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응? 춤 추자고?”
나는 루카스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루카스, 춤 출 줄은 알아?”
“당연히.”
내 의심쩍은 시선에 실바람처럼 나직한 웃음을 내뱉은 그가 날카로운 턱 선을 검지로 쓸어 올린다.
“넌 내가 황자였다는 걸 종종 잊는 것 같다.”
‘아, 맞네.’
나는 루카스가 덧붙인 말에 입을 헤 벌린 채 그의 커다란 손에 내 손을 얹듯 올려놓았다.
‘이제 곧 가스파르의 얼굴을 한 루카스가 아닌, 진짜 루카스를 보겠구나.’
“뭐가 그리 놀랍다고 멍해졌는지 모르겠군.”
멍청하게 벌어진 내 입이 우습다는 듯 툭 두드린 루카스는 정말 무도회에라도 들어선 것처럼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 덕에 낮아진 그의 눈을 마주하자, 성정 때문인지 진짜 가스파르였을 때보다 조금 더 매섭게 올라간 눈꼬리가 반쯤 접히며 휜다.
“그럼 한 곡 추시겠습니까?”
루카스와 가스파르, 그리고 그레고르는 동년배였기 때문에 그의 실제 나이는 장성한 자식이 있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나는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나 슬쩍 올라간 입꼬리가 주는 매혹적인 느낌에 멜리사가 왜 그토록 루카스에게 집착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는 루카스의 물음에 새침하게 대답한 후 그가 내민 발등에 얌전히 올라탔다.
타닥, 탁탁.
자신 있게 춤을 출 줄 안다고 했던 게 허풍은 아니었는지 그가 나를 발등에 얹은 채로도 유려한 스텝을 밟으며 부드럽게 몸을 움직인다.
크레니아 홀은 상아로 빚은 거대한 분수가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한 파티장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을 맞아 투명하게 빛나는 물방울이 일렁이는 바람에 흩어지며 작은 무지개를 만들어 낸다.
루카스가 밟는 다정한 스텝에 맞춰 우리 위에 상냥한 그림자를 드리운 나무도 산들산들 춤을 추었다.
그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한낮의 느른한 행복을 완성시킨다.
“…루카스.”
나는 그가 황자, 아니, 이제 대공위에 오를 ‘루카스’로 돌아가면 이제 나와 이렇게 한가하게 노닥거리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에 잠겨 오는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었다.
“아빠가 돌아온다고 해도 나랑 계속 친구해야 해.”
“…친구라.”
루카스가 나랑 친구할 나이는 아니었지만, 나는 괜히 입을 삐죽이며 말을 덧붙였다.
“친구 아니면 준가족. 언제는 내 영혼에 깃든 마나가 루카스의 것이라 내가 네 딸이라면서?”
정확히는 그가 아니라 신전의 주장이었지만, 나는 제대로 들어 본 적도 없는 신탁을 인용하며 대답 없는 그의 소매를 붙잡아 흔들었다.
“나 보러 자주 와야 돼. 알았지?”
“…….”
“내가 황성에 자주 드나드는 건 조금 눈치 보이니까.”
아이네스가 무섭기도 했고.
나는 여전히 대답 대신 감정을 읽을 수 없을 만큼 깊게 침잠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루카스를 올려다보았다.
“왜 대답을 안 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내가 루카스가 보고 싶을 것 같아서.”
“…….”
충동적으로 내뱉어 놓고 쑥스러움에 괜히 코끝이 간질거린다.
“아, 아무튼! 또 그레고르한테 바보같이 당하지 말고!”
나는 민망해 목소리를 높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몸을 되찾자마자 그레고르 한 방 먹일 방법부터 찾자.”
내 말에 저도 쑥스러워진 건지 뭔지,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 루카스가 나를 번쩍 안아 올린다.
나는 보다 가까워진 녹음을 향해 코를 킁킁거리며 이제 내 한눈에 훤히 들어오는 루카스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그레고르를 해치우기도 전에 먼저 몸을 찾게 되었지만, 우리 동맹 잊으면 안 돼?”
타도 아이네스, 타도 그레고르!
‘루카스는 애초에 나와 공동의 적을 두고 있었으니까, 몸을 되찾더라도 아예 못 보게 되진 않을 거야.’
휴우.
작게 안도하는 나를 응시하던 루카스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그래.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동맹이라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을 거다.”
“응? 내가 루카스의 첫 동맹 대상자였어?”
‘황자였다면서 어떻게 동맹을 맺은 사람도 없었담.’
이쯤 되면 황위를 거머쥐기 직전까지 갔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래! 그러니까 몸 찾았다고 나 쌩까면 안 돼!”
내 씩씩한 대답에 내 머리를 한 손으로 헝클어뜨린 루카스가 나를 도로 바닥에 내려놓는다.
“알았다. 이제 들어가 봐.”
“벌써? 루카스는 같이 안 들어간다며.”
“파티 주인공이 오래 자리를 비우면 빈축을 사는 법이다.”
파티의 주최자는 쁘띠 플뢰르 운영 위원회였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우승자인 나이긴 했다.
“흐응, 알겠어. 이따 봐.”
나는 작은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제자리에 우뚝 선 루카스를 재촉했다.
“왜 대답을 안 해? 이따 집에서 보자니까.”
“…그래.”
내 말에 뒤늦게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인 루카스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어서 가 봐.”
묘한 기시감에 나는 그가 내게 인사하는 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보다 겨우겨우 등을 돌렸다.
그러나 길게 지는 땅거미가 나를 붙잡는 것처럼 느껴진 그 순간에, 나는 발을 떼지 말았어야 했다.
* * *
“…네가 티에리 자작가의 영식이라고?”
“네.”
‘어디서 본 얼굴인데… 뭐지?’
레오노라 주변을 조사해 이용할 수 있는 인물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눈에 띈 히스를 황성으로 불러낸 아이네스는 비스듬히 고개를 꺾은 채 예쁜 미간을 좁혔다.
‘첫 번째 삶에서 봤던가? 아니면 두 번째 삶?’
흔한 인상이었다면 그저 그녀가 스쳐지나간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겠거니 넘어갔겠지만, 그녀의 부름을 받고 황성 문턱을 밟은 소년은 절대로 흔한 외모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뭐, 느껴지는 마력이 대단하진 않네.’
이제 막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소년을 힐끔한 아이네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그네스 티에리가 입적한 양자라… 브리넨 구휼원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맞아?”
“네.”
아이네스는 어딘가 퉁명스러운 히스의 대답에 언짢아졌지만, 천애고아라 배운 것이 없겠거니 하며 짧게 혀를 찼다.
‘뭐, 인사 받자고 부른 건 아니니까.’
“브리넨 구휼원 출신이라면 황족에게 충성해야겠네. 우리 아빠, 그러니까 폐하께서 브리넨 구휼원의 가장 큰 후원자였거든.”
아이네스의 말에 히스의 불투명한 회청안이 그제야 황녀의 얼굴을 향한다.
“그리고 난 네 개인적인 후원자이기도 하고. 네가 쁘띠 플뢰르 본선 전에 받은 편지, 내가 보낸 거야.”
레오노라 공녀를 돕고 싶다면 뜯어 보렴.
따위의 수상한 글자가 새겨져 있던 봉투 안에 담긴 편지에는 아이네스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흑주술사 중 가장 강력한 술자였던 카라의 마지막 마력으로 이루어진 저주가 걸려 있었다.
‘카라의 이능 중 가장 쓸만했던 건 인간의 어두운 마음을 자극해 인형처럼 조종하는 거였지.’
매우 쓸모 있는 능력인 덕에 죽이는 게 아깝긴 했지만, 카라가 멋대로 아이네스에 대해 발설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게다가 다행히 그 강력한 마력을 죽이기 전에 일부 뽑아낼 수 있었으니까.’
아이네스가 드레스 안자락에 집어넣은 손 안에서 차그락, 차그락 검은 자갈이 움직이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딱히 공녀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적혀 있진 않았습니다.”
“본선에 슈발리에라는 제도가 등장할 거라는 걸 미리 알려 줬잖아? 얼마나 큰 힌트였는데.”
‘뭐야? 지금도 정신 감응을 유도하고 있는데 꿈쩍도 안 하네. 카라가 죽어 버려서 효과가 없는 건가?’
아이네스의 설명에도 히스의 무감동한 얼굴은 변화가 없었지만, 그녀는 애써 카라의 미약한 저주에 감응한 히스가 쁘띠 플뢰르에서 보였던 행동을 떠올렸다.
‘하지만 분명 트리스탄을 질투하고 있었어.’
티에리 자작 영식이 신분이나 힘 따위를 들먹이며, 왜 자신을 슈발리에로 선정하지 않았냐고 레오노라에게 따졌다고 들었다.
히스 또래 남자애들이 질투를 표출하거나 열등감을 느끼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본인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조금만 더 자극해 주면… 이 소년은 어떻게 될까?’
아이네스는 얄쌍한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생긋 웃었다.
인간이 질투나 욕망 따위로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지는 멜리사 왕녀만 봐도 잘 알 수 있었으니까.
‘정신 감응이 안 된다면, 음음하게 가라앉은 마음과 감정을 자극하면 될 일이지.’
짧게 판단한 아이네스의 손가락 끝에서 카라의 어두운 마력이 미세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뭐, 됐어. 나에게 고마워할 의지가 없는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도 좋아.”
히스의 그림자에 카라의 마력이 전부 스며든 것을 확인한 아이네스는 차갑게 축객령을 내리며 등을 돌렸다.
* * *
‘아이네스, 요게 히스까지 건드네?!’
구휼원 아이들은 전부 꽁꽁 잘 숨겨 뒀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히스는 그녀에게 노출이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근데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어두운 욕망… 을 자극하는 흑주술 아니었나?’
나는 황성에서 돌아온 히스가 내게 들고 돌아온 물건에 떨떠름한 미간을 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