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108화 (108/486)

제108화

“공녀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군.”

교황의 말은 언뜻 협박처럼 들렸으나 루카스는 그녀가 단순히 레오노라를 걱정하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겁니까.”

그가 한숨처럼 묻는 말에 교황이 피식 웃으며 제 눈가를 매만진다.

“이 몸이 패왕안(霸王眼)의 소유자임을 잊었는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새하얀 백안.

동공과 흰자의 구분이 없어 모든 이들이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를 꺼려 했지만 레오노라만이 유일하게 그런 교황의 눈을 마주함에도 서슴이 없었다.

‘다른 이들 못지않게 두려울 테지만 내 기분이 상할까 저어돼 참는 것이겠지.’

발레리는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자신의 외로움마저 걱정해 주던 작은 소녀를 떠올렸다.

그녀는 씁쓸해진 입을 쓸어내렸다.

“공녀는 착한 아이지.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야.”

“알고 있습니다.”

“이미 어미를 여읜 어린아이에게 아버지까지 잃게 하고 싶은 건가.”

루카스는 교황의 말에 쉬이 입을 열지 않았고 발레리는 그런 황자를 재촉하지 않았다.

* * *

쁘띠 플뢰르 선발 예선전의 날이 다가왔다.

황도 중앙에 위치한 귀족원의 연회장, 로트실 연회홀은 쁘띠 플뢰르 선발전에 참가하는 어린 영애들과 가족들로 바글바글했다.

“지금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려 오신 분들을 위해 지금 바로 예선전의 내용을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토끼귀가 삐죽 솟은 하얀색 반가면을 뒤집어쓴 쁘띠 플뢰르 진행 위원이 단상에 올라 소란스러운 군중의 이목을 제게 집중시킨다.

“쁘띠 플뢰르는 작은 사교계의 꽃을 선발하는 대회입니다.”

흠, 작게 헛기침을 한 그는 정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위원회는 쁘띠 플뢰르가 사교계를 이끌 차기 후보를 가려내는 자리이니만큼 후보들이 파티를 주최하고 이끄는 능력을 보는 것이 알맞으리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남자의 설명에 쁘띠 플뢰르 참가가 결정된 영애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두 손을 맞잡고 침을 꼴깍 삼킨다.

원작 책을 아무리 뒤져 봐도 이번 쁘띠 플뢰르의 예선전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수 없었던 나도 긴장한 손을 루카스에게 뻗었다.

“내가 너무 젬병인 주제 같은 게 튀어나오면 어떡하지?”

“네게 못 하는 게 있을 줄 몰랐군.”

내 손이 쏙 파묻힐 정도로 커다란 손으로 내 손등을 쓸어내린 루카스가 피식 웃는다.

“걱정 마라. 너만큼 대회 준비에 열을 올린 참가자도 없을 테니.”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안심하지는 못했다.

‘티에리에게 특훈을 받고, 혹시 몰라서 카렌에게 검술 훈련까지 받았지만 파티 준비는… 딱히 해 본 적이 없는데.’

공작성의 파티를 주관하던 코제트를 그냥 수도에 데려올 것 그랬나.

“이번 예선전의 주제는 말 그대로 후보들이 제각기 준비할 파티입니다. 어떤 형식의 연회든 영애들 개인의 자유에 맡길 것이지만, 예산은 정해져 있습니다.”

짧게 설명을 덧붙인 진행 위원이 탁자 위에 내려놓은 돈주머니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보석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게 아니라면 소박하기 그지없는 크기였다.

“백 골드입니다.”

“배, 백 골드?”

“쁘띠 플뢰르 예선을 위한 파티를 어떻게 백 골드로 여나요? 너무 적은 금액이잖아요!”

남자의 말에 여기저기서 불만 섞인 탄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대회 측에서 준비한 예산을 벗어나거나 가문의 사유 재산을 사용하는 후보는 즉시 탈락 처리하겠으니 유의해 주십시오.”

그런 사람들의 불만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제 할 말을 끝마친 위원은 단상에서 내려와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너, 파티 준비 해 본 적은 있어?”

후보들에게 각각 지급된 갈색 돈주머니를 품에 안은 나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내게 다가오는 모드를 돌아보았다.

“없는데.”

“어머. 정말? 명색이 공녀인데 파티 준비를 해 본 적이 없다고?”

“우리 성 집사는 꽤 유능해서 말이야.”

이아론 후작성, 아니, 실뱅 소후작이 기거하는 후작성의 별채를 관리하는 집사의 능력은 모르겠지만 코제트는 공작 부인의 빈자리를 혼자 채울 수 있을 만큼 유능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집사가 유능해도 명문가의 연회를 주관하려면 안주인이 있어야 하는 법이야.”

“그래? 몰랐네.”

“아아. 그래서 공작성에서 연회가 잘 열리지 않는 거였구나~”

하차니아 공작가가 연회를 자주 열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내가 그런 자리를 귀찮아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나는 네가 너무 귀찮단다.’

하는 얼굴로 모드를 빤히 올려다보는데 내가 자신의 말에 기라도 죽었다고 생각했는지 후후 웃음을 흘린 모드가 제 머리를 배배 꼬며 입을 연다.

“나는 어머니를 도와 곧잘 후작성의 연회를 준비해 본 경험이 꽤 있거든. 하지만 넌 그럴 수 없었을 테니까.”

넌 엄마 없지 않냐는 말을 참 길게도 한다.

“아빠.”

나는 모드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기둥 뒤에 숨은 루카스에게 쪼르르 달려가 안겼다.

“왜.”

“모드가 자꾸 나 엄마 없다고 놀려요.”

“…뭐?”

이유는 모르겠지만 모드는 루카스에게 굉장히 잘 보이고 싶어 했다.

내가 제 못된 인성을 까발리자 화들짝 놀란 모드가 질색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 내가 언제 그랬어! 네가 연회 준비에는 익숙하지 않을 테니 도와주겠다고 한 말이야!”

당황한 모드는 루카스에게 재빨리 다가가 그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제가 그런 못된 말을 했을 리 없잖아요, 고모부. 저는 상냥한 고모님을 닮았다고 늘 칭찬을 듣는 아이인 걸요.”

“누가 네 고모부지.”

루카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물음이었지만, 모드는 제법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죄, 죄송해요, 각하.”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모드가 고개를 수그리든 말든 루카스는 골이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 누른 채 나를 돌아보았다.

“이만 가지. 어제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피곤할 텐데.”

남들이 듣기에는 언뜻 나를 걱정해 주는 말처럼 들렸지만, 내가 쁘띠 플뢰르 예선을 준비하느라 자신과 함께 자 주지 않았다고 또 투정을 부리는 말이었다.

“…네, 아빠.”

나는 루카스의 어리광에 기가 막혔지만 티 내지 않고 그의 품에 달랑 안긴 채 모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메-롱.

샐쭉 내민 내 혓바닥을 발견한 모드가 부들부들 어깨를 떨기 시작한다.

엄마는 없었어도, 나한테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아빠, 아니, 아빠처럼 보이는 루카스가 있었다.

* * *

쁘띠 플뢰르 예선전에 대해 알게 된 실비와 에녹은 나보다도 심각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백 골드라니 괜찮겠어, 리니? 파티는커녕 티타임도 준비하기 어려운 금액일 텐데.”

티타임 준비는커녕 참석하는 것도 본 적 없는데 에녹이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걸까.

나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끙끙 앓는 에녹과 실비를 흘깃했다.

“아빠 비자금이라도 털까? 비자금은 쓰는지 안 쓰는지 알아내기 어렵잖아.”

“그건 걸릴 확률이 높다. 차라리 내가 돈을 쓰지 않고 연회 준비를 도와줄 만한 사람들을 모집해 보겠다.”

나는 벌써부터 반칙을 저지를 생각만 하는 기특한 악당 꿈나무들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됐어. 반칙 같은 거 안 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예산이 단 백 골드라고 정해졌을 때는 막막했지만, 모드를 본 순간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었으니까.

‘이것도 모드가 아이디어를 준 건데, 이기면 꼭 고맙다고 해야지.’

그럼 또 얼마나 배 아파할까.

모드는 약을 올리면 올리는 대로 티가 나는 애라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움후후 사악한 미소를 흘린 나는 수도 내에서도 주요 상권에 속하는 지역을 차지한 자르파라 상단 건물에 들어섰다.

“빛이시여, 오셨나이까-!”

일반 직원들보다도 나를 제일 먼저 발견한 자르파라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상단주의 집무실에서 뛰쳐나온다.

“그대가 그리워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웠 나이다!”

“…우리 그저께도 봤잖아, 자르파라.”

“48시간이 4,800일 같았나이다~!”

자르파라의 한결같은 태도에 나직한 한숨을 흘린 나는 내가 반갑다며 방방 뛰는 그녀를 끌고 집무실에 들어섰다.

“인양한 아크레아의 함선을 바하무스 항구로 끌고 와 줘. 비용은 얼마나 들까?”

“저희 상단의 인력을 이용하면 30골드 정도?”

그럼 예산에서 70골드밖에 남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말에 느릿느릿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는 직원들 임금을 후하게 쳐주는 편이니까, 배 옮기는 일은 외부에 맡기자.”

“어디에 일을 맡기면 좋겠습니까, 빛이시여?”

“이아론 상단이 좋겠어. 나라에서 정한 최저임금도 안 지키는 상단이잖아.”

이 기회에 이아론 상단과 접촉해 유능한 인재가 낭비되고 있다면 빼오는 것도 좋겠지.

나는 자르파라의 책상에 쌓인 상단 관련 서류를 천천히 확인하며 움후후 사악하게 웃었다.

“이아론 후작가 쪽에서 내가 배를 옮기려고 한다는 걸 알면 방해할 수도 있으니까 차명으로 진행해 줘.”

“넵, 알겠습니다.”

“그리고 자르파라가 알아봐 줬으면 하는 게 있어.”

나는 얼마 전 살롱에서 만난 이본느 황비의 얼굴을 떠올리며 턱을 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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