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93화 (93/486)

제93화

사람들 앞에서 멜리사는 늘 사라진 루카스 황자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애지중지 홀로 기르는 가련한 엄마 연기를 했었다.

그랬던 그녀가 악귀에라도 씌인 듯 제 딸의 팔뚝을 우악스레 붙잡아 2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에 휘둥그레 눈을 뜬 귀부인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한다.

“왕녀가 루카리나 양에게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에요. 저런 모습은 처음 보네요.”

“너무 흥분한 것 같은데 말려야 하는 거 아닐까요?”

“하지만 루카리나 양은 멜리사 왕녀님의 딸이잖아요. 남의 집 가정사에 끼어드는 건 좀….”

연분홍색 쥘부채를 펼쳐 들고 얼굴을 가린 귀부인이 작게 속삭이는 말에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죠. 우리는 루카리나 양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니까요.”

“단순히 엄마로서 딸아이를 훈육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멜리사에게 붙잡힌 카렌의 발목이 계단 난간에 우당탕 쓸리는 것을 발견한 나는 숙덕이는 사람들의 말에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저런 폭력을 훈육이라는 말로 포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은 나는 쾅! 침실 문을 닫고 사라진 멜리사 모녀를 따라 허둥지둥 계단을 올랐다.

“어디 갔어!!!”

굳게 닫힌 문밖으로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멜리사의 목소리가 찢어지듯 새어 나온다.

“루카스 황자 전하의 몸이 도대체 어떻게 사라진 거야?! 나보다 카리나 네가 지하실에서 늦게 나왔잖아!!!”

“저도 몰라요, 어머니. 정말 모르겠어요.”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네가 이 어미를 골탕 먹이려고 숨긴 거지, 이 괘씸한 계집애!!!”

제 딸이 범죄라도 저지른 양 카렌을 추궁하던 멜리사가 결국 손을 든 모양이었다.

침실 문 밖으로 가슴 아픈 소음이 새어 나왔다. 방 안의 상황을 짐작한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지금 뭐하는 짓이에요?”

“공녀야말로 무슨 짓이죠? 여긴 내 침실이에요!”

아무리 파티가 한창이라지만 사적인 공간인 침실에 들어서는 건 굉장한 무례였다.

멜리사는 그 점을 지적하며 나를 밀어내기 위해 다가왔지만, 나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팔 아래로 쑥 들어가 기어코 왕녀의 침실에 들어섰다.

“왕녀님이 카렌, 아니, 루카리나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나는 루카리나의 어미예요.”

내 말에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좁힌 멜리사가 쾅! 침실 문을 닫아 버린다.

“어미가 딸을 교육시킨다는데 공녀가 무슨 권한으로 나를 방해하는 거죠?”

멜리사의 물음에 대꾸 없이 고개를 돌린 나는 벌겋게 달아오른 카렌의 뺨을 확인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폭행은 절대로 교육이 될 수 없어요, 왕녀님.”

바닥에 주저앉은 카렌은 이미 머리채까지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혹시나 멜리사가 또다시 카렌에게 달려들까 왕녀와 아이 사이에 끼어들며 양팔을 넓게 벌렸다.

“학대는 범죄라고요.”

“폭행이라니? 말 안 듣는 딸을 어미인 내가 혼냈을 뿐이에요. 공녀가 끼어들 일이 아니라고! 가정사란 말이에요!!”

나는 멜리사의 말에 비식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아이를 제 소유물 취급하는 부모들에게서 수없이 들었던 변명이었으니까.

내가 내 자식, 내 ‘소유’를 마음대로 다룰 뿐인데 남이 무슨 상관이냐는 식의 변명.

“단순히 말을 듣지 않았다고 혼내는 게 아니잖아요.”

나는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멜리사의 얼굴을 무심하게 바라보다 차분히 말문을 열었다.

“루카스.”

“뭐?”

“루카스의 몸이 없어져서 화풀이를 하는 거잖아요?”

내 말에 당황한 왕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문가에서 떨어져 빠르게 내게 다가온 그녀는 제 몸의 반 정도밖에 오지 않는 내 작은 어깨를 부서져라 움켜잡았다.

“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지하실에서 루카스 황자 전하의 몸이 관 안에 장식되어 있는 거 봤어요.”

오러로 미리 몸을 감싸 놓지 않아 왕녀가 잡은 어깨에 새빨간 손자국이 남는다.

나는 흐트러진 칼라를 부러 정리하지 않은 채 희번덕 눈을 빛내는 왕녀를 올려다보았다.

“너야? 네가 가져갔니?!”

내 양어깨를 붙든 멜리사는 이성을 반쯤, 아니 반 이상 잃은 것처럼 보였다.

“이 발칙한 계집!! 나의 루카스를 돌려줘!!!”

발악하듯 울부짖은 멜리사가 내 작고 가벼운 몸을 벽으로 밀어붙인다.

“아, 안 돼요! 어머니! 리니는 때리지 말아 주세요!”

멜리사의 구타가 일상이었는지, 왕녀가 당연히 나를 때릴 것이라 예상한 카렌이 화들짝 놀라 앞으로 나선다.

헐레벌떡 달려온 카렌은 벽에 쿵 부딪혀 바닥에 주저앉은 내 몸을 감싸 안듯 보호했다.

“비키지 못해? 카리나 네가 감히 지금 나를 막아서는 거니?!”

멜리사는 신경질적으로 카렌을 밀어내며 인상을 찡그렸다.

“나는 네 엄마야! 너는 무조건적으로 내 말만 들어야 한다고!”

멜리사의 말에 나를 둥그렇게 감싸 안은 카렌의 팔이 덜덜 떨려 오기 시작한다.

“넌 내 거니까! 내가 배 아파 낳았잖아!! 그 사실을 잊은 거니, 카리나?!”

단순히 자식이라고 해서 부모의 소유물이 되는 건 아니었다.

‘카렌도 의지와 자아가 있는 인격체인데.’

나는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카렌의 손등을 꾹 붙잡은 채 왕녀를 돌아보았다.

그녀에게 항의하기 위해 내가 입을 여는 순간, 카렌이 나보다도 빨리 멜리사를 향해 차분히 대답한다.

“아뇨. 잊지 않았어요.”

파들파들 떨리던 손등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더는 멜리사가 두렵지 않다는 듯 왕녀와 눈을 마주한 카렌이 제 목에 걸린 로켓을 꼭 쥔 채 또박또박 말을 잇는다.

“저는 어머니의 딸이 맞아요.”

카리나, 아니, 카렌의 로켓은 모습을 변하게 해 주는 아티팩트였다.

나는 소녀를 둘러싸고 있던 아티팩트의 마나가 서서히 녹아내리면서 드러나는 그녀의 진짜 모습에 호흡을 멈췄다.

천년을 산 고목처럼 짙은 갈색 머리칼, 초목의 생기를 담은 암녹색 눈.

진짜 카렌의 모습은 루카스의 몸을 어설프게 따라했던 ‘루카리나’보다 훨씬 아름답고 멋졌다.

“하지만 그 이전에 카리나 카렌 알레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에요. 어머니가 소유한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요.”

“배은망덕한 계집. 내다 버릴 걸 키워 줬더니, 내게 지금 그딴 건방진 말을 해?”

카렌의 말이 기가 막히다는 듯 비명에 가까운 웃음소리를 낸 멜리사가 우리를 벽으로 몰아붙이며 다가오기 시작한다.

또각. 또각. 또각.

굽 높은 힐이 바닥을 찍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침실을 울린다.

“이 발칙한 계집과 어울리더니 너까지 물이 든 게지! 어른으로서 너희 둘을 훈육하는 수밖에는 없겠구나!”

나는 카렌과 나를 때리기 위해 멜리사가 손을 높이 치켜드는 순간을 노려 재빨리 목소리를 높였다.

“왕녀님! 사라졌다고 알려진 루카스 황자 전하의 몸을 장식품처럼 지하실에 보관하고 있는 건 범죄예요. 소름끼치는 짓이라고요!”

사람들 들으라고 버럭 외치느라 아무 말이나 한 거였지만, 루카스가 알게 되면 기겁할 사실은 맞았다.

나는 지금쯤이면 수도 저택에 안전하게 옮겨졌을 루카스의 몸을 떠올리며 목청을 높였다.

“이 끔찍한 범죄가 알려지면 왕녀님의 명예가 얼마나 실추되겠어요?!”

내 말에 멜리사의 붉은 입술이 기가 막히다는 듯 비틀린다.

“네까짓 계집아이의 말을 사람들이 믿을 것 같아? 난 멜리사 아스텔리우야.”

내 협박 비슷한 말에도 멜리사의 태도는 한 나라의 왕녀답게 고고했으며 여유가 흘러넘쳤다.

“바하무스 사교계의 꽃이라고.”

나는 그녀가 당당하게 제 할 말을 끝내자마자 침실 문 손잡이에 미리 걸어 두었던 가느다란 실을 잡아당겼다.

끼이익-

“!!!”

고급스러운 오크나무로 제작된 양문이 개폐되자 체면도 잊고 문에 바짝 귀를 대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그 바람에 넘어진 사람도 몇몇 생겼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바닥에 널브러진 이들이 아닌 희게 질린 멜리사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맙소사! 지, 지금 우리가 도대체 무슨 망발을 들은 거죠? 귀를 씻어야겠어요.”

“루카스 황자 전하의 몸을 왕녀님이 보관하고 계셨다고요? 미친 거 아닌가요?”

“그것도 장식품처럼 보관했다잖아요? 이 정도면 아실럼에 보내야 할 정신병자 아닌가요?!”

경악한 사람들의 비난이 일제히 왕녀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그게 아니라- 여러분, 지금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나는 너무 당황해 변명의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멜리사를 향해 생긋 미소 지었다.

‘그럼 내가 준비도 안 해 놓고 침실에 기어 들어왔을 줄 알았냐?’

“흐윽, 끅!”

나는 멜리사가 교묘한 세 치 혀를 놀려 사람들을 현혹하기 전에 볼 안쪽을 콱 깨물어 커다란 눈동자에 투명한 눈물이 고이게 만들었다.

마나로 몸을 감싸 다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부러 보호하지 않아 벌겋게 달아오른 어깨를 내보이면서.

“세상에! 저 미친 왕녀가 어린 공녀님을 때리기까지 했나 봐요!”

나는 내게 황급하게 달려오는 카이젠 백작 부인의 품에 안겨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