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99화 (99/486)

제99화

“지, 지금 일부러 내 발을 밟은 게지!”

나는 얼굴이 시뻘게져 씩씩거리는 실뱅을 흘깃 올려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레오노라예요.”

이미 그가 ‘네가 그 레오노라구나.’라며 나를 아는 척했음에도 내 이름을 다시 소개한다는 건 내가 그들을 모른다는 의미를 내포한 말이었다.

‘즉, 개무시를 한 거지.’

물론 순진무구한 눈을 땡그랗게 뜬 여덟 살 어린아이가 세련된 사교계의 화법에 맞게 그들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풉. 이아론 후작가가 정말 한물가긴 갔나 보네요.”

“노엘 제독이 실종된 이후로 하차니아와 교류를 끊었다더니 정말인가 봐요.”

내 천진난만한 인사에 귀부인들은 쥘부채 뒤로 은근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가렸으며 신사들은 대놓고 조소 어린 얼굴을 내보였다.

‘이젠 이름뿐인 후작가니까 그럴 만도 하지.’

지난 5년, 하차니아의 입지가 넓어지는 동안 이아론의 위세는 스물스물 죽어 가고 있었다.

“기, 기가 막혀서! 네 외숙부인 실뱅 이아론이다. 아무리 어리다지만 제 가족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냐!”

“아~! 그 망나니!”

실뱅의 소개에 큼지막한 눈을 느릿느릿 꿈뻑인 나는 사교계에서 유명한 그의 별명을 외친 다음 깜짝 놀란 척 입을 막았다.

“시… 실뱅 외숙부님이셨군요. 몰라봐서 죄송해요.”

뒤늦게 사과했지만, 내가 발랄하게 그를 망나니라고 호명하는 모습을 목격한 주변 귀족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린 후였다.

“푸하하! 우리 막내 공녀님은 역시 영특하시네요. 외숙부님의 별명도 다 기억하시고 말이에요.”

황도에 볼일이 있는 것인지 선황녀의 생일 연회에 얼굴을 비춘 하차니아의 원로 론도 자작이 나를 칭찬하며 실뱅에게 불쑥 얼굴을 들이민다.

“오랜만입니다. 우리 공녀님께는 무슨 볼일이신지요.”

“가족끼리 인사를 나눴을 뿐이네!”

나 혼자 덜렁 있을 때는 무례한 말을 서슴없이 뱉었으면서 하차니아의 원로가 내 곁을 지키고 서자 실뱅은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을 했다.

“고작 가신에 불과한 그대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각하께서 본인이 직접 연회에 참가하지 못하는 대신 공녀님에게 날파리가 꼬이진 않는지 잘 지켜보라고 명하셨습니다.”

“고, 공작 각하께서 말인가?”

론도 자작의 말에 흠칫 놀란 실뱅의 두 눈이 크게 뜨인다.

“자네에게 이 계집을 보호하라고 했다고?”

‘얼마나 정보력이 없으면 아직도 내가 사생아라 구박이나 받는 줄 아는 걸까.’

당황 서린 실뱅의 얼굴이 더는 우습지도 않았다.

‘명색이 후작가 영식이면서 이렇게나 사교계 소식에 굼뜰 수가….’

“이깟 계집을 말인가?”

“계집이라뇨? 감히 하차니아의 막내 공녀님을 그리 예의 없이 지칭하시는 겁니까.”

실뱅의 무례한 발언에 나만 보면 늘 헤벌쭉 벌어질 줄만 알았던 론도 자작의 입매가 차갑게 얼어붙는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론도 자작의 야차 같은 얼굴에 그가 왜 공작가의 투견 소리를 듣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물어뜯을 기세잖아.’

송곳니까지 뾰족해서 정말 개 같았다.

“그, 그렇지만 레오노라는 기실 이아론 후작가에서 거뒀어야 할 아이가 아닌가?”

“허! 이제 와서 공녀님을 탐내 봤자 소용없습니다!”

실뱅은 내가 노엘의 외도로 태어난 사생아라는 말을 돌려 말한 듯싶었지만, 론도 자작은 달리 받아들인 듯싶었다.

“절대로 못 내드립니다! 레오노라 아가씨는 엄연히 하차니아의 막내 공녀님이십니다! 감히 탐내셨다간 각하께서 절대 좌시하지 않으실 겁니다.”

화들짝 놀라 나를 안아 든 론도 자작은 마치 보물이라도 숨기는 것처럼 내 얼굴을 제 품에 꽁꽁 감춘 채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이아론 후작가라면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넘어가던 각하는 더는 없다는 걸 깨닫는 게 좋을 겁니다, 실뱅님!”

그야 지금의 가스파르는 가스파르가 아니라 루카스였으니까.

나는 론도의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흐응, 옅은 신음을 흘렸다.

‘마음 약한 아빠가 몸을 되찾기 전에 이아론 후작가를 짓밟아놓는 게 편할지도.’

이아론 후작이 티에리를 내쫓은 것도 그렇고, 후작가에서 사사건건 공작가의 행보에 훼방을 놓으려고 들어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우, 우리 아빠가 레오노라를 데려오고 싶어할 리 없잖아요, 론도 자작님!”

론도와 실뱅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여자아이, 그러니까 내 사촌 언니 모드가 뒤늦게 목소리를 높인다.

불그스름한 빛이 감도는 갈색머리와 큼지막한 녹안을 가진 모드는 어린아이인 내가 봐도 깜찍하다는 생각을 할 만큼 예쁜 소녀였다.

“아빠에겐 이미 친딸, 그러니까 엄마와 아빠의 딸인 제가 있는걸요. 오해하지 마세요.”

모드는 예쁜 얼굴만큼이나 고운 목소리의 소유자였는데 하는 말은 딱히 곱지 못했다.

‘저거 나 사생아라고 돌려 까는 것 같은데.’

“……허.”

나도 알아들은 속뜻을 어른인 론도 자작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지만, 열 살 소녀에게 화를 낼 순 없으리라.

혀를 쯧쯧 차며 뒤로 반보 물러나기에 나는 그가 나를 데리고 발코니라도 나갈 줄 알았다.

“아직 나이가 어리다지만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 아닙니까, 모드 영애.”

그러나 론도는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가차없었다.

“모드 영애가 딸이어도 실뱅 님께서는 당연히 우리 공녀님을 탐내실 수 있지요. 우리 공녀님만큼 깜찍하고 귀엽고 상냥하고 다정하고 똑똑한 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뭐, 뭐라고요?”

“훌륭한 아들이 셋이나 있는 저도 우리 공녀님 같은 딸이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매일 밤 기도하는데 실뱅 님이라고 뭐 다르겠습니까?”

멍해진 모드가 멍청해서 보기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론도 자작은 실뱅과 모드에게 인사도 없이 휙 등을 돌렸다.

“주제도 모르고 감히 탐내길 누굴 탐내! 지금 공녀님을 입양하고 싶어 하는 공작가의 가신들이 몇 명이나 되는 줄 알고?!”

모든 일에는 다 순번이 있는 법인데!

나는 론도가 작게 덧붙인 말에 떨떠름한 뺨을 쓸었다.

‘아니, 나 다른 가문에 입양되고 싶지 않은데….’

* * *

“싸가지 없는 건 아주 제 엄마를 쏙 빼닮은 계집이로구나.”

론도에게 안긴 채 멀어지는 레오노라를 흘깃한 실뱅은 우악스레 인상을 찌푸리며 제 딸을 돌아보았다.

“우리 모드는 저렇지 않은데.”

“네, 아빠! 저는 공녀처럼 되바라지지 않았어요!”

실뱅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인 모드는 다행이라는 듯 후후 웃음을 흘렸다.

“오히려 공녀가 예의 없는 아이라서 다행이에요. 공작 각하와 공자님들이 공녀와 달리 착하고 예의바른 저를 보시고 얼마나 예쁘다고 생각하시겠어요!”

“그렇지, 모드. 네가 하차니아 공작과 공자놈들에게 잘 보여야 하니 차라리 잘된 일이다.”

젊었을 적부터 방탕하게 살아온 탓에 이아론 후작의 신뢰를 잃은 실뱅은 최근 후작이 자신이 아닌 다른 놈에게 작위를 넘겨 버리는 게 아닐까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하차니아가 주제에 맞지 않게 급성장했으니, 공작을 잘 구슬려서 그놈이 운영하는 상단이나 제약 회사를 내 것으로 만들면 아버지도 날 후계자로 인정해 주시겠지!’

“공작과 공자들이 저리 드센 공녀만 대하다가 너를 보면 깜짝 놀랄 거다, 모드.”

품행이 거칠고 성격이 모난 탓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힘들어하는 실뱅과 달리 딸 모드는 예쁘장한 외모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사람들의 호감을 쉬이 사는 능력이 있었다.

“모드, 이 아비는 너만 믿는다.”

“네, 아빠! 반드시 공작 각하와 공자님들의 예쁨을 받을게요!”

모드는 자신만만했다.

최근 몇 년간 이아론과 하차니아의 교류가 뜸해진 탓에 공자들과 어울릴 기회가 없었지만, 아주 어릴 때 몇 번 만난 사촌 오빠들은 늘 그녀를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각하께서는 원래 절 예뻐하셨는걸요.”

이아론 후작저에 방문할 때마다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가스파르의 손을 떠올린 모드는 반달처럼 눈을 휘며 헤헤 웃었다.

‘오랜만에 또 쓰다듬어 주시겠네!’

머리야 아빠인 실뱅이 곧잘 쓰다듬어 주지만, 짜리몽땅한 실뱅의 손과 달리 예술 작품처럼 곧게 뻗은 가스파르의 손이 더 멋있어서 좋았다.

“사촌 오빠들도 당연히 모드를 좋아할 거예요, 아빠.”

“그럼 그럼, 우리 모드를 누가 싫어하겠니! 저딴 사생아 계집보다 우리 모드가 열 배는 사랑스러운데.”

실뱅의 맞장구에 모드는 발코니로 나서는 레오노라를 힐끔하며 콧잔등을 움찔했다.

‘맞아. 누가 날 싫어할 수 있겠어? 난 이렇게나 예쁜데.’

모드는 살면서 자신을 싫어하는 소년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콧대 높은 고귀한 가문의 영식이라도 모드가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라도 해 주면 얼굴을 붉히기 바빴으니까.

‘에녹 오빠와 실베스테르 오빠는 굉장히 오랜만에 만나는 거니까, 너무 예뻐진 모드를 보고 놀라지 않게 조금 덜 꾸미고 가야겠어.’

놀랄 오빠들의 심정까지 걱정해 주다니, 역시 난 너무 착한 것 같아!

모드는 해맑게 웃으며 공작가의 수도 저택 방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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