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이본느 황비가 정체도 감추고 살롱을 운영하는 데는 이유가 있지.’
황실에서 감시하는 자신의 내탕금 외에도 개인적인 사유 재산을 운용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기억하는 원작에서는 그녀가 단순히 욕심이 많아서 이베트 부인 행세를 한다고 나오지만….’
실제로 만난 이본느 황비는 그런 느낌의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원작에서 이본느 황비가 살롱을 운영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소유한 정보 길드 때문이었어.’
이베트의 비밀 살롱은 주로 남자들이 운영하는 고급 클럽이나 마찬가지였다.
초대받은 소수의 귀족들은 전부 제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녀는 술에 취하거나 흥이 오른 귀족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고 가는 소문을 기반 삼아 정보 길드를 만들었다.
‘황비씩이나 되는 사람이 정보 길드를 세운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야.’
이베트의 정보길드 ‘주목 나무’는 지금은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을 만큼 작은 길드였지만, 아이네스가 성인이 되는 시점에는 제국에서 손꼽히는 길드로 성장한다.
<아.황.장>에서 이본느 황비는 아이네스를 괴롭힐 때나 주목 나무를 이용하지만, 사실 황비 정도나 되는 인물이 어린아이 한 명을 괴롭히기 위해 그만한 수고를 감내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이본느 황비, 그리고 이베트 부인에 대해서 알아 와 줘. 약점이 될 만한 구석을 찾을 수 있다면 더더욱 좋고.”
움후후.
이본느 황비를 이용해 아이네스에게 한 방 먹일 궁리를 하며 사악한 웃음을 흘리는데 자르파라가 커흑, 앓는 소리를 내며 제 심장에 손을 얹는다.
“…왜 그래? 어디 아파?”
“태양께서 웃으실 때마다 온 세상이 밝아지는 것만 같습니다…! 빛께서는 그토록 음흉하고 사특한 미소를 지으실 때조차 세상을 창명하게 밝히시니!”
“시끄러워, 자르파라.”
“더! 제게 더 매정하게 굴어 주세요! 짜릿해!”
“…….”
칭찬을 하는 건지 욕을 하는 건지 애매한 자르파라의 징그러운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나는 서둘러 그녀의 집무실을 벗어났다.
* * *
변형 아티팩트로 모습을 바꾼 자르파라는 제 수완을 발휘해 이아론 상단의 인건비를 날로 먹다시피 할 정도로 후려쳐서 아크레아의 함선을 바하무스 항구로 옮겨 왔다.
“배 하나를 북부에서 황도로 옮기는 데 십 골드밖에 안 들었다고?”
“대신 이아론 상단 측 물건을 실어 줬습니다. 그쪽에서도 나쁘지 않은 거래였을 겁니다.”
나는 내게 칭찬을 받고 싶어 안달 내는 강아지처럼 보이지 않는 꼬리를 흔드는 자르파라에게 척 엄지를 내밀었다.
“잘했어, 자르파라!”
“나의 태양께서 워낙 수전노시니까요. 돈 아끼는 데는 도가 텄습니다.”
‘요즘 자꾸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을 하네.’
“아! 그리고 이베트 부인과 이본느 황비에 대해서도 좀 알아봤습니다.”
떨떠름하게 턱을 긁는 나를 향해 자르파라가 초롱초롱 새빨간 눈을 빛낸다.
“이베트 부인은 나이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라 수집할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조금 있었습니다만, 이본느 황비는 그래도 빛께서 모르실 만한 사안들이 꽤나 있더군요.”
“예를 들면?”
“그레고르 황제와의 결혼이 초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원래 남편이 있던 여자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뭐?”
나는 자르파라의 말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황비인데 재혼을 했다고?’
원작에도 그런 정보는 나오지 않았었는데.
“르텔이라는 조그마한 영지를 가진 남작의 아내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사이도 아주 좋았다고 해요.”
나는 자르파라의 설명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설마 이본느 황비의 남편이었던 남작, 죽었어?”
“예. 그리고 남편이 죽은 직후 이본느 르텔은 황도에 올라와 그레고르 황제의 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레고르와 아이네스를 지독하게 미워했던 원작의 이본느 황비를 떠올린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빼물었다.
아무리 악역이라지만 어쩐지 권력과 부를 안겨 준 황제를 너무 싫어한다 싶었다.
‘그레고르가 이본느를 비로 들이기 위해 남편까지 죽였나 보네.’
아직 남편이 있는 여자라도 황제인 자신이 ‘간택’한다면 무조건 비가 되어야 한다는 악법이 제정되지 않았으니까.
미인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폭군 그레고르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미인을 물건처럼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으니 내가 섣부른 추측을 하는 건 아닐 터였다.
아이네스의 모친인 이네스 황후가 폭군 아빠의 찐사랑이라는 로판 공식을 깨지 않기 위해서인지 황후로 삼은 여자는 없었지만, 그는 정식으로 혼인한 비만 해도 여섯이었다.
“남작과 황비 사이에 아이도 하나 있었다는데, 르텔 남작가가 완전히 멸문당한 탓에 행방이 묘연합니다.”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자르파라가 덧붙인 말에 경악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설마 아이까지 죽인 건가?’
“수상한 점은 이베트 부인이 사람을 부려 찾고 있는 아이와 나이대가 일치해요. 둘이 관계가 있다고 보십니까, 빛이시여?”
‘아, 다행이다.’
이베트 부인이 이본느 황비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르파라는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나는 안심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잃어버린 제 아이를 찾기 위해 정보 길드를 세운 거였어.’
이제는 가물가물한 원작에 대한 기억을 헤집느라 양손으로 머리를 풀어헤친 나는 소파에 뒤집어진 채 드레스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 * *
◈
“…아, 아빠.”
“무슨 일이냐, 아이네스. 왜 손에서 피가 나는 것이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이네스 괜찮아.”
아이네스는 험악하게 굳은 그레고르의 얼굴에 당황한 ‘척’ 손을 내저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렇게나 피가 철철 나는데!”
손톱 밑에 거스러미가 뜯어져 육안으로는 제대로 볼 수도 없는 핏방울이 맺혔을 뿐이지만, 그레고르는 신경질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본느! 짐이 그리 경고했는데도 아이네스를 여전히 괴롭히는 게지!”
“아이네스 아프지 않아요, 아빠. 황비님 잘못은 절대 아니니까 황비 전하를 탓하지 말아 주세요.”
이본느 황비는 죽이 척척 맞는 부녀를 번갈아 바라보다 한숨처럼 웃었다.
“…그래요. 저 때문에 폐하의 따님이신 황녀 전하가 다치셨어요.”
“못된 여자 같으니!”
이본느의 대답에 그레고르는 손을 번쩍 들어 그녀의 뺨을 내려쳤다.
“제가 당신 딸을 괴롭히는 게 싫다면 저를 황궁에서 내보내 줘요.”
이본느는 새빨갛게 부어오른 제 뺨을 붙잡은 채 이미 여러 번 그레고르에게 주청한 말을 반복했다.
“황녀 전하도 저를 싫어하시잖아요.”
그러자 이본느의 말에 화들짝 놀란 아이네스가 주저앉은 그녀에게 다가가 웃으며 고개를 내젓는다.
“저, 황비님 싫어하지 않아요. 아이네스는 누구를 미워해 본 적이 없을 만큼 착한 아이인 걸요.”
“…….”
아이네스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이본느는 대답할 기운도 없어 입술만 꾹 깨물었다.
“그럴 수는 없소.”
황비의 체면도 잊고 바닥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이본느를 내려다보며 그레고르가 작게 혀를 차다 입을 연다.
“짐은 한 번 짐의 손에 들어온 보석은 절대 놓치지 않으니까.”
“전 물건이 아니에요, 폐하.”
“여자는 보석이나 꽃과 같은 존재일 뿐이지. 한 번만 더 황궁에서 나가고 싶다는 말을 입에 올리면 당신 아이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소.”
“……폐하!”
◈
* * *
자르파라가 놀랄 정도로 거칠게 책을 덮은 나는 아이를 애타게 찾고 있을 이본느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원작 책은 무척 유용하긴 했지만, 이제는 아예 쳐다보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전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레고르 이놈이 이본느의 아이를 인질로 잡았구나.’
그레고르가 아이를 숨길 만한 장소를 떠올린 나는 짝, 손뼉을 마주치며 자르파라를 돌아보았다.
“자르파라, 구휼원에서 데리고 나온 아이들 중에 이베트 부인이 찾는 아이와 인상착의가 일치하는 아이가 있는지 알아봐 줘.”
“아이 말입니까?”
“응. 되도록 빨리.”
“알겠습니다, 태양이시여.”
도대체 이 폭군 부녀는 몇 명의 삶을 박살 내야 만족하는 걸까.
‘하여간 썩어빠진 황실이라니까.’
내가 반드시 무너뜨리고 말 테다.
손에 붙든 원작 책을 쓸어내린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다짐했다.
* * *
쁘띠 플뢰르 예선전에 참가하는 후보들의 파티는 하루 간격으로 차례대로 진행되었다.
랜덤으로 배정된 순서는 내가 가장 마지막이었는데, 아직까지는 황도 내에서 가장 큰 살롱을 오십 골드로 대여한 모드가 가장 강력한 본선 진출 후보였다.
‘이 비싼 살롱을 고작 오십 골드로 대여했다니 이아론 후작이 입김을 넣은 게 분명하지만, 그 정도 도움은 증거를 잡기도 힘들 테니까.’
나는 내 파티가 얼마나 화려할지 두고 보겠다며 콧대를 세우던 모드의 얼굴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내가 준비한 연회를 당해 내지는 못할 걸.’
나는 아크레아의 낡은 함선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사람들을 살피며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