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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128화 (128/486)

제128화

기자의 말에 당황한 나는 룰루의 손을 붙잡은 채 다급하게 걸음을 옮겨 황성 외벽에 다가섰다.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외벽에 가까이 다가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검은 투구를 뒤집어쓴 채 새하얀 벽을 마검으로 내려치고 있는 병사들이었고, 그들은 누가 봐도 흑랑(黑狼)의 기사들이었다.

‘이거 빼도 박도 못 하게 반군으로 몰리게 생겼는데.’

나는 검은 늑대가 아로새겨진 로브를 어깨 뒤에 매단 채 묵묵하게 황성 벽을 내려치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에 아연실색했다.

‘루카스가 가스파르의 몸을 차지한 이후 흑랑의 일에서 손을 뗀 게 신의 한 수가 될 줄이야.’

루카스는 매우 뛰어난 마법사였지만, 당연히 쉐도우나이츠의 오러를 완벽하게 발현시킬 수는 없었다.

해서 그가 쉐도우나이츠인 가스파르가 아니라는 사실이 들통날까 봐 일선에서 물러나는 척, 자카리에게 흑랑에 관한 전권을 위임했다.

‘그래서 대부분 북부(하차니아) 출신 마검사들로 이루어진 기사단이지만, 자카리가 기사단장이 된 이후로는 하차니아와는 거의 연이 끊긴 것이나 다름없게 됐었지.’

되레 차남인 실베스테르가 차근차근 기반을 쌓아 가고 있는 백랑이 하차니아의 숨은 전력이 되어 주고 있었다.

장남인 자카리가 제 가문인 하차니아 공작가와 데면데면했으니까.

‘예전에는 자카리가 단순히 여자 주인공인 아이네스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딱히 아이네스와 접점이 만들어지지 않은 지금 시점에도 가문과 절연한 것처럼 굴었어.’

해서 나는 첫째가 본가로 돌아오기만 하면 붙잡고 사정을 캐물을 심산이었다.

‘언제 돌아오나 매해 자카리의 생일마다 전쟁터로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 한 번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나는 기가 막혀 황성 벽에 금 한 줄 긋지 못하는데도 묵묵하게 벽을 내려치고 있는 기사들을 바라보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내 편지 읽씹하는 건 그렇다 쳐.’

생전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동생이니 가족처럼 느끼지 못할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서브남주 주제에 갑자기 반군의 수장이 된다고? 이게 말이나 돼?’

아무리 원작이 내 예상-아이네스의 예상과도 빗나가고 있는 듯싶지만-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다지만, 이건 그런 걸 떠나서 개연성이 너무 없질 않은가.

자카리가 지금 시점에 황실에 반기를 들어서 얻을 이득이 전무했다.

‘무슨 일인지 알아내려면 우선 이 바보 짓부터 멈추게 해야겠지.’

나는 흑랑의 기사들로 인해 마구잡이로 난도질당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황성의 새하얀 외벽을 흘깃하며 한숨과 함께 두 팔을 움직였다.

‘내 마력은 신성 계열이 아니라 보호막을 치는 데에는 큰 쓸모가 없겠지만, 적어도 자카리를 막으려는 시늉 정도는 해 줘야 하니까.’

다행히 쁘띠 플뢰르 이후 발렌타인사가 사들인 마경이 작금의 상황을 생생하게 중계하는 중이었다.

“쿠스토-디레.”

쏴아아-

내 손안에서 퍼진 새하얀 빛이 백사장을 감싸 안는 파도처럼 외벽을 타고 은은하게 흐른다.

“아, 아니-! 이 말도 안 되게 갑작스러웠던 황성 공격이 가족 싸움이었던 걸까요? 황성을 공격하는 자카리 하차니아를 레오노라 공녀가 막아서고 있습니다…!”

내 행동을 기가 막힌 타이밍에 캐치한 기자가 호들갑을 떨며 허공에 붕붕 떠도는 마경을 내 쪽으로 돌린다.

나는 고매한 영웅처럼 차분하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루카스에게 이어받은 마력을 손안에 응집시켰다.

‘흑랑의 공격을 막아 내려면 이정도 마법으로는 소용없겠지. 루카스가 알려 줬던 보호 마법 중 가장 강력한 게 뭐였더라….’

고민하는 찰나, 흑랑 기사들의 공격이 일제히 멈추었다.

“……?”

모두가 어리둥절해하는 가운데 나는 이때다 싶어 서둘러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남자를 향해 달려 나갔다.

“자카리!”

내 부름에 마물인지 동물인지 헷갈릴 만큼 거대한 먹빛 종마 위에 올라탄 남자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다.

“자카리 오라버니!”

그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얼굴을 높이 치켜들었지만, 새까만 투구 밖으로 보이는 건 번들번들하게 빛나는 그의 검은 눈뿐이었다.

“저, 레오노라예요.”

“……누구?”

나는 내 소개를 도통 알아먹지 못하겠다는 듯 미적미적 대답하는 자카리의 말에 애써 헛웃음을 삼켰다.

‘이 자식이 생일마다 내가 보낸 편지들 뜯어보지도 않은 거 아냐?’

용돈이나 선물을 동봉해서 보낸 적도 많은데!

“아아, 안타깝습니다! 하차니아의 장남 자카리 하차니아가 제 동생인 레오노라 공녀를 알아보지 못합니다아-!”

울분에 찬 내가 숨을 씨근거리는 동안 상황을 파악한 기자가 다시금 목소리를 높인다.

“레오노라 에스트렐라 하차니아. 자카리 오라버니의 막냇동생이에요.”

나는 행여나 우리의 대화가 기자의 귀에 들어갈까 목소리를 낮추며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오라버니, 지금 황성은 왜 공격하고 계시는 건가요?”

“…….”

“이유가 있으신 거죠?”

“…….”

내 간절한 얼굴에도 자카리의 무거운 입은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 새끼, 누가 입을 바늘로 꿰매 버리기라도 한 건가?’

짜증 나서 그의 투구라도 벗겨 버리기 위해 내가 깡총 뛰어오르는 순간,

“전군, 공격 중단.”

오른손을 번쩍 든 자카리가 기사들을 향해 짧게 명령한다.

“존명!”

그는 흑랑의 기사들이 황성을 공격하는 것을 완전히 멈추고 나서야 말에서 내려왔다.

그러더니 내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등을 돌려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놈 자식 싸가지 봐라?’

어이가 없어 입을 헤 벌리고 그를 지켜보는데 흑랑의 기사들이 모인 곳으로 다가가려는 자카리를 황군과 함께 우르르 몰려온 치안대가 막아선다.

“자카리 카르스텐 하차니아! 황성을 공격한 죄로 당신을 체포하겠습니다!”

황도의 치안 대장, 브라우스 경이 힘껏 목청을 높이며 자카리를 지목했다.

무장한 병사가 몰려와 자신을 에워싸면 겁을 집어 먹을 만도 한데, 자카리는 투구조차 벗지 않고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공격한 적 없는데.”

“지금 외벽의 세 번째 결계가 흑랑 기사들의 검날에 파훼되었는데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겁니까!”

“공격이 아니라…….”

치안 대장의 다그침에 자카리의 입술이 느릿느릿 벌어진다.

“예?”

치안대장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듯 침을 꼴깍 삼켰지만, 자카리는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

“마, 말을 계속 이어서 하십시오! 공격이 아니라면 뭐였단 말입니까?”

“됐다…. 귀찮군….”

나는 순순히 치안대의 병사들에게 제 몸을 맡기는 자카리의 입에서 튀어나온 작은 중얼거림에 얼이 빠져 이마를 짚었다.

‘귀찮아? 귀찮아서 지금 변명 한 번 해 보지 않고 체포당하겠다는 건가?’

“허, 참! 이런 반역자는 또 처음 보는군요.”

갑자기 들이닥쳐 황성 벽을 공격할 때는 언제고 순한 양처럼 손목을 내미는 자카리의 행동에 치안 대장 브리우스 또한 기가 막힌지 인상을 찌푸렸다.

“자, 자카리…! 잠깐만! 잠깐만요!”

나는 브라우스가 구속구까지 채운 자카리를 끌고 가는 것을 막아서며 양팔을 벌렸다.

“공녀님. 레오노라 공녀님 맞으시죠?”

“…네, 맞아요.”

쁘띠 플뢰르를 통해 내 얼굴을 익혔는지 치안대장 브라우스가 알은체를 하며 내가 가엾다는 듯 미간을 좁힌다.

“업무 수행 방해죄로 공녀님마저 끌려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비켜 주십시오. 카르스텐 경은 현행범입니다.”

하차니아 공자가 아닌 카르스텐 경.

브라우스는 자카리가 아예 하차니아 공작가의 일원이 아닌 것처럼 취급하며 혀를 끌끌 찼다.

“공작 각하께서 왜 장남을 어린 나이에 전쟁터로 버리듯 밀어 넣었는지 이제 이해가 가네요. 이렇게 천지분간을 못하고 날뛰는 이였을 줄이야….”

아빠가 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소년에 불과했던 자카리를 국지전이 끊이지 않는 자브뤼켄에 보냈을까.

‘가스파르 성정에 죽으라고 보낸 건 절대 아닐 텐데….’

자카리를 언급할 때마다 애틋해졌던 그의 눈빛을 생각하면 더더욱 가스파르가 자카리를 ‘버렸다.’는 소문은 믿을 수가 없었다.

‘어찌 됐든 우리 집 첫째야.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한 채 범죄자로 만들 수는 없지.’

나는 브라우스의 말에 순응하듯 얌전히 선 자카리를 턱짓하며 치안 대장을 향해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자카리는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어요. 범법을 저지른 미성년자는 그가 속해 있는 영지의 주인이 관장하는 게 제국법이라고 알고 있어요.”

“카, 카르스텐 경이 아직 성년이 아니라고요?”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브라우스가 화들짝 놀라며 자카리를 돌아본다.

“장성한 청년처럼 보이는데요? 게다가 자브뤼켄 국지전에서 기사로서의 이름을 알린 게 벌써 5년 전의 일 아닙니까?!”

브라우스의 말대로 자카리는 어린 나이에 뛰어난 업적을 세운 기사 중의 기사였다.

‘덩치도 거의 가스파르만 하고 말이지.’

나는 제법 체구가 있는 브라우스보다도 한 머리가 큰데다 갑옷을 입었는데도 느껴질 만큼 탄탄한 자카리의 몸을 힐끔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열여덟 생일이 안 지났어요. 자카리, 미성년자 맞아요.”

내가 자카리를 옹호하기 위해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자, 병사들에게 반쯤 기대 서 있던 그가 몸을 일으키더니 느릿느릿 입을 연다.

“이 아이의 말 들을 필요….”

“예? 뭐라고요? 잘 안 들립니다!”

“…….”

‘얜 왜 자꾸 말을 하다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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