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배신자가 누구일까.”
짐작 가는 사람이라면 있었지만, 확실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원작도 진행되고 있지 않아서 힌트를 얻을 수도 없고.’
발코니에 들어선 나는 문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채 사람들과 교류하고 있는 추기경들의 모습을 살피기 시작했다.
“저 셋 중에 누구 뒤가 구릴 것 같아, 히스? 너라면 어떻게 색출할래?”
겉으로 보기에는 어린 소년이었지만, 히스는 왕좌에 앉아 있던 권력자였다.
혹시 몰라 히스의 의견을 묻자 내 말에 내 뒤만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니던 그가 묘한 회색빛이 감도는 청안을 느릿느릿 깜빡인다.
“꼭 골라내야 하는 겁니까?”
“응? 아크레아에서는 어떻게 했는데?”
“아크레아는 효율을 중요시하던 곳이라….”
말끝을 잠시 흐리던 히스가 도자기 인형처럼 섬세한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인다.
“역대 왕들은 배신자를 색출하기 어려울 때, 의심 가는 집단을 몰살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아니, 그건 좀….”
한 명도 아니고 어떻게 추기경 세 명을 전부 다 죽이겠는가.
‘그럼 공국을 세워 독립하기도 전에 원작처럼 멸문당할걸.’
내 난감한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던 히스가 미소를 지을 듯 말 듯 입꼬리를 올린다.
“하지만 공녀는 그럴 수 없겠죠.”
“뭐? 왜?!”
설마 내가 아직 힘이 부족하다는 점을 꼬집는 걸까.
타고난 마나가 방대한데다 대마법사인 루카스가 직접 마법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나는 아크레아의 고대 병기라고 불리던 히스나 소울나이츠인 에녹과 실비처럼 강하진 못했으니까.
‘마나를 주입해 사용하는 바주카포를 조금 더 강하게 개량하고 싶긴 한데….’
하지만 아크레아의 유물인 바주카포는 세기의 천재 소리를 듣는 제랄드조차 쉽게 개량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래. 히스말대로 내가 추기경 세 명을 제거하는 건 무리겠지.”
조금 시무룩해진 내가 의기소침하게 입술을 삐죽이자 히스가 무감한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당신은 상냥한 사람이니까.”
“……응?”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일은 하지 못하겠죠.”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세상을 부숴 버리는 짓도 서슴지 않을 텐데.
단단한 착각에 빠진 듯한 히스의 태도에 당황한 나는 그가 중얼거리듯 덧붙인 말을 듣지 못했다.
* * *
‘앗. 드디어 신호가 잡힌다!’
추기경들과 인사를 나눌 때 바퀴벌레 아티팩트를 그들의 성의에 몰래 달아 두었던 나는 삐빅 울리는 아티팩트의 신호를 따라 복도를 향해 나섰다.
‘왕녀와 접촉하면 신호가 울리게 설정해 놨지.’
아직 바퀴벌레 추적기의 개발이 진행 중인지라 추기경들 중 누가 왕녀와 접촉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거야 내 눈으로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멜리사와 추기경의 신호가 잡히는 응접실 복도 건너편에 몸을 숨긴 나는 벽에 바짝 몸을 붙인 채 귀를 쫑긋 세웠다.
“…정말 그럴까? 폐하가 내게 질리신 게 아닐 거라고?”
“네, 왕녀님. 그레고르 황제 폐하는 왕녀님의 오랜 연인이신데 그렇게 쉽게 마음이 바뀌셨을 리 없지 않겠습니까.”
“아까는 나를 모르는 체하려고 하셨어.”
“하지만 제가 조언 드린 대로 말씀드리니 바로 왕녀님을 반겨 주셨죠.”
“……그건 그랬지.”
나는 고민하는 듯 신음을 흘리는 멜리사와 추기경의 대화를 엿들으며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언뜻 들으면 고민 상담을 해 주는 것 같지만, 이건 마치 멜리사보고 계속 그레고르에게 매달리라고 꾀어내는 것 같기도 한데.’
역시 내 직감이 맞았던 걸까.
나는 멜리사를 부추기는 추기경의 얼굴을 확인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이튿날, 나는 현관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졸린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침부터 왜 사람들 말소리가 들리는 거지?’
설렁줄을 잡아당기자 따뜻한 세숫물이 담긴 대야를 든 로제가 방안에 들어선다.
“로제, 밖이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이른 아침부터 손님이 오셔서요.”
“손님? 누구?”
“이아론 소후작님과 후작 영애가 방문하셨어요.”
나는 로제의 말에 와락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람들이 우리 집에는 무슨 일이지?”
눈곱이 낀 내 꾀죄죄한 얼굴을 어푸어푸 닦아 준 로제가 의아한 고개를 기울인다.
“으음. 실뱅 소후작님이 집사님께 하는 말을 들었는데, 아가씨께서 초대를 하셨다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내가?”
주색에 빠져서 제정신을 못 차리고 사는 망나니라더니 환청이라도 듣는 걸까.
내가 젠나일 선황녀의 생일 연회에서 실뱅 이아론과 주고받은 대화는 그의 일방적인 모욕이 전부였는데 초대는 무슨 놈의 초대?
‘멜리사를 부추기는 추기경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었던 건 큰 수확이었지만, 실뱅 이아론과의 만남은 그리 유쾌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은 나는 로제와 라비의 도움을 받아 황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아이, 우리 아가씨는 어쩜 이렇게 깜찍하고 귀여우실까.”
나풀나풀한 레이스 잠옷에서 깔끔한 연하늘 원피스로 갈아입었을 뿐인데 로제와 라비의 눈에 하트가 뿅뿅 차오른다.
“원피스와 어울리게 머리를 땋아 드릴까요?”
“아니, 실뱅이 무슨 일로 저택에 찾아왔는지부터 알아볼래.”
나는 이제 막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를 대강 손가락으로 빗어 내린 후 빠르게 침실을 벗어났다.
“에녹 오라버니, 실비 오라버니! 정말 오랜만이에요!”
현관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건 실비와 에녹도 마찬가지였는지, 아직 제대로 단장하지 못한 그들이 맞은편 복도에서 터덜터덜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저예요, 모드! 오라버니들의 사촌누이 모드 이아론이에요.”
동시에 중앙 계단에 들어선 나는 보이지도 않는지 모드가 활짝 웃으며 그들만을 반긴다.
“리니! 지금 일어난 거야?”
“황궁은 잘 다녀온 건가.”
모드의 발랄한 목소리가 워낙 커서 쩌렁쩌렁하게 현관을 울리는데도 에녹과 실비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 듯 내게 달려와 나를 양쪽에서 덥석 끌어안았다.
“피곤해 보이는데. 설마 누가 감히 리니를 괴롭힌 건 아니지?”
“그러게 히스 따위가 아니라 나를 파트너로 삼으래도.”
나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거무튀튀한 내 눈가를 어루만지며 울상을 짓는 에녹과 단정한 미간을 찌푸리는 실비를 번갈아 바라보다 현관 아래를 힐끗했다.
“실비, 에녹. 손님이 왔는데 인사 안 할 거야?”
“어? 누가 왔어?”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네가 시야에 들어서는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계단 아래에서 목청을 높이고 있는 모드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는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형제를 올려다보다 짧게 혀를 찼다.
“응. 우리 사촌 모드와 실뱅 외숙부시래.”
“아, 그 망나니 소후작?”
내 말에 한 손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껄렁껄렁 계단을 내려온 에녹이 실뱅을 위아래로 훑으며 중얼거린다.
“외숙부께서 하차니아의 수도 저택에는 무슨 일이세요?”
혼잣말이긴 했지만 목소리가 작지는 않았기에 실뱅은 에녹이 자신을 지칭한 말을 들은 듯싶었다.
“허, 오랜만에 보는 외숙부가 반갑지도 않은 것이냐.”
“네. 별로 안 반가운데요.”
실뱅은 에녹의 뚱한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얼굴을 찌푸리긴 했지만, 내게 했던 것처럼 버럭 화를 내지는 못했다.
“네 사촌 누이 모드다. 이제 곧 황도에서 열릴 쁘띠 플뢰르 선발전에 참가할 예정이지.”
실뱅이 제 옆에 모드를 가리키며 소개하자 모드는 실비와 에녹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오라버니들. 모드예요. 절 기억하시나요?”
‘쁘띠 플뢰르라면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은 영애를 대상으로 한 대회일 텐데.’
히스가 열심히 포스터를 모으고 있는 각종 미인 대회와 비슷하긴 했지만 미모와 더불어 학식과 예법을 두루 갖춘 어린 영애, 그러니까 차기 사교계의 꽃을 선발하는 대회나 마찬가지였다.
‘별 귀찮은 대회를 다 나가네.’
돈과 권력 외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 나는 도대체 왜 참가하는지 이해조차 가지 않는 대회였다.
“쁘띠 플뢰르 선발 준비를 위해 하차니아의 수도 저택에 제가 잠시 머무르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질문형이긴 했지만, 하차니아에서 자신의 체류를 당연히 허락해 줄 거라는 믿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저는 오랜만에 오라버니들 얼굴을 뵈어서 너무 반가운데, 오라버니들은 그렇지 않으세요?”
방긋 웃으며 에녹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모드는 내가 봐도 한 떨기 백합처럼 청초하고 예뻤다.
‘유순하게 내려간 눈꼬리가 어쩐지 노엘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지 에녹은 제게 말을 거는 모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역시 반가우신 거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에녹의 손을 덥석 붙잡은 모드가 다시 환하게 웃으며 묻는다.
“아! 왜 손을 잡고 난리야!”
인상을 찡그린 에녹은 모드의 손을 홱 뿌리치며 뒤로 물러났다.
“방금 막 리니 볼 쓰다듬었는데!”
“…….”
“그래서 밥 먹을 때까지 안 씻으려고 했는데 너 때문에 오염됐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