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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122화 (122/486)

제122화

“그럼 도대체 우리 말고 누가 너의 슈발리에를 맡을 수 있다는 건데?”

내 말이 언짢다는 듯 잘생긴 눈썹을 휙 소리가 날 정도로 찌푸린 에녹이 입술을 삐죽인다.

“어차피 같은 가문 출신의 기사는 슈발리에로 삼을 수 없다는 게 룰이었잖아.”

나는 잔뜩 흥분한 에녹은 도무지 내 말을 들어먹을 것 같지 않아 대신 실비를 돌아보았다.

‘그나마 실비는 말이 통하는 편이니까.’

희망을 담아 특유의 냉기가 흐르는 단정한 미남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우리 집 둘째를 올려다보자,

“성이 문제라면, 바꾸면 그만이다.”

실비가 표정 한 번 흐트러뜨리지 않고 차분히 대꾸한다.

“…멀쩡한 성을 갈긴 왜 갈아!”

쁘띠 플뢰르가 뭐라고 공작가의 차남이 멀쩡한 제 성을 바꾼단 말인가.

실비의 말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은 나는 도대체 누가 내 슈발리에인지 헷갈려하는 운영 위원에게 다가섰다.

“죄송해요. 슈발리에 소개가 너무 늦었죠?”

짝- 소리가 나게 손뼉을 치자 아까 바리스탄과 라르스가 걸어 나왔던 슈발리에의 대기실에서 길쭉한 인영이 느긋하게 걸어 나오기 시작한다.

느긋하지만 워낙 헌칠한 덕인지 인영은 금세 돔의 중앙을 지나 내 앞에 당도했다.

“오랜만이야, 레오노라.”

듣기 좋을 정도로 적당히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진다.

그의 말마따나 정말 오랜만이긴 했다.

나는 키가 훌쩍 자라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도 큰 것 같은 남자주인공을 마주하며 생긋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내 대답에 살짝 고개를 끄덕인 트리스탄은 그대로 허리를 숙여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소, 솔로아 소공작님!”

놀란 운영 위원의 외침에 그의 정체를 알게 된 사람들이 술렁인다.

“레오노라 공녀의 슈발리에가 등장했습니다! 트리스탄 솔로아 소공작입니다…!!!”

언제 다시 켜졌는지 모를 마경과 함께 중계 위원이 다시금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놀랄 만도 하지.’

트리스탄은 그의 어머니와 조우한 이후, 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돌만큼 몇 년이나 두문불출했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등장한 남주의 빛나는 미모에 사람들이 다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돔 곳곳에서 울려 퍼진다.

“제가 슈발리에로서 레오노라 공녀의 명예를 지키겠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제게 쏠리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듯 비스듬히 고개를 꺾은 트리스탄이 오만한 미소를 입가에 내건 채 짧게 선언한다.

“솔로아 소공작이라면 써머나이츠의 오러를 마스터했다는 소문이 도는 기사 아니야?”

“이미 기사단장인 바리스탄을 발아래에 깔고 뭉개는 수준의 실력자라고 하던데!”

마경을 통해 사람들에게 상황이 꽤 자세히 중계되고 있기 때문인지 군중석은 점점 더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계절의 검에 속하는 라르스 경에게 비할 수준은 아니지 않을까요?”

결과가 뻔하다고 생각해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했던 깃발잡기와 달리 슈발리에의 명예전투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이 커져 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후후. 트리스탄이 뒤늦게 등장하면 이런 효과가 있을 줄 알았지.’

사람들이 기대하지 못했던 괴력으로 한 번,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인맥으로 두 번.

단단히 각인시켰으니, 쁘띠 플뢰르를 지켜보고 있는 모든 귀족들은 오늘 이후로 내 이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잘 커 줘서 고맙다, 남주야.’

나는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웅크린 바리스탄을 무심하게 쳐다보는 트리스탄을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순간, 한풀 기가 꺾인 에녹 옆에서 뚜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히스가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인다.

“제 가문이 한미해서입니까.”

나는 히스의 뜬구름 잡는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히스의 가문이라면 티에리 자작가였고, 그를 티에리에 입적시킨 장본인이 다름 아닌 나였다.

“아그네스의 가문이 한미하다고 생각했으면 애초에 히스를 입양하라고 하지도 않았을 거야.”

“하지만 공녀는 저자와 내 힘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눈이 없지 않습니다.”

나는 히스의 차분한 말에 꿀 먹은 병아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당연히 히스가 더 강하다는 걸 모르진 않지만….’

그는 여기서 더 눈에 띄면 위험에 노출될 확률만 높아질 뿐이다.

나이를 먹지 않는 세계관 최강자라니, 이미 인간 병기로 이용만 당하고 살았던 그의 힘을 탐낼 사람들이 속출할 타이틀 아니던가.

나는 히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은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당분간 저택 밖으로는 아예 안 나오는 게 좋겠어.”

제 의문에 답하지 않는 내가 불만인 건지 표정을 풀지 않던 그가 내 말에 천천히 사람답지 않게 예쁘장한 얼굴을 끄덕인다.

“그게 공녀의 명을 어긴 벌이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벌 같은 거 아니야. 나는 네가 걱정되어서-”

“마력이 부족한 것도, 검술 실력이 부족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선택하지 않은 건….”

내게 가까이 다가온 히스의 목소리가 천천히 잦아든다.

나는 죽은 식물의 호흡처럼 힘이 없는 소년의 눈빛에 당황해 입술만 꾹 깨물었다.

“내가 인간 같지 않아서입니까.”

“……뭐?”

“나를 숨기려고 하는 이유도 역시 그 때문이겠죠. 내가 괴물 같아서.”

나는 무언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만 같은 히스의 말에 자그마한 이마를 짚은 채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내가 널 그렇게 보고 있지 않다는 거 잘 알잖아.”

“그렇다면 가문입니까? 저 소년은 공녀의 가문인 하차니아와 비슷한 가문의 소공작, 저는 일개 자작가의 영식일 뿐이니.”

나는 땅굴을 파다 못해 포크레인을 몰고 온 듯한 히스의 말에 슬슬 신경질이 나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너 왕이었잖아!’

게다가 마도왕국 아크레아는 무려 제국으로의 칭제를 앞뒀을 만큼 강대국이었다.

‘이 세계에 제국이라면 윌레닌과 캅사르, 단 두 개뿐이었는데!’

나는 제 출신을 까무룩 잊은 듯한 히스의 모습에 기가 막혀 턱을 벌렸다.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나와 트리스탄을 번갈아 바라본 히스가 느릿느릿 말을 덧붙인다.

“다행히 이 제국에서는 작위를 얻어 낼 방법이 다양하다고 들었습니다.”

“……뭐?”

도대체 누가 히스에게 그런 말을 해 줬다는 말일까.

티에리나 우리 집안 사람들은 히스의 신분 상승을 바란 적이 없으니 그런 말은 꺼낸 적도 없을 터였다.

“누가 그런 말을 했어?”

히스에게 접촉한 사람을 알아내기 위해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였지만, 소년은 내게 대답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히스, 잠깐만!”

빠르게 멀어져가는 히스의 손목을 막 붙잡으려는 순간이었다.

“섭섭하다.”

부쩍 커다래진 몸을 자랑이라도 하듯 나와 히스 사이에 끼어든 트리스탄이 적당히 도톰한 입술을 벌려 한숨을 내쉰다.

“이렇게나 오랜만에 보는데 반갑다는 말조차 없군.”

“반가워요, 당연히 반갑죠!”

나는 서운한 기색이 가득한 트리스탄의 말에 반색하며 대답했다.

“내가 필요하다는 너의 말에 적랑의 특훈 일정까지 바꿔 가며 한달음에 달려온 나를 아는 척조차 해 주지 않았으면서.”

‘이 새끼는 몸만 자랐나?’

나는 트리스탄의 투덜거림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실비가 특훈 일정 바꾸겠다는 것도 겨우 뜯어말렸는데, 트리스탄은 아예 내게 말도 없이 훈련을 미뤄 버렸구나.’

차기 기사단장들이 이래도 되는 건가 싶다.

“트리스탄이 반갑지 않은 게 아니라, 히스랑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

오늘의 히스는 도무지 내가 아는 얌전하고 순진한 히스 같지 않았다.

‘가끔 나와 관련된 일이라면 묘하게 고집을 부릴 때가 있긴 했지만… 뭔가 이상해.’

찝찝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채 히스가 사라진 방향만 힐긋하는 내 어깨를 붙잡은 트리스탄이 불쑥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마주한다.

“구휼원에서 데려온 그 아이 같던데.”

“네, 맞아요.”

“성장이 느린 편인가 보군.”

나는 변하지 않는 히스의 모습을 보고 혼자 판단하는 트리스탄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저 소년을 곁에 두고 있었던 건가. 너다운 결정이긴 하지만….”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트리스탄의 맑은 금안이 햇볕을 받아 순금처럼 반짝인다.

‘외모 하나는 남자주인공감 인정이라니까.’

나는 아직 성인이 되지도 못했는데 벌써 완성형 미모를 갖춘 트리스탄을 올려다보며 느릿느릿 눈을 깜빡였다.

“너는 여전히 걱정될 정도로 상냥하군.”

“……네?”

나는 그늘진 트리스탄의 눈빛에 할 말을 잃고 기운 빠진 고개를 기울였다.

“영지에 틀어박혀 아버지의 목을 겨누는 것에만 집중하면서도, 틈만 나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넌 너무 착하니까.”

“…….”

“그래. 날개 잃은 천사가 나의 레이디라면, 스승의 목에 검을 겨누는 것도 서슴지 않는 게 슈발리에인 나의 몫이겠지.”

‘트리스탄… 솔직하지 못한 전형적인 까칠남주 아니었어?’

이건 솔직하다 못해 오그라든 주먹이 안 펴지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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