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116화 (116/486)

제116화

“슈발리에를 안 데려가겠다고?”

내 발언에 발표회장에 있었던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놀란 실비와 에녹이 입을 쩌억 벌린다.

“응.”

나는 여상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라비가 내온 쿠키를 한 움큼 집어 들었다.

“어째서? 아무리 사람들이 지켜보는 공식 대회라지만 기사가 나서는 이상 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혹시라도 내 목이 막힐까 봐 밀크티를 서둘러 따라 준 에녹이 예쁜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삐죽인다.

“쁘띠 플뢰르가 뭐라고 네가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거야.”

“내가 슈발리에로 참가하겠다.”

불만 가득한 에녹 옆에서 묵묵히 자리만 지키던 실비가 무뚝뚝한 입을 연다.

“백랑 훈련은 어쩌고? 이번 훈련 전투의 임시 사령관으로 뽑혔다면서.”

“다음 기회를 잡으면 된다.”

나는 기사단장 후보에 이름을 올리는 데 크게 도움 될 기회까지 마다하겠다는 실비의 태도에 기가 막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차피 같은 가문의 기사는 슈발리에로 선정할 수 없어, 실비.”

“내 얼굴로 출전할 수 없다면 위장 아티팩트라도 써서….”

“맞아, 형이 안 된다면 나라도!”

“그런 반칙은 저지르고 싶지 않아.”

내 단호한 거절에 실비와 에녹의 얼굴에 절망감이 어린다. 무도회의 파트너로 오빠들 대신 히스를 데려갔을 때보다도 더 격한 반응이라 나는 떨떠름한 뺨을 긁었다.

“전 참가할 수 있습니다.”

시무룩한 에녹과 실비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히스가 기회라는 듯 빠르게 입을 연다.

“전 하차니아 공작가의 일원이 아닙니다.”

“하지만 넌 기사가 아니잖아, 히스.”

슈발리에는 기사의 역할이었다. 물론 한 나라의 왕이었던 소년이니 검을 어느 정도 수준으로는 다루겠지만, 히스는 어디까지나 마법사였으니까.

‘내가 못 미더워서 그러나?’

나는 미간을 좁힌 채 내 거절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끙끙 앓는 남자 셋을 돌아보다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내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래. 다들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생긋 웃으며 방을 벗어나는 뒤통수로 따가운 시선이 동시에 꽂힌다.

* * *

방을 나선 나는 루카스의 집무실로 방향을 돌렸다.

똑똑.

“…….”

똑똑똑.

“…….”

무슨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지 루카스는 내가 집무실에 들어온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창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루카스.”

“아.”

내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루카스가 나를 돌아본다. 나는 바람에 흩날리는 그의 검은 고수머리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어, 루카스?”

요즘 루카스가 이상했다.

가주 일에 관심이 없어 대충하긴 했어도 지장을 줄 정도로 정신줄을 놓은 적은 없었는데 요즈음의 그는 어디 나사 하나 빠진 로봇처럼 굴곤 했다.

“어디 몸이라도 아픈 거야?”

나는 책상 구석에 잔뜩 쌓인 서류더미를 흘깃하며 그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아니.”

내 물음에 그가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그의 대답을 믿지 못하고 그의 무릎에 달랑 앉았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열은 나지 않는지 루카스의 이마를 짚자 티 나지 않게 잠시 움찔한 그가 천천히 두 눈을 감는다.

“그래. 정말 아프지 않다.”

“그럼 다행이고.”

나는 한가득 쌓인 서류를 힐끔하며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루카스의 뺨을 짚었다.

“혹시라도 아픈 거면 일 걱정은 하지 마. 헨리를 불러오면 되니까.”

경악하는 헨리의 얼굴이 순간 눈앞을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바람에 모서리가 팔랑이는 서류를 붙들었다.

“…공녀.”

언제 다시 눈을 떴는지 그런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루카스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인다.

‘오랜만이네. 루카스가 나를 공녀라고 부르는 거.’

이제는 제법 친해져서 이름으로 불러 주곤 했는데.

나는 살짝 거리감이 느껴지는 루카스의 호칭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응. 왜?”

“지금 날 걱정하는 건가?”

“당연한 걸 물어보고 그래. 가주가 아프면 큰일이잖아.”

나는 루카스의 물음에 장난스레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난 진짜 가주도 아닌데.”

내 말에 루카스가 불퉁한 입을 연다.

‘에이. 진짜 가주 아니라고 풀 죽은 거였어?’

황제위를 노리던 사람이었으니 임시로 공작위를 맡았다는 생각에 기분이라도 상한 건가.

“원래도 가주 아니었잖아, 루카스.”

나는 나름대로 그를 위로하기 위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우리 아빠 돌아올 때까지는 톡톡히 자리를 지켜 줘야지.”

“…….”

“그러겠다고 약속했잖아. 나도 루카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까, 루카스도-”

그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종알종알 입술을 움직이던 나는 순간 눈에 들어온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 입을 꾹 다물었다.

“……루카스, 얼굴이 왜 그래?”

너무 당황해서 목소리까지 떨려온다.

루카스가 꼭 울 것만 같은 얼굴이었으니까.

“우, 울어?”

언젠가 가스파르가 우는 것은 본 적 있지만, 루카스가 우는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무뚝뚝한 가스파르보다도 훨씬 더 냉정하고 무감한 사람이었다.

허둥지둥 루카스의 눈가를 닦아 주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는 재빨리 몸을 뒤로 빼며 내 손을 피해 버렸다.

“아니. 그럴 리 없지 않나.”

천천히 내 의심을 부정하는 루카스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태연했다.

일그러졌던 얼굴이 전부 내 착각이었다는 것처럼 빠르게 수면 아래로 사라진다.

‘잘못 본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꺼림칙한 기분을 쉬이 떨쳐 내지 못했다.

* * *

뤼지앙 후작이 추기경 카라의 사주를 받고 여자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소문은 바하무스 전역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당연하지. 일간특급에 대문짝만하게 실렸으니까.’

일간특급을 발행하는 발렌타인 사의 사장은 분명 쓰레기였지만, 가십지의 흥행을 위해서라면 제 후원자-아이네스-를 배신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 공평한 쓰레기였다.

나는 추기경의 집무실 바닥에 툭 떨어져 있는 일간특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를 대신전까지 불러낸 네르바를 돌아보았다.

“예하, 저를 부르신 이유가 있으시다면 말해 주지 않으실래요?”

쁘띠 플뢰르 본선 준비로 나름 바쁜 몸이다, 이거야.

내 재촉에 입술만 달싹이며 뜸을 들이던 네르바가 내게 천천히 다가온다. 발레리만큼 장신인 그녀가 가까이 다가서자 긴 그림자가 내 몸을 뒤덮었다.

“…어째서 내 정보를 발렌타인 사에 넘기지 않은 거지.”

예상한 질문인지라 나는 네르바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예하께서는 피해자니까요. 그리고 성직자의 세계는 피해자라고 해도 성과 관련된 추문은 피해가기 어려운 곳이고요.”

아직까지 ‘약탈혼’ 따위가 존재하는 세계였다.

현대에서도 성폭력 피해자는 수치심을 느끼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는데, 유독 보수적인 이곳 신관들의 반응은 오죽할까.

“확실히 그렇지.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해도 호사가들은 알랑 뤼지앙이 벌인 일을 내 약점이라고 떠들어 댈 터.”

“네. 그래서 예하를 보호해 드리고 싶었어요.”

내 설명에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인 네르바는 한숨을 푹 내쉬며 거대한 안락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알랑 그 자식이 감히 나를 노리고 있었다니. 공녀의 예지몽이 아니었다면 정말 꼼짝없이 당할 뻔했어.”

신성력이 있다고 거짓말을 한 적은 없지만, 네르바는 꼼짝없이 내게 예지와 관련된 이능력이 있다고 믿게 된 모양이었다.

“늦지 않게 용병을 보내 줘서 정말 고맙네. 교황 성하께서 괜히 공녀를 시동으로 삼고 싶어 하시는 게 아니었어.”

발레리가 나를 볼 때처럼 흥미와 호의, 그리고 탐욕이 깃든 눈으로 나를 흘긋한 네르바가 무성의한 손으로 소파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기 시작한다.

“자르사워 용병단의 위용은 내 익히 들어왔지만, 그토록 흔적 없이 일처리를 할 수 있는 용병이 존재할 줄이야….”

나는 내가 용병을 이용해 자신을 구했다고 알아서 납득해 주는 네르바의 말에 낼름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죠. 뤼지앙 후작을 박살 낸 건 자르사워 용병단의 특급 용병들이랍니다.”

나는 여덟 살 응애라 성폭행범 낭심 박살 내는 것 따위는 할 줄 모르는 걸로 해야지.

“그래, 공녀. 보상으로 내게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봐.”

네르바는 무뚝뚝한 추기경답게 내게 엄청난 호감을 표하고 있진 않았지만, 나는 그녀가 지금 내게 마음 깊이 고마워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신전이 보관하는 성물이라도 빼내 달라고 하면 빼내 주겠지만….’

그건 황금알을 낳는 오리의 배를 가르는 짓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난 귀찮은 건 딱 질색이라 쁘띠 플뢰르의 심사위원 따위는 맡지 않았지만 공녀가 원한다면 힘을 써 줄 수는 있네.”

“예하, 사실 전 쁘띠 플뢰르 같은 건 사실 관심도 없어요.”

당연했다.

차기 사교계의 꽃이라니? 멜리사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 따위 빼앗아서 뭐하겠는가.

“제 눈은 조금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죠.”

“설마 교황의 자리라도 노리는 건가?”

“어릴수록 꿈을 크게 꾸라고 하잖아요. 발레리 성하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교황위는 제겐 조금 시시한 자리라서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