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107화 (107/486)

제107화

“마담 아그네스의 드레스를 손에 넣기 위해 영애에게 살랑이던 꼬리는 다들 어디에 숨긴 건가요.”

자줏빛 반가면 아래로 드러나는 얄쌍한 입매가 매혹적인 호선을 그린다.

“드레스 자락 아래에 있나?”

“이베트 부인! 말씀이 지나치세요.”

“어린 영애에게 먼저 공격적인 언사로 시비를 건 클라하 부인께서 하실 말씀인가요.”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쥘부채를 접은 이본느 황비, 아니 이베트 부인이 티에리의 드레스를 트집 잡던 여자를 노려보며 말을 잇는다.

“부인께서는 앞으로 제 살롱에서 주최하는 모임에 참가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 지금 나를 당신 살롱에서 배제시키겠다는 건가요?”

이베트라고 불리는 묘령의 여인은 날카로운 클라하 부인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나를 돌아보았다.

“아래층은 조금 지루해진 것 같군요. 나와 같이 위층으로 올라가겠어요, 레오노라 영애?”

“영광이에요, 레이디 이베트.”

살롱에서 위층으로 올라가자는 말은 모임에 초대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주최자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소수 인원에 든다는 뜻을 내포했다.

이베트가 내게 내민, 힘든 일이라곤 한 번도 해 본 적 없을 것처럼 하얗고 고운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붙잡은 나는 계단 끝에 다다라서야 말문을 열었다.

“부인, 저를 왜 도와주신 건가요?”

“딱히 도와줬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내 물음에 비스듬히 고개를 꺾은 이베트의 목소리에서는 황족 특유의 고고함이 묻어 나왔다.

“클라하 백작 내외가 자꾸 살롱에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고 다녀서 내쫓을 핑계가 필요했던 참이니까.”

“……그래도 감사해요.”

내게 생색을 내려면 충분히 낼 수 있을 텐데도 이베트는 무뚝뚝하게 공치사를 거절했다.

‘황실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일지도.’

나는 그녀가 꽤나 외로운 사람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 * *

이베트가 운영하는 살롱의 2층에는 사교계의 중심이 되는 사람들이 이미 불려가 있는 듯싶었다.

수도 귀족 중에서도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는 중앙 귀족들과 대신관, 황실 기사 단장인 아키텐 경까지.

‘수도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살롱이라더니 정말로 별별 사람들이 다 모였잖아.’

나는 발렌타인사의 사장에게 뇌물까지 먹여 가며 일간특급에 <레오노라 공녀의 진실> 특집까지 실어 준 아이네스에게 다시 한번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 특집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베트 부인의 눈에 띌 리 없었을 테고, 살롱의 초청장도 못 받았겠지.’

쁘띠 플뢰르의 심사위원 목록은 대회 운영진의 엄격한 관리하에 비밀이 유지되고 있었지만, 그들이 전부 고위층 인사라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이베트의 살롱에 드나드는 사람들과 친분을 쌓으면 쌓을수록 상황을 내게 유리하게 만들 수 있을 거야.’

층에 자리 잡은 사람들을 주욱 살핀 나는 곧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네르바 추기경과 카라도 있었잖아.’

네르바와 카라는 황실 연회 때와 달리 서로 다른 무리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마담 이베트가 안내해 준 소파가 마침 네르바 근처인지라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네르바, 감사제 준비가 거의 끝나 간다면서.”

“누가 그래? 앞으로 할일이 태산인데.”

“또 내게 시간을 내주기 싫어서 거짓말을 하는 거야?”

네르바의 말에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이는 남자는 귀족원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뤼지앙 후작이었다.

“거절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야, 네르바. 나도 슬슬 기분이 상하려고 해.”

“네 기분이 상하든 말든 내가 왜 신경써야 하지?”

뚱한 목소리로 대답한 네르바는 뤼지앙 후작보다도 더 기분이 상한 얼굴로 자신을 붙잡으려는 그를 뿌리치며 자리를 벗어났다.

‘뤼지앙 후작과 추기경 네르바는 내 기억이 맞다면 학술원 동기였어.’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단순한 친구 사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멜리사와 루카스가 생각나는 일방적인 구애에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는데 자존심이 상한 듯 씩씩거리는 뤼지앙 후작에게 누군가가 다가온다.

“무슨 일이야, 알랑? 표정이 안 좋네.”

부드러운 목소리로 뤼지앙 후작의 안부를 묻는 사람은 카라였다.

‘아참, 카라도 제국 학술원에서 신학을 전공했었지.’

나는 뤼지앙 후작과 친밀해 보이는 카라를 흘깃하며 그들 쪽에서 내가 보이지 않게 몸을 수그렸다.

“네르바가 또 내 데이트 신청을 거절했어.”

“부끄러워하는 거야. 알잖아, 네르바는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속은 여린 소녀와 다름없다는 거.”

뤼지앙 후작의 기죽은 목소리에 후후 웃은 카라가 그를 다독이듯 말을 잇는다.

“이럴 때는 네가 남자답게 나서 줘야지.”

“어떻게?”

“조금 더 강압적으로 네르바의 시간을 빼앗는다든지. 네르바가 교황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거 알잖아? 귀족원을 통해서 압박할 수도 있고.”

“그러다 네르바의 기분만 상하게 하면 어떡하려고.”

“아무리 네르바가 추기경 자리에 올랐다지만 여자란 권력 있는 남자에게 혹할 수밖에 없는 법이야. 오히려 색다른 네 모습에 묘한 감정을 느낄걸.”

“역시 카라야. 너는 늘 날 위해 준다니까.”

“우린 친구잖아, 알랑.”

“고마워.”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이미 사라진 네르바를 찾아나서는 뤼지앙 후작의 등을 바라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추기경 카라는 정말 지독한 사람이었다.

‘이런 식으로 사교계를 휘젓고 다니는 거였구나.’

뤼지앙 후작가는 후계자에게 신학을 공부시킬 만큼 루엘라드교와 연이 깊은데다 귀족원 내에서도 입김이 대단한 명문가였다.

‘그런 명문가의 가주가 네르바 추기경에게 계속 추근덕대면 결과는 뻔하지.’

네르바와 뤼지앙 후작의 오해가 쌓이면 쌓일수록 뤼지앙 후작가의 명성은 빛이 바랠 터였다.

‘알면 알수록 말이 안 나오는 인성의 소유자잖아.’

루엘라드교가 뼛속까지 썩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추기경이 저토록 제 욕심을 위해서 추하게 살아도 되는 건가 싶다.

나는 카라가 은밀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저 짓거리를 못하게 하려면 우선 추기경 자리에서 끌어내려야겠지.’

소파 테이블을 가는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린 나는 네르바와 뤼지앙 후작, 멜리사 왕녀를 엮을 계획을 세우며 움후후 음산한 미소를 흘렸다.

‘작당 모의는 너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카라.’

* * *

고백하건대 루카스는 교황을 포함한 그 어떤 신관과도 사이좋게 지내 본 역사가 없었다.

‘이렇게 신관을 자주 만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군.’

윌레닌 제국의 황족이란 늘 대신전과 교황청과 아웅다웅 알력 다툼을 하는 족속이었으니까.

“당신 힘으로도 저주를 풀 수 없다는 말입니까.”

교황에게 건네기엔 퍽 예의 없는 어투였지만,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발레리는 무심한 입을 열었다.

“그래. 저 몸에는 저주를 건 당사자조차 풀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금술이 얽혀 있거든.”

“……그렇군요.”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제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루카스를 향해 시선을 돌린 교황 발레리가 비스듬히 턱을 꺾는다.

“공은 무슨 이유로 루카스 황자에게 걸린 저주를 풀어 주려고 그토록 애를 쓰는 거지?”

“…내 딸이 원해서. 이유는 그뿐입니다.”

“흐음. 딸 사랑이 지극정성이라 황족들의 승계 싸움에 주제도 모르고 끼어들겠다는 건가.”

발레리는 루카스의 변명을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무감한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느긋하게 말을 덧붙인다.

“이 몸도 공녀를 실망시키고 싶진 않지만, 황자에게 걸린 저주를 완전히 풀어 버리는 건 공녀에게는 무척 슬픈 일이 될 거야.”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마나의 상태로 짐작하건대 황자의 영혼은 이미 다른 육체를 장악했을 테니까.”

“그 영혼을 본래 육체로 돌려보낼 수 있지 않습니까.”

“이미 한 육체에 두 명의 영혼이 얽혀 버렸어. 그렇게 되면 황자의 영혼이 장악한 육체가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어 버릴 거네.”

하얗게 질린 루카스의 얼굴을 직시한 발레리가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건다.

“이 몸이 저주에 일가견이 있는 흑주술사나 금술사는 아니지만 이 제국의 교황이긴 하다네, 공. 아니….”

말끝을 흐리던 그녀는 다시금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루카스 황자.”

“…….”

“당신이 제 육체를 찾는 순간, 원래의 가스파르 공작은 죽고 말 터. 그 결과를 감내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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