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몰려드는 인파로 잔뜩 소란스러워졌던 왕녀의 침실은 루카스, 그러니까 하차니아 공작이 모습을 드러내고 나서야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멜리사 아스텔리우.”
왕녀의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며 침실에 들어선 루카스가 바닥에 주저앉아 울먹이는 나를 안아 든다.
“네가 감히 내 딸을 때렸다는 사람들의 말이 사실인가.”
타국의 왕녀를 존중하는 듯 보였던 예의바른 모습은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중하고 깍듯하게 예의를 지키는 것으로 유명한 하차니아 공작의 냉랭한 태도에 사람들이 숨을 삼켰지만, 나는 멜리사를 앞에 두고도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거나 질색하지 않는 루카스의 모습에 훨씬 더 놀라는 중이었다.
‘멜리사에게 지독한 스토킹을 당해 마주치기만 해도 질겁하며 도망가던 사람인데.’
그러나 루카스는 더는 멜리사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저벅저벅 제게 다가오는 그의 거침없는 발걸음에 흠칫 놀란 멜리사가 고개를 휙 돌리며 카렌을 손끝으로 가리킨다.
“고, 공녀가 내 딸과 싸우고 있기에 말린 것뿐이에요!”
‘내가 언제 카렌이랑 다퉜다고?’
나는 기가 막혔지만, 멜리사는 눈을 부릅뜨며 눈빛으로 카렌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지하실에 루카스 황자 전하를 본떠 만든 인형이 있었어요. 사라진 연인이 너무 그리운 마음에… 구체관절인형 제작자에게 부탁해 만든 인형이었죠.”
‘사라진 연인’이라는 단어에 루카스의 잘생긴 미간이 와락 일그러진다.
멜리사는 그의 반응을 개의치 않고 사람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딸아이를 위해 만든 인형이기도 해요. 루카리나도 아빠가 그리울 테니까요. 그런 소중한 인형을 공녀가 허락도 받지 않고 가지고 놀았던 모양이에요. 해서 둘이 싸우기에 제가 사이좋게 지내라고 혼을 내던 중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니, 루카리나?”
멜리사의 눈빛에 카렌은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긴했지만, 입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카렌의 동의가 없음에도 당당한 멜리사의 얼굴에 그녀를 의심하던 사람들의 표정이 일순 풀어진다.
멜리사가 워낙 오래 사교계의 꽃으로 군림해온 덕이었다.
“그럼 그렇지. 왕녀가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을 리 없죠.”
“아이들이 장난감을 두고 싸우는 일이야 흔하니까요.”
나는 순식간에 멜리사 왕녀를 두둔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꾼 수도 귀족들의 얼굴을 천천히 둘러보다 루카스의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
“…제가 오해를 했나 봐요. 전 그 인형이 사라진 루카스 황자 전하의 육체인 줄 알았거든요.”
나와 눈이 마주친 멜리사의 샛노란 눈이 악에 받친 뱀처럼 좁아진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눈빛에 겁을 먹은 어깨가 떨려왔지만, 나는 내 작은 몸을 감싸 안은 단단한 팔뚝을 꾹 붙잡은 채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루카스도 나를 위해 스토커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 냈는데, 내가 저깟 미친 여자에게 겁을 먹을 수는 없지.’
미친개의 이름이 아깝다고.
“그래서 왕녀님께 화를 내고 말았어요. 의식을 잃은 황자 전하의 몸을 지하실에 보관하는 건 너무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해서요.”
“그, 그렇게 오해했다면 화를 낼만 하죠. 내가 넓은 마음으로 공녀를 이해할게요.”
나는 생색을 내듯 턱을 치켜드는 멜리사를 직시한 채 입을 열었다.
“황자 전하는 엄연히 루엘라 신의 사랑을 받는 대마법사셨다고 들었어요. 그런 분의 육체를 빼돌렸다면 신성모독죄에 해당되는 범죄이겠죠.”
내 담담한 말에 멜리사는 입술만 꾹 깨문 채 대답하지 못했다.
윌레닌은 엄연한 계급 사회이자 루엘라드라는 국교가 있는 신심 깊은 제국이었다.
스토킹같은 범죄는 제대로 처벌받기 힘들었지만 신성모독은 차원이 다른 범죄로 치부되었다.
‘신전에서 사라진 루카스의 마나를 찾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었으니 루카스의 몸을 멜리사가 보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야.’
“그, 그렇죠. 공녀가 지하실에서 본 게 루카스 황자 전하의 몸이 아니라 인형이었다는 사실을 공녀에게 증명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 인형을 도둑맞고 말았네요.”
슬퍼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멜리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가련한-가증스러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노려보다 카리나에게 손을 뻗었다.
“찾으면 되죠. 황자 전하의 몸을 찾아서 신전에 검증을 받으면 여태 그의 존체, 아, 왕녀님께서는 인형이라고 하셨죠, 참?”
나는 더는 멜리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게 다가와 내 손을 맞잡는 카리나를 향해 생긋 웃어주며 말을 이었다.
“그 인형을 보관하고 있었던 사람이 누구인지 쉽게 알아 낼 수 있을 테니까요. 신관들은 마나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
“그리고 루카리나 양을 공작가로 초대하고 싶어요. 멜리사 왕녀님의 말마따나 어린아이들처럼 싸우고 말았으니까 화해하고 싶거든요.”
사람들이 들어서자마자 아티팩트로 본모습을 감춘 카리나는 여리디여린 소녀처럼 보였고, 비슷한 색감의 실버블론드를 가진 우리는 자매처럼 어울렸다.
“공녀가 참 어른스럽네요. 친구에게 먼저 화해를 청할 줄도 알고."
두 손을 꼭 맞잡은 카렌과 내 모습에 귀부인 몇몇이 기특하다는 듯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린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린데다 학대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는 와중에 내 제안을 반대할 수는 없으리라.
“……좋아요. 루카리나, 공작가의 수도 저택에 놀러 가는 걸 허락하마.”
예상대로 멜리사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카렌을 돌아보았다.
돌아오는 날 아주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거야.
왕녀가 카렌과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덧붙인 말에 나는 카렌을 잡은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걱정 마, 카렌.”
나는 다시 깊게 숨어버린 카렌의 암녹색 빛깔을 찾아 다짐하듯 속삭였다.
“내가 절대 널 그 지옥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테니까.”
* * *
“고마워, 루카스.”
수도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멋쩍은 턱을 긁으며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내 민망한 목소리에 슬그머니 시선을 든 그가 잘생긴 턱을 괸 채 시큰둥한 입을 연다.
“뭐가.”
“날 구해 주러 왕녀의 저택까지 와 줬잖아.”
내가 세 살 무렵부터 들고 다니는 호루라기는 가스파르가 나를 위해 제작한 호신용 아티팩트였다.
내가 위험에 처하면 가스파르가 바로 알 수 있도록 제작된 물건인데, 루카스가 그의 몸을 차지하게 된 이후로는 그에게 알람이 가는 모양이었다.
“멜리사 아스텔리우 보는 거 끔찍할 텐데도 날 구하러 와 준 거잖아.”
루카스는 멜리사의 지독한 스토킹에 시달린 피해자였다.
파티에서 잠깐 마주친 정도로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었는데, 왕녀의 저택에 들어서는 건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린다.
“그렇다고 널 위험하게 둘 수는 없으니까.”
나는 루카스의 무뚝뚝한, 그러나 묘한 다정함이 느껴지는 대답에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네 그릇에 담긴 마나를 보호해야 한다.”
그러다 그가 덧붙인 무뚝뚝한 말에 입가가 파삭 마른다.
‘흥. 그럼 그렇지.’
가스파르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루카스는 내게 나름의 의미를 갖게 된 사람이었다.
“섭섭하네. 난 마나 상관없이 루카스를 아끼는데.”
내 투덜거림이 와닿지 않는지 루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는 루카스에게 손을 뻗어 그의 무릎을 툭툭 두드렸다.
“정말이야. 루카스가 나랑 다른 마나를 지녔다고 해도 아꼈을걸? 가족처럼.”
“…가족이라. 그 말은 나를 네 가족만큼 아낀다는 건가?”
“당연하지.”
나는 내 말을 쉬이 믿어 주지 않는 루카스에게 섭섭함을 느끼며 입을 삐죽였다.
“내가 루카스 몸 찾겠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멜리사 왕녀 저택 지하실에 몰래 숨어 들어갔을 때는 긴장으로 뒷목이 전부 쭈뼛 설 만큼 무서웠었다.
그녀의 으스스한 지하실, 그리고 지하실보다도 더 기괴했던 생화로 장식된 관을 떠올린 나는 부르르 몸을 떨며 어깨를 으쓱했다.
“안전하게 옮기려고 철두철미한 계획까지 세웠어!”
“……그래?”
“응!”
“안전하게, 옮기려고 했단 말이지.”
나는 느릿느릿 이어지는 루카스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왜 사람 말을 안 믿어.”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리던 나는 루카스를 따라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
뻥.
뻐엉.
히스가 포대기로 대충 둘러싼 루카스의 몸을 발로 차 가며 마차를 따라 걸어오고 있었으니까.
소년이 발을 번쩍 치켜들 때마다 포대기가 데구르르 거칠게 골목을 굴렀다.
“저렇게 귀중품처럼 운반해 주다니 내 몸은 매우 멀쩡하다 못해 온전한 지경이겠군.”
“그, 그게….”
“성하지 않은 곳이라곤 한 군데도 없겠어.”
나는 루카스의 뚱한 목소리에 양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냥 몰래 옮겨 달라고만 했지, 참.’
히스는 입력받은 대로만 움직이는 로봇 같은 애라 명령을 매우 정확히 집어넣어 줘야만 했다.
게다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쁘장한 남자를 엄청 싫어했다.
‘얼굴 망가뜨리려고 저러는 게 분명해!’
나는 루카스의 몸을 향한 히스의 이유 없는 적개심에 에휴,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집 애들은 어쩜 이렇게 다루기 쉬운 애가 한 명도 없을까.’
“그런데 마차가 왜 저택으로 향하지 않는 거지?”
나는 루카스가 표하는 의문에 생긋 웃었다.
“그야 집으로 안 가고 있으니까.”
“어딜 가는데.”
“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
나는 비밀스럽게 웃으며 루카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미리 말하면 도망갈 게 뻔한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