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그러니까 사건의 전말은 대략 이랬다.
루카스는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나를 앞에 두고 우왕좌왕하다 마침 황성 근처까지 우리를 마중 나온 실비와 에녹을 호출했다.
“공녀가 눈물을 멈추지 않는다.”
전생 미친개, 현생 잘나가는 공녀님인 나는 좀처럼 우는 법이 없었는지라 놀란 에녹과 실비는 ‘예쁜 걸 보면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다.’며 히스까지 불러냈다.
그렇게 내 앞에 주르륵 도열한 남자 넷을 올려다보던 나는 진짜 여덟 살 어린아이처럼 칭얼대며 두 팔을 벌렸다.
“리니 업어 줘.”
아이네스에게 마나도 잔뜩 빼앗긴데다 눈물 콧물까지 줄줄 흘린 탓에 진이 빠져 도무지 걸을 힘이 나지 않았으니까.
“알겠다.”
“그래! 얼른 업혀!”
“아니, 내게 업혀라.”
“업히십시오.”
제각기 대답한 남자들이 허둥지둥 등을 돌리더니 재빠르게 허리를 숙인다.
나는 큰 순서대로 나열한 듯한 등짝 네 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코를 훌쩍였다.
“……고르기 힘들어. 그냥 제일 힘센 사람한테 업힐래.”
내가 고르면 또 자기들끼리 아웅다웅 다툴 게 뻔했으니까.
괜히 싸우지 말고 팔씨름이라도 하는 게 좋겠다고 내가 권유할 찰나, 에녹이 제 옆에 가만히 서있던 죄 없는 담벼락에 주먹을 메다꽂았다.
콰직-!
곧 푸쉬식 소리와 함께 튼튼한 적색 벽돌로 쌓아 올린 담벼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꺄아악!”
뚫린 구멍 너머로 나와 눈이 마주친 귀부인 한 명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겨우 그 정도인가.”
콰콰쾅!
내가 놀란 부인에게 유감을 표하기도 전에 에녹을 비웃듯 입꼬리를 올린 실비가 에녹이 뚫은 구멍 옆에 냅다 제 주먹을 메다꽂는다.
“꺄아아악!”
형제의 연속적인 기물 파손에 자지러진 부인은 결국 보글보글 거품을 물고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자, 잠깐만.”
이런 식으로 힘을 겨루라는 게 아니었다며 내가 설명하려는 순간이었다.
“담벼락이라면 손가락 하나로도 부술 수 있습니다.”
콰르르륵-! 콰드득!
히스가 실비의 반 정도는 될까 싶은 작은 주먹으로 남은 담벼락 전부를 부숴 버리고 말았다.
‘야! 이 미친놈들아~!!!’
황성 근처 공원을 에두른 담벼락이었으니 당연히 공공시설일 텐데, 이걸 부수면 어떡해!
기겁한 나와 루카스의 눈이 순간적으로 마주친다.
‘당연히 애들을 혼내 주겠지?’
나는 루카스의 검붉은 눈에 서린 예기가 아이들을 향한 분노인 줄로만 알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유일한 어른이었으니 분별력이 있으리라 믿은 것이다.
“검을 다룬다면서 완력이 우스운 수준이군.”
그러나 내 기대와 달리 짧게 혀를 찬 루카스는 무너진 담벼락 너머로 드러난 황성의 아치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 안 돼~!!!”
쾅! 콰콰콰-콰쾅!!!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내가 두 뺨을 손으로 감싸 쥔 채 소리를 질렀지만, 뻗어 나간 루카스의 주먹이 상아빛의 우아한 아치문에 꽂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파스스스.
나는 시야를 뿌옇게 물들이는 상아 가루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미친놈들 앞에서 내가 두 번 다시 우나 봐라….’
이튿날 수도 재무청에서 날아온 기물 파손 관련 고지서에 나는 눈물을 머금고 수표를 붙였다.
* * *
[레오노라 공녀, 결국 건물까지 무너뜨린 ‘귀여움 폭발’!]
“귀엽긴 개뿔! 보잘것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한데, 도대체 뭐가 대단하다고 자꾸만 1면에 실어 주는 거야!”
오늘도 일간특급의 1면을 차지한 레오노라의 사진을 와그작 구겨 버린 멜리사는 신경질적으로 탁자를 걷어찼다.
“짜증나는 계집애. 감히 왕녀인 날 부려먹어?”
그녀는 공작을 꼬시기 위해 하차니아의 수도 저택을 몇 번이나 방문했지만,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며 이것저것 심부름이나 시키는 레오노라의 잡일을 도와주느라 공작은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귀엽고 예의바른 척하지만, 속에 능구렁이가 백 마리쯤 들어찬 계집애야! 모두 속고 있는 거라고!!”
속에서 열불이 들끓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발을 쿵쿵 구른 멜리사는 커다란 목소리로 제 딸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카리나!!!”
“네!”
구석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아이는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멜리사가 집어던지는 신문지에 뺨을 얻어맞았다.
“카리나 너! 넌 레오노라 그 계집애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면서 걔처럼 사람들의 관심도 끌지 못하고 도대체 뭐하는 거니?! 내 딸이면서 왜 이렇게 멍청하고 모자란 거냐고!!!”
사라진 황자의 딸로 알려진 카리나가 조금만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도 못 견뎌 하던 건 다름 아닌 멜리사였다.
“죄, 죄송해요!”
해서 멜리사와 함께 파티에 가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늘 구석에 숨어 있던 카리나였지만, 그녀는 제 어미가 무서워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못하고 덜덜 떨리는 몸만 수그렸다.
“죄송해요, 어머니. 제가 더 열심히 해 볼게요.”
“됐어! 너한테 더는 기대도 안 해.”
멜리사는 카리나의 사과에도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며 아이를 현관 밖으로 툭툭 밀어냈다.
“네 아빠한테 가서 양육비나 받아 와.”
“루, 루카스 황자 전하요?”
“뭐?! 누워 있는 전하께서 어떻게 네 양육비를 주겠니? 이 멍청한 년.”
카리나의 생부는 작위는 없지만 꽤 괜찮은 광산을 소유한 보석상이었다.
‘유부남이라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카리나가 루카스 전하의 딸이라고 말하고 다니지 못했을 텐데.’
안도의 한숨을 짧게 내쉰 멜리사는 현관에 오도카니 서 있는 카리나를 노려보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네 아빠가 주는 양육비만 아니면 너 같은 거 진작 길거리에 버렸어. 도움이라곤 쥐뿔도 안 되는 쓸모없는 버러지 같으니.”
“죄송해요, 어머니….”
“후, 너만 없었어도 미켈레 국왕과 결혼할 수 있었을 텐데! 넌 딸이라면서 늘 어미인 내 인생에 걸림돌만 되는구나.”
멜리사의 신랄한 비난에 카리나는 고개를 숙여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애써 감췄다.
우는 것을 들키면 또 짜증 난다고 맞을 게 뻔했으니까.
“죄, 죄송해요, 어머니. 저 금방 다녀올게요.”
카리나, 평소에는 루카스의 이름을 딴 ‘루카리나’라고 불리는 그녀는 생부에게 양육비를 받을 때만 제 진짜 이름을 사용할 수 있었다.
* * *
‘편하게 엄마처럼 대하라면서 제 침실 안은 절대 안 보여 준단 말이야.’
놀고 싶다는 핑계로 멜리사의 저택에 벌써 두 번이나 방문했지만, 왕녀는 제 침실이 위치한 저택의 2층은 절대로 개방하지 않았다.
‘손님으로 온 주제에 멋대로 2층을 올라갈 수도 없고….’
테이블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고민에 빠졌던 나는 시야 안으로 들어오는 소녀의 모습에 활짝 웃으며 손을 들었다.
“루카리나!”
“고, 공녀님.”
나는 내가 주최하는 소녀들을 위한 티파티에 멜리사의 딸을 초대했다.
“어서 와요, 루카리나. 기다렸어요.”
사람들의 이목을 사는 것을 좋아하다 못해 집착하는 관심종자 멜리사와 다르게 루카리나는 내 알은체에 제게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화드득 얼굴을 붉혔다.
“아, 느, 늦어서 죄, 죄송해요.”
“음? 딱히 늦은 건 아닌데요.”
나는 말까지 더듬으며 내게 사과하는 소녀의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초대장에 써 놓은 시각은 오후 세 시였는데 지금은 2시 40분이니까 오히려 일찍 온 거 아닌가?’
“루카리나, 15분이나 일찍 왔어요.”
“아, 죄, 죄송해요. 제가 시간을 잘 몰랐어요.”
걱정 말라고 한 말인데 루카리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거듭 사과한다.
나는 내가 자신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울먹이는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내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나, 화 안 났으니까 사과하지 말고 앉아요. 다과를 내오라고 할게요.”
푹신푹신한 벨벳 소파에 앉힌 다음 달콤하고 따뜻한 밀크티까지 먹인 후에야 루카리나는 겨우 안정을 찾았다.
“하아. 차가 정말 맛있어요, 공녀님.”
“요즘 수도에서 유행한다는 써머가든의 홍차인데, 안 마셔봤나 보네요.”
“죄, 죄송해요…. 제, 제가 평소에 밖에 잘 나가질 않아서요.”
사과할 일도 참 많다.
나는 티파티를 준비한 유리 온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입을 열 때마다 사과 먼저 하는 루카리나의 모습에 미간을 좁혔다.
평소보다 더 기가 죽은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아스라이 아려 온다.
‘오늘도 멜리사에게 학대를 당한 걸까?’
멜리사가 제 분을 못 이기고 방방 뛰다 탐색기를 밟아 버린 탓에 나는 더는 그녀의 저택 내부를 훔쳐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간 지켜본 몇몇 장면만으로도 루카리나가 평소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친모인데 남들에게 도와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겠지.’
“저, 루카리나….”
루카리나의 상황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내가 입을 열려던 순간,
“푸훗! 루카리나, 찻잔을 그렇게 높이 들 때는 찻받침을 같이 드는 거예요.”
아까부터 내 옆에 안고 싶어 안달을 내던 귀족 영애 한 명이 쥘부채를 흔들며 루카리나를 타박한다.
“루카리나가 아무리 제대로 된 예법을 배우지 못했더라도, 제국의 공녀님 앞에서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 주셔야죠.”
아이고, 고상 떨고 앉아 있네.
양쪽에 크루아상처럼 돌돌 만 머리를 달고 있는 소녀는 카이젠 백작가의 차녀로, 이 자리에서 나를 제외하고 가장 계급이 높은 가문의 딸이었다.
“어휴. 그 멜리사 왕녀님의 딸인데 루카리나는 왜 저렇게 볼품이 없는 걸까요?”
나는 제 주변을 둘러싼 영애와 영식들에게 얄미운 말을 속삭이는 소녀를 흘깃하다 내 앞에 찻주전자를 들어올렸다.
벌컥.
벌컥 벌컥 벌컥.
한여름 생맥주 비우듯 주전자 나발을 부는 내 교양 없는 모습에 영애와 영식들이 일제히 숨을 삼킨다.
“카이젠 영애, 그거 알아요?”
탁.
주전자를 소리 나게 테이블에 내려놓은 나는 크루아상 머리를 향해 생긋 웃어 주었다.
“계급 사회란, 윗사람의 말과 태도가 곧 법이자 예절이라는 거.”
어디 공녀 앞에서 백작가 영애가 까불어, 까불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