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조급해할 줄 알았지.’
나는 궁지에 몰리면 카라가 제 정체가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 운영 위원들을 압박할 것이라 예상했고, 그녀는 꼭두각시처럼 내 예상에 맞춰 움직여 주었다.
‘뤼지앙 후작 사건으로 치안대에서 조사를 받고 있으니 교황위가 더더욱 급해졌을 테니까.’
추기경과 달리 교황에게는 어떤 죄든 단 한 번, 자애로운 여신 루엘라의 이름으로 사면받을 수 있는 특혜가 있었다.
“빨리 교황이 되어 자신이 뤼지앙 후작을 움직인 배후라는 게 밝혀져도 죗값을 치르지 않을 계획을 세운 모양이던데….”
어쩌지, 내가 아이네스와 네 계획을 전부 꿰고 있는걸?
나는 당황과 수치심으로 얼룩덜룩 물든 카라의 얼굴을 비추는 마경을 흘긋하다 생긋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안녕하세요, 대공 전하. 레오노라예요.”
나는 언제 곁에 다가왔는지 대뜸 내게 말을 거는 사뮈엘 대공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네가 레오노라란 말이지. 루카스의 딸이라는 소문이 돌던.”
나는 오랜만에 듣는 ‘사생아’소리에 동그랗게 눈을 떴다. 나를 공격하려는 의도가 있는 건가싶었지만, 노회했음에도 잘생김이 흐르다 못해 넘쳐흐르는 사뮈엘의 얼굴에서는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보니 닮은 것 같기도 하구나.”
“제가 루카스 황자 전하를 닮았다고요?”
“그래. 뒤에서 수작을 부려서라도 꼭 상대를 이겨 먹고 마는 점이 닮았구나.”
내 물음에 짧게 대답하는 대공의 목소리는 언뜻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사뮈엘 대공이라면 선황의 동생… 그러니까 루카스와 그레고르의 숙부일 텐데.’
황실에서 왕따라고 생각했던 루카스에게도 그를 아끼는 친척이 있었던 걸까?
나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루카스의 모습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대공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어… 으음…. 제가 루카스 황자 전하를 닮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허. 하나도 감사하지 않은 얼굴로 잘도 인사를 하는구나.”
나는 내 말에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 대공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멋쩍은 뒤통수만 긁적였다.
‘뭐지. 이 할아버지는 왜 갑자기 찾아와서 시비를 거는 걸까.’
“네. 그럼 더 할 말 없으시면 저는 이만 상 받으러 가 볼게요.”
“…그래.”
나는 내 맹랑한 작별 인사에 그의 뒤에 시립한 보좌관들이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등을 돌렸다.
* * *
‘대공께서 어린아이에게 먼저 말을 거시다니!’
황자 시절부터 사뮈엘을 보좌한 지 어언 50년이 넘어가는 대공의 수석 보좌관 베르나르는 조금은 버릇이 없다싶은 레오노라의 태도에도 기분 상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 대공의 얼굴에 쩌억 턱을 벌렸다.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성질이 고약하다 못해 지독한 이 양반을 감히 무시까지 했는데 얼굴 한 번 안 찌푸린다고?!’
능력이 무척 뛰어난 황자였던 사뮈엘이 황위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의 성격이 너무 개차반이라서.
‘매력이 통통 튀는 소녀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사뮈엘 대공의 마음에까지 들 줄이야….’
베르나르는 누가 봐도 레오노라를 기특해하는 듯한 사뮈엘의 태도에 헛웃음을 흘렸다.
‘하긴, 쁘띠 플뢰르 참가자가 거대한 총기류를 짊어지고 나와 깃발이 꽂힌 언덕을 날려 버리는 모습은 대회에 관심이 없던 나까지 속이 시원한 장면이긴 했지.’
쁘띠 플뢰르는 차기 사교계의 꽃을 선발하는 대회.
애초에 ‘깃발잡기’같은 주제가 선정된 것부터가 말이 되질 않았다.
전통을 무시하는 것도 모자라 형평성까지 어긋난다는 생각에 불쾌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레오노라가 바주카포를 갈기는 모습은 그런 사람들의 불만을 한 방에 날려 줄 만큼 시원시원했다.
“레오노라 공녀가 대단한 아이인 건 맞는 것 같습니다. 가스파르 공작이 자식 농사는 참 잘 지었지요.”
“…가스파르 공작보다는 루카스가 떠오르는 아이야.”
젊은 시절, 대공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황실의 망나니라고 불린 루카스 황자를 꽤나 아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베르나르는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황자 전하의 육체를 교황이 찾아냈다고 들었습니다. 참으로 다행이지요. 그저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는데….”
그러나 베르나르의 말에 사뮈엘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 비슷한 침음을 흘렸다.
“고작 육체만 찾았을 뿐이다. 하긴, 일반인에 불과한 네가 어찌 대마법사들의 고통을 이해하겠냐마는….”
‘이 자식이 나를 또 무시하네?’
오만한 대공의 보좌를 50년째 하고 있긴 하지만, 베르나르는 저를 보고 혀를 끌끌 차는 대공의 말에 여전히 기분이 상했다.
“예, 예…. 대마법사인 루카스 황자 전하와 대공 전하만 아시는 고통이 있으시겠지요. 아무렴요.”
“…인간의 육신이야 그저 흙으로 빚은 그릇일 뿐. 진짜 정수는 영혼에 담겨 있는 법이다. 육체를 찾는다고 다가 아니라는 말이지.”
사뮈엘의 설명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베르나르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교황이 루카스 황자의 저주를 풀겠다고 나선 후로 꽤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 * *
뤼지앙 후작의 약탈혼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카라가 머무는 신전에 기어코 수도치안대의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내,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는 거야!”
“카라칼라 추기경 예하, 뤼지앙 후작의 자백으로 당신이 그를 사주했다는 인과가 밝혀졌습니다.”
신전의 백색 기둥을 붙잡고 절대 끌려가지 않겠다는 듯 발악하는 카라를 한심한 눈으로 흘긋한 치안대장 얀센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덧붙인다.
“뭐, 뤼지앙 후작 건처럼 중요하진 않지만 쁘띠 플뢰르 운영회 측도 비밀 심사위원 기준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본질을 해친 예하를 영업방해죄로 고소했고요.”
쁘띠 플뢰르는 수도의 자랑이자 전통인 만큼 매해 열리는 대회에 의존해 생계를 유지하는 운영 위원들도 있었다.
그런 쁘띠 플뢰르를 권력을 이용해 제멋대로 휘두르려고 한 카라에게 앙심을 품은 인원이 적지 않았다.
“뭐? 지들이 뭔데 날 고소해! 이름을 대! 이름을 알려 달라고…!”
“하.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시는 겁니까. 당신의 죄가 낱낱이 밝혀진 상황인데도.”
목청을 높이는 카라의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쉰 치안대장은 그녀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그녀를 향해 턱짓했다.
“예하를 끌어내라.”
“예, 대장!”
카라는 치안대장의 명령에 자신에게 저벅저벅 다가오는 병사들의 손을 기겁하며 뿌리쳤다.
“이, 이거 놔! 내 뒤에 누가 있는지 알아? 무려…, 헉-!”
고신을 하지도 않았는데 제 뒷배를 밝히려는 카라의 말에 치안대장이 재빨리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기 시작했다.
“허억, 헉!!!”
치안대장은 검붉은 피를 바닥에 흩뿌리며 고꾸라지는 카라의 모습에 당황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 뭐야! 치, 치료사 신관을 데려와라!”
치안대장의 외침에 거무죽죽한 빛깔로 물들어가는 카라를 향해 다급하게 신관 한 명이 다가가 무릎을 꿇는다.
“어, 어서 날 도와…!”
제 신성력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저주의 고통에 허우적거리던 카라는 제게 가까이 다가온 신관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먹잇감을 물어오지 못하는 사냥개는 필요 없으시답니다.”
“……!”
카라와 눈을 마주한 채 작게 속삭이는 신관은 대신전의 수장인 그녀가 난생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이네스가 날 죽이러 보낸 자야.’
직감으로 신관이 아이네스의 살수임을 알아차린 카라는 그의 멱살을 붙든 손까지 부들부들 떨어 가며 애원했다.
“사, 살려 줘. 살려 주세요, 황녀 전하…!”
제가 잘할게요, 앞으로 더 잘할 수 있어요!
눈물까지 흘려 가며 빌어 봤지만, 살수의 무심한 낯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음 생에는 조금 더 쓸모 있길.”
아이네스가 전한 말을 그대로 읊은 암살자는 죽어가는 카라를 치료하는 척 그녀의 목에 손을 올렸다.
* * *
‘결국 카라까지 제거해 버렸어.’
치안대가 카라를 구금하면 그녀를 통해 아이네스를 엮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툭, 바닥에 원작을 던지듯 내려놓은 나는 힘없는 팔다리를 침대 위에 쭈욱 뻗었다.
‘아이네스는 이제 제 편을 죽이는 것조차 망설임이 없어졌구나.’
나는 빌런을 넘어선 괴물이 되어 가는 것만 같은 아이네스의 묘사에 소름이 오소소 돋은 팔뚝을 쓸어내렸다.
아이네스의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였던 카라가 사라졌지만, 아직 이 세계에 미치는 그녀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대신전에 살수를 심어 둘 정도라니….’
카라의 죽음을 날 것 그대로 묘사하는 원작의 페이지를 떠올리며 인상을 찡그리는데, 내 방문을 누군가가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가씨, 교황 성하께서 찾아오셨는데요.”
“응? 지금 나갈게.”
로제의 말에 의아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자마자 침실 문이 벌컥 열린다.
“나올 필요 없다. 이 몸이 침실까지 직접 왔으니.”
“아, 안녕하세요. 성하.”
“공녀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러 왔도다. 루카스 황자의 저주를 풀 수 있게 됐어.”
“정말요?!”
“그래.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좋은 소식을 전해 주는 발레리의 얼굴은 전혀 밝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