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교황은 루카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의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말과 함께.
그 선택의 말로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야만 했다.
“…당신을 죽이게 되면 공녀의 온 원망을 다 내가 사게 되겠지.”
레오노라는 더는 지금처럼 루카스를 보고 웃어 주지 않을 것이다.
장난을 걸지도, 진짜 ‘가족’처럼 그를 아껴 주지도 않을 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루카스는 레오노라가 우는 모습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울 압빠 돌려조!!!”
자신을 원망하듯 목소리를 높였다가도 금세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던 그 바보 같은 얼굴을, 정말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역시 어쩔 수 없나.”
교황이 루카스의 몸을 보관하는 귀빈실 구석에 앉아 의식 없는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는 곧 살금살금 제 몸에 접근하는 쥐새끼를 발견할 수 있었다.
“후후, 전하…. 저예요, 멜리사. 제가 보고 싶으셨죠?”
왕녀는 의식이 없는 루카스에게 안기려다가 결계에 튕겨져 나갔음에도 다시 발딱 일어나 황자의 발에 입을 맞췄다.
루카스는 그 꺼림칙하고 기괴한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레오노라가 지금 이 장면을 목격했더라면 중얼거렸을 말이 떠올랐으니까.
“도른년.”
분명 그리 말했을 터였다.
“왕녀, 지금 뭐하고 있는 건지 물어봐도 되겠나.”
제 등뒤로 쓱 고개를 들이민 루카스의 행동에 화들짝 놀란 멜리사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다 뒤로 엎어진다.
“가, 각하!”
“루카스 황자의 저주를 푸는 건 교황 성하의 몫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물론 루카스 본인은 교황이 자신의 저주를 풀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루카스의 설명에 하얗게 질린 왕녀가 덜덜 떨며 자신을 변명하듯 입을 연다.
“…가, 감히 성하가 보호하는 황자 전하를 건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그저… 그저 전하가 정말 그리워서.”
물기 젖은 멜리사의 촉촉한 눈에 루카스는 기가 막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 미소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멜리사가 빠르게 말을 덧붙인다.
“황자 전하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거예요, 각하. 그러니 부디 교황 성하께는 알리지 말아 주세요.”
“그대가 루카스 황자와 그토록 애틋한 사이인지 몰랐는데.”
루카스는 비스듬히 고개를 꺾은 채 바닥에 주저앉는 왕녀를 내려다보았다.
멜리사 아스텔리우.
루카스가 황자였던 시절에도 사교계의 꽃이었던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끈질길 정도로 루카스의 애정을 갈구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다정한 눈빛조차 내보인 적이 없었다.
“루카스 전하는 고독한 분이셨으니까요. 각하께서 저와 전하의 사이를 모르시는 게 당연하죠.”
하지만 멜리사는 뻔뻔하게도 자신이 정말 루카스의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색 한 번 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는 믿을 수 있는 친구도, 심지어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사람도 없는 분이었어요. 황자님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오직 저뿐이었답니다.”
언뜻 들으면 퍽 구구절절한 사연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은 루카스를 앞에 두고 혼자 감정이 벅차오른 멜리사가 두 손을 하늘 높이 벌린다.
“오직 저만이! 저 멜리사 아스텔리우만이 황자 전하의 몸이라도 보호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던 거예요. 세상이 저를 스토커로 오해하고 있을 뿐이에요!”
허, 어이가 없어진 루카스가 짧게 헛웃음을 내뱉자 멜리사는 그의 조소를 반박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루카스 전하는 의식이 있으셨을 때도 늘 외로운 분이셨어요. 의식이 없으신 순간조차 외롭게 두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루카스를 잘 아는 것처럼 사족을 덧붙이는 멜리사를 빤히 바라보던 그는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글쎄. 딱히 외롭다고 느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없는 게 당연했다.
그는 곁에 사람이 없는 게 너무 익숙한 사람이었으니까.
‘있다가 없어져야 빈자리라도 느껴지는 법이지.’
루카스는 문득 자신이 사라지면 레오노라가 그를 찾아 줄지 궁금해졌다.
‘조금은 슬퍼해 줬으면 좋겠는데.’
공작이 없어졌을 때만큼 많이는 아니더라도, 아주 조금은.
“황자 전하가 사라졌을 때 그 누구도 황자 전하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외로운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잖아요.”
멜리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루카스가 사라졌을 때, 황위에 오른 그레고르의 눈총을 사면서까지 사라진 황자를 찾기 위해 나선 무리는 없었으니까.
“각하와는 전혀 다른 분이었어요.”
루카스의 타는 속을 모르는 멜리사는 루카스와 가스파르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되새겨 주기라도 하듯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만약 각하께서 황자 전하처럼 갑작스레 사라지신다면 난리가 나겠죠.”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일단 각하의 가족, 그러니까 자녀분들이 각하를 무척 따르는 것 같았으니까요.”
루카스는 멜리사의 말에 쑥스러움을 타는 듯하면서도 자신을 곧잘 따르는 실베스테르나 툴툴대면서 제 곁을 맴도는 에녹, 그리고 레오노라를 떠올렸다.
“그러니 각하는 황자 전하와 제 사이를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그런가.”
멜리사의 말이 맞았다.
지금의 그는 멜리사의 일방적인 애정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그가 깨달은 ‘사랑’은 그런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각하께서 사라지시면 공녀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지 않겠어요? 유난스러운 아이니까요.”
“공작이 사라진다면 말이지.”
멜리사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린 루카스는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사람 한 명 곁에 두지 못할 정도로 날을 세웠던 제 과거와, 레오노라로 인해 빛이 스며든 자신의 현재가 번갈아 떠오른다.
“그 아이는 나 같은 인간에게조차 상대를 위한 희생을 감내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군.”
자신이 없어져서 레오노라가 웃을 수 있다면, 제 아버지를 되찾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괜찮지 않나 싶은 생각이 불쑥 머릿속을 잠식한다.
이 마음을 감히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 *
“내 출장에 공녀가 직접 호위를 붙여 주겠다고?”
불쑥 제 집무실에 찾아온 내 말에 네르바 추기경이 휘둥그레 눈을 뜬다.
“네. 특급 용병단인 자르사워 용병단에서도 1티어로 손꼽히는 기사들이에요. 예하를 호위하기에 손색이 없을 자들이죠.”
“쁘띠 플뢰르 때문에 내게 잘 보이려는 거면 소용없어. 난 비밀 심사위원이 아니거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처럼 말하는 네르바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네르바 추기경 예하가 조금 걱정이 되어서요.”
“…공녀가 내 걱정이라, 어째서지?”
“예하와 뤼지앙 후작님이 나오는 이상한 꿈을 꿨어요. 깨고 나서 기분이 무척 안 좋아지는 그런 꿈이요.”
“예지몽을 꾸는 능력이라도 있다는 건가? 공녀에게서 성력이 느껴지진 않는데.”
네르바는 내 말이 우습다는 듯 피식 웃었지만, 곧 교황인 발레리가 나를 시동으로 삼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을 떠올렸는지 턱을 굳혔다.
“뭐, 자르사워 용병단의 기사들이라면 신용도 좋으니 믿을 수 있지. 공녀의 호의는 고맙게 받겠네.”
“네, 예하. 부디 몸조심하세요.”
“하지만 알랑 뤼지앙을 걱정하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내 오랜 친구인데다 소심해서 내게 해코지를 할 배짱이 없는 놈이거든.”
뤼지앙 후작을 부추기는 사람이 없다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네르바의 알현실을 빠져나와 원작을 펼쳐 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
“야, 약탈혼이라니?”
알랑 뤼지앙은 기본적으로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평소의 카라답지 않은 과격한 말에 화들짝 놀라 소파에서 일어났다.
“나보고 네르바와 약탈혼을 올리라고?”
알랑 뤼지앙이 네르바 추기경을 짝사랑한 지 어언 1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그가 그녀를 연모한다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지만, 약탈혼을 부추기는 사람은 카라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카라는 자신의 제안이 전혀 이상한 게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찻잔을 소서에 내려놓았다.
“기본적으로 신관은 결혼을 할 수 없어, 알랑. 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네르바에게 네 마음을 쉬이 전하지 못하고 있는 거잖아.”
“하지만 약탈혼은 나보고 네르바를 거, 겁간하라는 말이잖아!”
잔뜩 겁을 먹은 알랑의 외침에 카라는 그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네르바도 사실은 마음 속 깊이 널 원하고 있어. 신관은 결혼할 수 없다는 불문율 때문에 너를 멀리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모르겠니?”
“저, 정말?”
“그래. 하지만 약탈혼은 다르잖아. 겉보기에는 네르바의 의지가 전혀 개입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테니까. 네르바도 기뻐할걸.”
◈
* * *
미친 소리 하네.
아무리 생각해도 <아.황.장>은 19금 딱지를 붙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