지를 생각이질 않았나. 내게 필요한 건 반역 의지가 아니라 자금과 시간, 그리고 연줄이었다.
‘이번 기회에 역모의 움직임에 황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미리 대응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애초에 반군이라고 넘겨짚기엔 자카리의 움직임이 너무 허술했다.
‘딱히 아이네스와 접촉도 없었고, 반역에 임하는 흑랑 기사들의 전력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도 수상하잖아.’
게다가 자카리가 진짜 반역을 일으켰다면, 원작에 언급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저희 오라버니는 반군이 아니니까요!”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운 뒤 확신에 찬 나는 목소리를 높이며 아까부터 자카리의 얼굴만 모공이 다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찍고 있는 마경을 돌아보았다.
“저희 가문과 오라버니는 황군과 치안대의 조사에도 성실하게 임할 테지만, 저도 따로 진실을 파헤치겠어요! 진실은 언제나 하나니까!”
기분이라도 나게 티에리에게 부탁해 탐정복 제작에라도 들어가야겠다.
내가 쓰지도 않은 안경을 추켜올리듯 콧잔등을 매만지자 브라우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다.
“방금 공녀님께서 그 어린 몸으로도 황성을 지키기 위해 나선 것이 기특해서 공작가까지 조사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쩔 수 없군요.”
거짓말, 어차피 조사할 생각이었으면서.
나는 치안대장의 말에 눈을 가늘인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에게는 생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황실은 자카리 건으로 반드시 하차니아를 물고 넘어질 것이다.
‘아이네스가 이 좋은 빌미를 그냥 넘어갈 리 없지.’
그러니 자카리를 이대로 보내도 공작가가 황실의 추궁을 받는 건 마찬가지일 터였다.
“일단 알겠습니다. 카르스텐 경은 하차니아의 수도 저택에서 황제 폐하의 판단을 기다리는 것으로 하죠.”
“네! 감사해요, 브라우스 경.”
나는 브라우스의 결정에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치안대장에게 예의를 갖췄다.
“뭐, 제게 고마워하실 건 없습니다.”
공작가의 일원인 내가 제게 쉬이 고개를 숙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흠칫 놀란 브라우스가 멋쩍은 듯 제 뺨을 쓸며 돌아선다.
“자카리.”
나는 브라우스가 병사들을 이끌고 골목 어귀를 빠져나간 다음에서야 한숨을 푹 내쉬며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허.”
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자카리를 발견한 내 입에서 기가 막힌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야.”
“…….”
“자카리?”
두 번이나 불러 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선 나는 그의 잘생긴 콧대 아래로 새근새근 뿜어져 나오는 숨결을 확인하고 작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 새끼, 이 상황에서 자고 있어?!’
“안 일어납니까!”
퍼억-!
“정신 차립니다, 자카리 하차니아!!”
“윽.”
차남이고 삼남이고 순서 가리지 않고 혹독한 훈련으로 버릇을 들인 나였다.
나는 감옥 가는 거 막아 줬더니 길에서 잠이나 처자고 있는 장남의 배에 강렬한 어퍼컷을 날려 준 다음 한쪽 손바닥에 탁탁 주먹을 내려쳤다.
* * *
고신(?)을 통해 자카리에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황성벽을 공격할 생각을 다했는지 캐물을 심산이었는데, 수도 저택으로 멱살 잡고 끌고 온 자카리는 도무지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넌.”
“네, 저예요. 레오노라예요! 자카리 오라버니의 막냇동생이요!”
“편…….”
‘편, 뭐! 편 그 다음에 뭐라는 거야, 이놈아!!!’
자카리와 계속 대화를 나누다간 내가 답답해서 쓰러질 것 같았으니까.
‘서브남주가 이런 캐릭터였다고? 이거 주x피아에 나오는 그거 아냐? 나무늘보?’
남주로 등장하려면 나무늘보가 아니라 여우가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자카리가 답답해 작은 머리통만 동그란 쿠션에 팡팡 내리박던 나는 번뜩 든 생각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원작이 있었어!’
자카리는 <아.황.장>의 메인 캐릭터 중 한 명이었으니 분명이 외전이 있을 터였다.
그제야 허둥지둥 외전을 꺼내보니 아니나 다를까 비어있던 오망성의 마지막 꼭짓점이 짙은 파도처럼 새파란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이걸로 새침데기 트리스탄의 진짜 속마음을 읽었던 것처럼 자카리가 하고 싶은 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반가운 마음에 손뼉까지 쳐가며 좋아한 나는 움후후,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자카리의 외전을 펼쳤다.
* * *
◈
‘레…오…노…라…가….’
자카리는 밀려오는 수마를 겨우겨우 이겨 내며 생각했다.
‘누…구…더…라….’
◈
* * *
‘이 새끼가 진짜!’
나는 소파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자카리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울컥해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오라버니 막냇동생이라고 몇 번을 말했어요~!!”
“…….”
“만나서 30번은 더 말했겠다! 야, 너 또 자지? 지금 자냐?!!”
‘자지 말라고, 이 나무늘보 장남놈아~!!!’
얘 너무 게을러서 쫓겨난 거 아닐까.
“일어나라고요~!!!”
나는 엉엉 울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으며 반쯤 눈을 감고 있는 자카리의 몸을 탈탈 흔들어 젖혔다.
그 순간,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인영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을 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