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공녀에게 그대에 관한 거짓말을 해 달라고?”
“네.”
루카스의 단호한 대답에 발레리의 헌칠한 미간이 일그러졌다.
성격이 조금 괴팍하기는 했으나 그녀는 엄연히 성직자였으니까.
“루엘라 여신의 첫 번째 종인 이 몸에게, 감히 거짓을 입에 담아 달라 청하는 건가.”
“네. 두 번 말하게 하시는군요, 사람 귀찮게.”
루카스의 건조한 목소리에 발레리는 기가 막히다는 듯 한 쪽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시건방진 건 황가놈들 특징인지 뭔지 모르겠군.”
그의 태도는 그녀와 비슷한 시기에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던 사뮈엘 대공과 겹치는 듯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능력이 출중한 것도 비슷하군.’
사뮈엘 대공과 루카스 황자의 운명을 가른 단 하나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건 대공은 진즉 황위를 포기했고 루카스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황위를 코앞에 두기까지 했었지.’
발레리는 황위도, 육신도, 이제는 영혼까지 잃게 될 루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침음을 삼켰다.
“이 몸이 그대의 부탁, 아니, 부탁조차 되지 못할 청을 들어줘야 할 이유는?”
“공녀의 마음을 괜히 아프게 하는 건 성하께서도 바라는 일이 아닐 거라 생각했습니다.”
루카스의 담담한 대답에 발레리는 해사한 레오노라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건 그렇지.”
정오의 태양처럼 찬란한 빛을 내뿜는 듯하면서도 사려 깊은 마음씨를 지닌 레오노라. 소녀는 대신전과 교황청의 알력다툼에 시름하다 불면증까지 얻게 된 발레리를 치유하는 그녀만의 요정이었다.
레오노라 공녀가 우는 모습을 보는 건 발레리에게도 절대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 가스파르 공작의 영혼이 깨어나면 그대의 영혼은 제자리를 찾아 돌아갔다고 말하면 되는 건가?”
루카스 황자에게 저주를 건 술자였던 카라칼라가 죽었다.
그건 저주가 완전히 파훼되기도 전에 저주를 유지하던 마력의 공급자가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이제 곧 저주가 산산조각 깨져 버릴 터.’
레오노라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가스파르가 귀환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황자는 사라질 텐데….’
발레리는 가스파르 대신 죽겠다고 나선 루카스의 결정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다시 한번 경고하지만, 그대가 제 육신을 찾아 그 몸을 떠나 버리면 가스파르 공작은 죽게 되네.”
“떠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계속 그 몸에 남아 있다간 소멸하고 말 텐데.”
“그러니 황자 루카스는 그저 홀연히 사라졌다 전해 주십시오.”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한 얼굴.
그러나 흑요석 같은 눈동자에 박힌 눅진한 애정에 발레리는 그제야 입술을 짓씹으며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말도 없이 사라지면 공녀가 많이 섭섭해 할 걸세.”
발레리의 말에 루카스는 대답 없이 웃었다.
* * *
가스파르 공작으로서의 삶은 루카스에게 주어진 두 번째 생애나 다름이 없었다.
“루카스 전하는 고독한 분이셨으니까요. 각하께서 저와 전하의 사이를 모르시는 게 당연하죠.”
“그는 믿을 수 있는 친구도, 심지어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사람도 없는 분이었어요. 황자님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오직 저뿐이었답니다.”
이제 와서 멜리사 아스텔리우의 말이 떠오르는 건 그녀의 말이 전부 헛소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멜리사의 말대로 황자였던 루카스에게는 믿을 만한 친구도, 연인도, 가족이라 부를 만한 이도 없었다.
황권 강화를 위해 후계들을 경쟁에 붙인 선황과 경쟁자 그레고르만이 존재했을 뿐.
가스파르로 살아가며 그는 루카스 윌레닌으로 살아갈 때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안온함을 느낄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레오노라가 자그마한, 그러나 강인한 주먹 안에 그런 따뜻한 햇살 한 줌을 숨겨 그에게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아반니! 아나조!” (아버지! 안아줘!)
“루카쯔, 일 똑바루 해!” (루카스, 일 똑바로 해!)
아장아장 겨우 걷던 세 살 아기 때의 레오노라를 떠올린 루카스는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다람쥐같이 조그마한 주제에 가주 일을 떠맡으라고 어찌나 득달같이 달려드는지, 황실에서도 태만한 황자 흉내를 냈던 루카스는 레오노라의 지시에 따라 공작가를 열심히 가꿔 나갈 수밖에 없었다.
‘황위를 노릴 때보다 더 열심히 일했던 것 같군.’
그럼에도, 평온한 나날들이었다.
한평생 고독하게 살다 이복형제의 살수에게 육체마저 빼앗겼다. 그런 그에게 공작가에서의 온화한 일상은 꿈처럼 다디단 것이었다.
그러나 간신히 손에 쥐게 된 루카스의 꿈은 결국 타인의 것.
‘그러니 이번에는 내가 물러나는 게 맞겠지.’
루카스는 마법사였던 자신과 달리 오랜 세월 검을 잡아 여기저기 굳은살이 박힌 가스파르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누군가가 이토록 부러워지는 건 처음인데.’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레오노라의 완전한 애정이 쏟아지는 대상이라 부러워졌다.
“…루카스?”
쉬이 정원에 들어서지 못하고 주춤하던 루카스는 제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설마 지금 온 거야? 파티 다 끝나 가는데.”
뾰루퉁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레오노라였다.
“내가 늦은 건가.”
루카스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가장하며 뒤를 돌았다.
“응! 늦었어!”
루카스의 물음에 고개를 크게 끄덕인 레오노라가 예쁜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그에게로 종종 다가선다.
수도에서 가장 화려한 내부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크레니아 홀은 황금 장식으로 유명했는데, 소녀는 금박으로 감싸인 크레니아 홀의 기둥 사이에서도 해사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아직 파티는 끝나지 않은 것 같은데.”
“먹을 게 안 나오면 끝난 거지!”
레오노라는 자르파라 상단을 굴려 꽤 막대한 자금을 운용하고 있었지만, 묘하게 수전노 같은 면모가 있었다.
“조금만 더 일찍 오지 그랬어.”
아이는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저는 파티에서 많이 먹기 위해 오찬까지 걸렀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시작했다.
“쁘띠 플뢰르의 우승자를 기리기 위해 운영 위원회가 주최한 파티라서 맛있는 것도 엄-청 많이 나왔는데! 특히 디저트로 나온 크림 브륄레가 무지무지 맛있었어.”
레오노라의 몸짓에 따라 양 갈래로 묶은 아이의 화려한 백금발이 바람에 나풀나풀 흔들린다. 루카스는 바람을 수놓듯 휘날리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꼬리를 올렸다.
“…그랬나. 너라도 많이 먹어서 다행이군.”
“요새는 저택에서도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파티에는 무슨 일로 왔어?”
허리를 숙인 루카스는 삐죽 튀어나온 레오노라의 입술을 손끝으로 툭 건드리며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섭섭했다면 미안하다.”
“뭐, 뭐야! 어디서 사과를 하고 난리야!”
레오노라는 그런 루카스의 멱살을 덥석 잡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루카스, 어디 아파?!”
* * *
‘뭐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쉽게 사과하는 거야?’
가주가 다루는 중요 문서에 실수로 음료수를 쏟아 헨리와 내가 삼일 밤낮을 새게 만들었을 때도 사과 한 번 하지 않던 뻔뻔한 인간이 루카스였다.
그런 안하무인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사과에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열나?”
“…….”
“요즘 황도에 역병이 돈다던데, 그거 아냐? 고로나?!”
점점 더 높아지는 내 목청에 기분이 살짝 상했는지 루카스가 잘생긴 미간을 찌푸린다.
“아니, 멀쩡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 얼른 들어가자.”
나는 다시 뚱해진 루카스에게 손을 내밀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하차니아 공작 각하께서 요즘 두문불출하다고 사람들이 수상하게 봐.”
“이제 곧 가스파르 공작이 깨어날 테니 괜찮을 거다.”
나는 루카스의 무심한 대답에 두 눈을 휘둥그레 크게 떴다.
‘발레리가 루카스에게도 이미 말을 한 거구나.’
언제 집에 들어오나, 만나자마자 이 좋은 소식을 말해 주려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더니.
“루카스도 성하를 만나 보고 온 모양이네.”
내 말에 루카스의 얼굴이 느릿느릿 위아래로 움직인다. 나는 묘하게 가라앉은 그의 분위기에 우울해 보였던 발레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발레리도 그렇고 루카스도 그렇고, 저주가 풀렸는데 왜 기뻐하는 것처럼 안 보이지?’
의구심에 입술만 달싹이던 내가 루카스를 캐묻기 위해 입을 벌린 순간,
“…♩♪♫♬.”
홀 안에 대기하고 있던 악단이 다시금 연주를 시작했는지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왈츠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쁘띠 플뢰르의 운영 위원회가 참가자들을 위해 바하무스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 중 한 명인 루프 뤼스케에게 의뢰해 만든 음악이었다.
“이거 아빠랑 딸이 함께 춤을 추라고 만든 음악이래. 쁘띠 플뢰르랑 어울리지 않아?”
파티 내내 흘러나오던 왈츠였지만, 루카스가 보이질 않아 나는 춤을 출 수 없었던 왈츠였다.
‘물론 루카스는 내가 제 딸이라고 생각하고 있진 않겠지만….’
아빠의 손을 잡고 춤을 추던 소녀들을 바라보며 묘한 소외감을 느꼈던 내가 나도 모르게 루카스를 흘깃하자, 그가 대답 없이 내게 손을 내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