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저 새, 아니, 저분 누구예요?”
<우윳빛깔 레오노라 아가씨 팬클럽> 바하무스(수도)지부 명예회장직을 맡고 있는 로제는 트리스탄의 등장에 손수건을 물어뜯으며 잘게 몸을 떨었다.
“소공작이면 단가? 왜 난데없이 우리 공녀님 귀한 손등에 뽀뽀를 하고 지, 아니, 난리인 거죠?!”
마경에 비치는 트리스탄의 얼굴을 확인한 핀은 로제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트리스탄 솔로아 소공작은 원래도 우리 공녀님과 조금 각별한 사이이긴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얼굴을 봐 온 사이니까요.”
공작성에서 이제 막 수도저택으로 발령 난 고용인들 중 한 명인 핀의 설명에 로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래도 제가 모른다는 건 최근에는 교류가 없었다는 거잖아요!”
“뭐, 그렇긴 하죠. 솔로아 공작가는 후계 문제로 내전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최근 흉흉한 분위기를 자랑하고 있으니까요.”
“우리 아가씨가 그런 험악한 곳에 시집가는 거, 전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요.”
핀의 설명에 로제는 최악이라는 듯 인상을 찡그린 채 손수건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숨을 씨근거렸다.
“오늘 룰루랄라(레오노라 팬클럽 공작성지부 회장)님들에게 급보를 넣어야겠어요!”
“…로제, 우리 아가씨는 아직 여덟 살이에요.”
평소 쾌활하고 상냥한 아가씨들인 룰루랄라가 레오노라의 일이라면 얼마나 무서운 야차로 돌변하는지 잘 알고 있는 핀은 로제의 말에 두렵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굳이 룰루랄라에게까지 연락할 필요가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 아가씨는 미래가 기대되다 못해 설렐 정도로 귀엽고 깜찍하고 예쁘시잖아요!”
수도저택에서 오래 근무해 잔뼈가 굵은 로제는 여덟 살이 되어 수도 사교계에 데뷔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레오노라를 눈독 들이는 가문이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최근에 뤼지앙 후작가에서도 약탈혼이니 뭐니 끔찍한 짓을 강행하려고 했었잖아?’
우리 아가씨가 그런 끔찍한 일을 겪게 할 수는 없지!
그녀는 수도저택의 보안을 더 철저히 강화해야겠다는 생각에 주먹을 불끈 쥐며 입을 열었다.
“저 소년, 설마 이번 쁘띠 플뢰르에 참가하기 위해 임시로 선정된 슈발리에라고 해서 정말 자신이 미래의 남편감 정도는 되는 거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죠?”
성정을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솔로아 소공작은 눈썹이 매섭게 치켜 올라가 있는 게 한 성격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아가씨는 유순하고 조신한 남자를 만나야 해.’
“게다가 아가씨가 결혼하시게 되면, 곧 출가를 하시게 될 거고… 그럼 우리는 아가씨 못 보게 되는 거잖아요?”
로제의 중얼거림에 그녀의 뒤에 시립해 있던 수도저택의 하녀들이 일제히 입을 모아 외친다.
“반대. 전 아가씨 연애 결사반대예요.”
“저도요! 본성 고용인들에게도 이 위기 상황을 공유하는 게 좋겠어요, 로제.”
‘아니, 그러니까 우리 아가씨 이제 겨우 여덟 살이라니까….’
핀은 길길이 날뛰며 난리를 치는 하녀들 속에서 한숨을 푹 내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수도저택에 올라오면 뭐 달라질 줄 알았는데, 공작성처럼 모든 게 아가씨 위주로 돌아가는 건 마찬가지구먼.’
* * *
레오노라를 따라 대기실을 벗어난 모드 이아론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레오노라의 슈발리에의 정체에 떠들썩한 군중석을 힐끗했다.
“슈발리에가 뭐라고 저렇게 난리들인 거야?”
모드의 슈발리에는 검술로는 따라잡을 사람이 거의 없는 ‘그’ 라르스 발탄이었지만, 카라가 구해 준 기사였기에 모드는 슈발리에의 중요도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쁘띠 플뢰르를 위해 임시로 선발한 슈발리에는 의미가 좀 희석되긴 하겠지만, 본디 슈발리에는 레이디 한 명만을 위해 존재하는 기사니까요, 아가씨.”
모드의 곁을 지키던 유모가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듯 슈발리에에 관한 상식을 설명해 주었다.
“제 세대만 해도 신부로 정해진 숙녀만 자신의 레이디로 삼는 슈발리에들이 많았답니다.”
‘그럼 난 라르스 경의 신붓감으로 점해진 건가?’
모드는 트리스탄의 등장에 크게 놀라지도 않은 건지 비스듬히 벽에 기대서 있는 라르스를 힐끗했다.
‘뭐, 나쁘지 않지. 자작이라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그래도 발탄가는 5대 귀족에 속할 만큼 역사가 깊은 명문가니까.’
분홍머리가 어울릴 만큼 곱상한 외모도 꽤 마음에 들었다.
‘물론 우리 고모부가 더 잘생긴 것 같지만….’
모드는 요즘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 가스파르의 단정한 얼굴을 떠올리며 콧잔등을 움찔했다.
“트리스탄? 레오노라 공녀의 슈발리에가 트리스탄 오빠라고?”
모드의 등 뒤에 뚱한 얼굴로 서 있던 스텔라가 발끈한 목소리를 높인다.
“허! 오빠도 웃겨. 내가 쁘띠 플뢰르에 참가하겠다고 할 때는 애들 장난 취급하며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방계 중에 또래가 많지 않아 스텔라는 트리스탄과 제법 친한-스텔라 혼자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만- 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베르너는 공작과 소공작이 벌이는 후계싸움에서 트리스탄의 손을 든 몇 안 되는 가신이기도 했으니까.
“어릴 때 친했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스텔라의 불퉁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모드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레오노라가 솔로아 소공작님과 친밀한 사이였어요?”
이아론의 아버지 실뱅은 늘 그녀 앞에서 하차니아 공작가가 북부에 홀로 틀어박혀 외딴 섬처럼 지내는, 끈 떨어진 연이라고 무시하곤 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솔로아 소공작과 친해진 거지?’
놀란 모드의 얼굴을 힐긋한 스텔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한다.
“어릴 때 교류가 잦았다던데 몰랐어요? 모드 영애, 레오노라 공녀의 사촌이라면서요?”
스텔라의 의아한 물음에 모드는 흠칫 몸을 떨며 새침하게 입을 삐죽였다.
“레오노라는 음침해서 친인척에게도 자신의 일을 털어놓는 법이 없는 아이예요. 아이답지 않게 음흉하고 간사한 구석이 있죠.”
“…딱히 음침한 건 모르겠던데.”
바주카포로 시원시원하게 언덕을 날려 버리던 레오노라의 모습을 떠올린 스텔라는 모드의 말에 동의하지 못하고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스텔라 공녀님은 레오노라를 잘 모르세요! 음침하게 여태 무기와 슈발리에를 숨기고 있었던 것만 봐도 성격이 보이지 않나요?!”
스텔라는 제게 얼굴을 바싹 붙이고 목소리를 높이는 모드를 피해 반보 물러나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열을 올리고 난리예요?”
“제가 그간 레오노라에게 당한 게 있어서…!”
“알겠으니까 비켜봐요. 나도 운영 위원들이 하는 말을 듣고 싶으니까.”
스텔라는 슈발리에로 선발된 바리스탄, 라르스, 그리고 트리스탄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는 돔 중앙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가는 길 내내 군중석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는 레오노라를 찬양하거나 비하하는 말뿐이었다.
“하차니아의 공녀가 솔로아의 소공작을 제 기사로 삼았다네요.”
“이 정도면 이미 쁘띠 플뢰르를 뛰어넘은 인재 아닌가요?”
“루카스 황자의 마나를 이어받은 사생아라는 소문이 있던데, 그럼 출신이 조금 걸리네요.”
“하이고, 그런 말은 입에도 담지 마십시오! 죄 거짓부렁이라는 게 밝혀진 지 오래입니다.”
‘레오노라 공녀가 완전히 관심의 중심에 서 버렸네.’
이렇게 되면 쁘띠 플뢰르의 승패는 이미 갈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쉽긴 했지만, 상대의 저력이 너무 엄청 났기 때문에 딱히 미련이 남지는 않았다.
스텔라는 트리스탄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구부정하게 몸을 수그린 채 덜덜 떨고 있는 제 슈발리에, 바리스탄 경을 힐긋하며 끌끌 혀를 찼다.
‘라르스 경도 승부를 거의 포기한 것 같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깃발잡기를 하는 동안 레오노라와 짧게 대화를 하는 것 같았던 라르스는 승부를 포기한 사람처럼 검까지 내려놓고 있었다.
“그럼 이제 쁘띠 플뢰르 선발을 위한 명예 전투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회의를 끝낸 운영 위원의 말을 시작으로 기사 셋이 동시에 발도했지만, 스텔라의 예상대로 슈발리에의 명예 전투는 눈 깜짝할 사이 끝이 나고 말았다.
“올해 쁘띠 플뢰르의 우승자가 발탁된 것 같군요!”
운영 위원은 트리스탄과 검을 맞부딪히기도 전에 무릎을 꿇은 바리스탄과 라르스를 번갈아 바라보다 선정이 끝났다는 의미로 붉은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럼 지금 바로 우승자를 호명하겠습니다!”
본선의 마무리를 어떻게 지을지 이미 전부 상의가 끝난 후였다.
그러나 운영 위원의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비밀 심사 위원 중 한 명이 허둥지둥 돔 중앙으로 나오는 모습이 마경에 비쳤다.
“잠깐! 아직 심사 위원들이 점수를 다 매기지 않았어요!”
“하지만 깃발잡기의 연장선이나 마찬가지인 명예 전투의 승리를 솔로아 소공작님이 거머쥐시지 않았습니까?”
레오노라의 우승이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딴지를 거냐는 듯, 비밀 심사 위원-이미 추기경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지만-을 마주한 운영 위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여전히 레오노라 공녀가 반칙을 썼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0점을 주겠어요.”
쁘띠 플뢰르의 비밀 심사 위원은 단 셋뿐인지라 한 명 한 명의 점수가 매우 중요했다.
카라의 불공정한 판단에 기가 막힌 운영 위원장이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덩치가 거대해 제 정체를 숨기지 못하고 있던 비밀 심사 위원이 그보다 먼저 한 발자국 걸어 나왔다.
“정체를 완전히 밝히지도 못하면서 상대의 승리를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이 상당히 추하군, 자네.”
“뭐, 뭐라고요?”
“마땅한 이유도 없이 참가자에게 0점을 매길 거라면 적어도 자신의 이름이라도 밝히는 게 맞지 않겠나.”
비뚜름히 올라간 그의 입꼬리가 아까 제 신분을 들먹이며 운영 위원들을 압박한 카라를 비웃고 있었다.
“그건 쁘띠 플뢰르의 규칙에 어긋나는-!”
변명하듯 카라가 입을 연 순간,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가면을 벗겨 냈다.
“헉!”
카라는 만천하에 드러난 제 얼굴을 가리기 위해 허둥지둥 팔을 들었지만, 이미 마경이 그녀의 얼굴을 비춘 후였다.
“움화화.”
어디선가 어린아이의 사악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