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드디어 멜리사의 얼굴을 볼 수 있겠네.’
나는 황성에서 날아온 젠나일 선황녀의 생일 연회 초대장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씨익 웃었다.
루카스 황자에 관한 언급 자체를 그레고르가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공식적인 처벌은 없었지만, 멜리사가 의식이 없는 남자를 지하실에 보관하고 있었다는 소문은 이미 암암리에 퍼진 후였다.
‘아니, 딱히 암암리는 아닌가.’
무려 일간특급의 1면에 실렸으니까.
[빛나는 사교계의 꽃에서 희대의 싸이코 집착녀로 전락한 멜리사 아스텔리우, 그녀의 진실을 낱낱이 파헤치다!]
나는 그토록 목을 매던 일간특급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멜리사의 기사를 슥 훑으며 달콤한 밀크티를 홀짝 들이켰다.
사교계의 꽃으로 군림하던 멜리사의 몰락이 고소하긴 했지만, 엄청 만족스럽진 못했다.
단순히 사교계에서 망신을 주는 것 정도로는 모자랐으니까.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좋지 않을 것이 뻔하니 멜리사는 한동안 수도 사교계에서 열리는 어떤 파티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선황녀의 초대장은 명분 없이 거절하지 못하겠지.’
나는 꺾일락 말락 발버둥치는 멜리사의 발목을 확실히 꺾어 놓고 싶었다.
‘루카스의 몸은 되찾았어도 멜리사가 범죄자라는 게 확실히 밝혀져야 카렌의 양육권을 하차니아가 가져올 수 있을 테니까.’
카렌의 아버지인 알레한 남작이라는 사람을 설득해 볼까도 싶었지만, 그쪽도 개차반인 건 매한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여태 카렌의 양육비를 지원했던 건 어떻게든 멜리사와 다시 한번 잘해 보고 싶은 마음에 무리했던 것이라며 멜리사와 절연한 카렌을 제 집에 들이는 것을 단번에 거절했다.
“쓰레기 같은 자식….”
내가 제 생부를 떠올리며 이를 부득 갈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카렌이 난감한 얼굴로 웃으며 내 손등을 다정하게 어루만진다.
“난 정말 괜찮아요, 리니. 아버지가 그런 분이라는 건 원래 알고 있었어요.”
“…내가 속상해서 그래요.”
“나는 리니가 속상해하는 게 더 마음이 쓰여. 그러니까 예쁜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아티팩트로 모습을 변형시키는 것을 관둔 카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것이었다.
나는 목뒤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짧게 자른 그녀의 단정한 암갈색 머리칼을 매만지며 한숨처럼 웃었다.
“카렌이 그렇게 말하면 웃을 수밖에 없네요.”
“리니는 웃을 때 가장 예쁘니까요.”
내가 애써 입꼬리를 올리자 카렌이 상냥하게 웃으며 내 뺨을 매만진다.
까슬까슬한 손의 감촉이 좋아 눈을 감고 고양이처럼 그르렁거리는데 어디선가 팔랑이며 날아온 종이 한 장이 카렌과 나 사이를 가른다.
나는 카렌이 휙 낚아챈 종이를 힐긋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제국 미인 대회 포스터?’
“이게 뭐예요, 카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요즘 히스라는 애가 저한테 이 종이를 자꾸 날리더라고요. 꼭 무슨 도전장처럼요.”
“…….”
“제가 지나가면 꼭 뒤에서 자기가 더 예쁜 것 같다고 중얼거리고요. 물론 저도 그 소년이 저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 왜 매번 그런 말을 굳이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 요즘 내가 히스랑 너무 안 놀아 줬구나.
나는 선황녀의 생일 연회 파트너로 히스를 데려가야겠다고 결심하며 머쓱한 뺨을 긁었다.
* * *
그레고르의 여동생인 젠나일 선황녀는 현 황실에서 평판이 멀쩡한 유일한 황족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네스 때와는 달리 사람들이 꽤 왔네.’
현재 그레고르의 평판은 원작과 비교할 필요도 없이 최악의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결혼한 여자라도 황제가 원한다면 무조건 첩이 되어야 하는 법을 제정하겠다니, 미친 거지.’
제국 치안대의 손길이 닿지 못하는 시골 영지에서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라지만, 그레고르는 시골 영주 따위가 아닌 무려 황제였다.
그런 악법을 제정한다는 건 제국의 수준을 나락 끝으로 떨어뜨리겠다는 것과 다름없었으니 귀족원이 찬성할 리 없었다.
‘하지만 반대하는 귀족들은 전부 목을 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으니, 여동생인 젠나일 선황녀를 통해 황제를 설득하려는 귀족들이 많을 거야.’
나는 인산인해를 이루는 선황녀궁의 연회홀을 둘러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카라칼라 추기경 예하, 네르바 추기경 예하, 마크리누스 추기경 예하와 멜리사 왕녀님께서 드십니다!”
연회실을 우렁차게 울리는 호명관의 목소리에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바닥이니 신전 쪽에 붙은 걸까?’
루카스와 교황에게 저주를 건 범인은 추기경 중 한 명이었다.
그렇다면 멜리사와 친분이 깊은 추기경이 범인일 수도 있겠지만….
‘셋 다 친밀한 관계처럼 보이는걸.’
네르바와 카라의 팔짱을 끼고 연회홀에 들어선 멜리사는 제 추문 따위 모른다는 양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마크 추기경과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마치 루엘라드네 권력의 중심인 추기경들과의 친분을 과시하려는 것처럼.
멜리사의 전략이 먹혀들었는지 왕녀의 등장을 외면하려고 했던 귀족 몇몇이 결국 움찔하며 그녀에게 다가선다.
“왕녀님, 그간 몸이 편찮으셨다고 들었는데 건강은 회복하신 걸까요?”
“네, 덕분에요.”
제 안부를 묻는 사람들에게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한 멜리사가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아아, 나의 폐하! 제가 그립진 않으셨나요!”
상석에서 젠나일 선황녀와 대화를 나누던 그레고르가 자신을 부르는 멜리사의 목소리에 눈썹을 휙 들어 올린다.
그와 그녀가 비밀리에 연애를 하고 있었다는 건 이미 일간특급의 ‘멜리사 왕녀 특집’으로 전국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오랜만이군, 왕녀.”
“제가 그간 몸이 좋지 않아 폐하를 찾아뵙지 못했지요. 송구할 따름입니다.”
멜리사의 말만 들으면 그레고르가 그녀를 엄청 그리워한 것 같지만, 황제의 굳은 얼굴은 애틋한 연인을 대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시큰둥한 그레고르에게 가까인 다가간 멜리사가 무어라 속삭이자 황제가 순식간에 태도를 바꿔 다정하게 그녀를 끌어안는다.
“대신전에서 머물며 몸을 회복했다니 다행이군, 멜리사.”
나는 웃고는 있지만 파르르 떨리는 그레고르의 입매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뭐, 보나마나 루카스와 관련된 일로 협박했겠지.’
멜리사가 루카스의 몸을 보관하고 있긴 했지만, 그레고르가 루카스의 저주에 개입하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연인이라더니 서로 협박이나 해 대는구나.’
서로를 죽일 듯-언뜻 다정하게- 노려보는 멜리사와 그레고르를 멀리서 지켜보며 짧게 혀를 찬 나는 어린아이의 순진한 얼굴을 장착하고 추기경들에게 다가갔다.
“루엘라드네를 지탱하는 세계수를 뵙습니다.”
“어머. 아직 어린 공녀님께서 그런 인사를 다 아시네요.”
내 알은체에 가장 먼저 뒤를 돌아본 추기경은 카라였다.
“그제도 봤는데 또 보네요, 공녀님.”
나는 늘 상냥한 얼굴로 나를 반겨주는 카라와,
“흥. 역시 맹랑한 아이야. 그런 고리타분한 옛날 인사말을 알고 있다니.”
교황의 예쁨을 받는 나를 경계하는 네르바,
“…….”
그리고 나의 존재를 아예 무시하는 마크를 번갈아 바라보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도대체 누가 배신자일까?’
단순하게 판단하면 권력욕이 드글드글한 네르바겠지만, 그녀를 범인으로 찍기에는 빠진 퍼즐 조각이 있는 듯한 찝찝함이 들었다.
‘뭔가 힌트가 있으면 좋겠는데….’
원작은 분노한 아이네스가 나를 ‘어떻게 하겠다.’고 결심한 이후로 전개되지 않고 있었다.
‘그나저나 아이네스의 꿍꿍이라는 건 또 뭘까.’
오늘따라 모습을 보이지 않는 아이네스를 찾아 연회홀을 훑는데, 잠시 휴식을 취하던 호명관이 벌떡 일어나 다시금 목소리를 높인다.
“실뱅 이아론 소후작님과 모드 이아론 후작 영애 드십니다!”
실뱅 이아론과 모드 이아론.
‘레오노라’로 태어난 후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나는 그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노엘의 남동생과 그의 딸, 그러니까 내 외삼촌과 사촌언니인 거지.’
연회홀에 들어선 실뱅과 모드 이아론은 그레고르에게 인사를 올린 후 곧장 내게 다가왔다.
“네가 바로 그 ‘레오노라’로구나.”
내가 생전 처음 보는 외삼촌과 사촌언니를 올려다보며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자 실뱅이 대뜸 인상을 찌푸리더니 끌끌 혀를 찬다.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라더니 인사도 할 줄 모르는 게냐.”
“……?”
“너같은 걸 공작가의 고명딸로 삼는 건 공작도 원치 않는 일이었겠지. 해서 내 딸 모드를 공작가에 입적시켜 주고자 한다.”
“……??”
“황녀 전하의 부탁도 있었으니 이아론 후작가에서 친히 선의를 베풀어 주마.”
“넹?”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람.
“어억!”
기가 막힌 나는 실수인 척 실뱅의 발을 꾹꾹 눌러 밟았다.
“어어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