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85화 (85/486)

제85화

“……루카스.”

내 조심스러운 부름에 서류를 뒤적이던 루카스가 날카로운 턱을 치켜든다.

“그, 있잖아.”

“말해.”

“……아니야. 그냥 불러 봤어.”

“싱겁긴.”

나는 무구한 그의 얼굴에 ‘당신 몸을 찾았다.’는 말을 꿀꺽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몸이 무려 10년 동안이나 미친 스토커의 침대 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끔찍해하겠어.’

차라리 우리가 짐작했던 대로 그레고르가 보관하고 있었더라면 백배천배 나았을 것이다.

루카스의 몸이 멜리사 왕녀에게 있다는 말을 도무지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던 나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졸린 건가?”

“으응. 조금 피곤하네.”

“이만 자러 가지.”

내 대답에 루카스가 집무실 구석에 인형처럼 앉아 있던 나를 달랑 들어 올린다.

“오늘도 같이 자게?”

나는 자연스레 제 침실로 향하는 루카스의 발걸음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가 내 불면증을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닌 탓에 어쩔 수 없지 않나.”

‘아니, 교황이 내가 루카스랑 자는지 안 자는지 매일매일 감시할 것 같지는 않은데….’

거짓말을 했다는 소문이 퍼질까 봐 하루 이틀 정도 같이 잘 계획이었는데 루카스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철저한 사람이었다.

‘뭐, 가스파르랑 자는 것 같아서 나도 잠이 더 잘 오긴 하니까 상관없지만.’

지금보다 더 어릴 때 악몽을 종종 꾸던 나를 가스파르는 요람에서 꺼내 들고 제 옆에서 재우곤 했었다.

루카스의 품은 그때의 안온함이나 다정했던 가스파르의 손길을 떠올리게 했다.

“각하, 오늘도 아가씨께서 재워 주시는 건가요?”

집무실을 나서는 우리를 부럽다는 듯 바라보던 헨리가 서류의 산속에서 삐죽 고개를 내민다.

“부럽다…. 저도 아가씨의 포슬포슬한 뺨을 만지면서 자면 피로가 싸악 가실 것 같은데요.”

“저는 손가락만 잡고 잘 수 있어도 지병이 나을 것 같은데.”

“저, 저는 발가락이라도…!”

나는 헨리를 위시한 행정관들의 말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무슨 마법의 죽부인이라도 되는 줄 아나.’

“흐윽. 각하가 너무 부러워요. 불면증이라면 저도 있는데…!”

나는 손수건을 물어뜯으며 울먹이는 셀리아의 말에 머쓱한 뺨을 긁었다.

‘가문 내에서 입지를 넓히기 위해 어릴 때부터 사람들을 너무 열심히 꼬셔 놨더니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이 생겨 버렸네.’

그래도 수도 저택에는 에녹과 실비가 따라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걔네가 있었으면 분명 자기들도 나랑 같이 자고 싶다고 생떼를 부렸을 거야.’

가주의 침대는 성인 넷이 굴러다녀도 될 만큼 커다랗긴 했지만, 그래도 아이들과 옹기종기 모여 자는 건 불편할 테니까.

“후우. 다행이지, 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풍스러운 침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는 순간,

“뭐가 다행이야, 리니?”

안에서 익숙한 인영이 툭 튀어나온다.

“…에녹?”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떨어진 지 일주일도 안 됐잖아, 이놈아!

나는 나를 와락 껴안으며 우는 소리를 하는 에녹을 밀쳐 내며 눈썹을 꼼톨 움직였다.

“실비도 왔네?”

“그래.”

“어떻게 온 거야? 적랑과 백랑은 서부의 마물 토벌 작전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잖아.”

나는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은 후 곧잘 임무에 투입되던 형제를 올려다보며 의아한 고개를 기울였다.

“너 생일 축하해 주고 싶어서 얼른 해치우고 왔지.”

“…마을 세 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오크 무리를 이렇게 빨리 해치웠다고?”

“응. 별거 없던데?”

경악한 내 물음에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인 에녹이 씨익 웃으며 실비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형, 리니가 가끔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 것 같지 않아?”

“그래. 레오노라, 우리는 네 생각만큼 약하지 않다.”

‘무시하는 게 아니라, 엑스트라 악당 형제 주제에 네들이 너무 강하게 커 버린 거야….’

나는 거의 남주인 트리스탄만큼의 무력을 선보이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고생했어. 나랑 아빠는 이제 자려고.”

“응! 자자!”

내 말에 씩씩하게 대답한 에녹이 나와 루카스보다도 빨리 침대에 드러눕는다.

“에녹도 같이 자려고?”

침대 한가운데를 차지한 에녹의 모습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짓는 와중, 실비가 슬그머니 에녹을 따라 눕는다.

“좁아서 불편할 텐데, 너희는 따로 자는 게 낫지 않을까?”

반 정도 남은 침대를 가리키며 난감하다는 듯 말끝을 흐리자, 루비처럼 예쁜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던 에녹이 느릿느릿 입을 연다.

“하지만 아빠가 불면증을 앓고 계셔서 네가 같이 자 주는 거라면서?”

“응.”

“형이랑 나도 요즘 잠이 잘 안 와.”

“…….”

“마물 토벌이 너무 힘들고 끔찍했어서 트라우마가 생겼나 봐. 악몽도 꾸고. 그치, 형?”

“에녹 말이 맞다.”

‘방금까지는 마물 토벌 따위 식은 죽 먹기였다면서?’

기가 막혔지만, 나는 뻔뻔한 형제의 주장에 어쩔 수 없이 아이들 사이에 몸을 묻었다.

그러자 나를 따라 침대에 다가온 루카스가 내 옆에 누운 에녹의 목덜미를 덥석 집어 든다.

“비켜.”

“아, 왜요! 아빠가 실베스테르 형 옆에서 자면 되잖아요.”

“내 불면증이 가장 심하다.”

‘너 그거 가짜 불면증이잖아~!’

기가 막혔지만, 에녹을 침대 귀퉁이에 던진 루카스는 내 옆에 베개까지 찰싹 붙이고 나서야 눈을 감았다.

“아쒸, 아빠면 다야.”

에녹이 꿍얼거리는 소리를 끝으로 깜깜한, 그러나 따뜻하고 다정한 밤이 찾아들었다.

* * *

루카스의 몸을 찾기 위해 멜리사 왕녀에게 접근할 계획을 짤 필요도 없이, 그녀가 먼저 저택을 방문해 주었다.

“오늘도 사랑스러운 모습이네요, 공녀.”

멜리사가 왔다는 말에 서둘러 응접실로 내려간 나를 마주한 그녀가 환히 웃으며 흑단 같은 제 머리를 쓸어내린다.

“안녕하세요, 왕녀님.”

“공작 각하를 뵙기 위해 찾아왔는데 마침 회의 중이시라고 들었어요. 기다리는 동안 공녀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괜찮나요?”

나는 멜리사의 물음에 떨떠름한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민은 아니지만 귀빈이나 마찬가지인 왕녀의 청을 내가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를 말동무로 삼아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후후. 어린 공녀가 예의도 바르지.”

‘왜 어린 계집애가 발칙도 하지, 하는 것처럼 들리지?’

멜리사의 칭찬에 숨은 가시가 있는 듯해 침을 꼴깍 삼킨 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로제가 준비한 밀크티를 한 모금 삼켰다.

“저, 그런데 아버지께는 무슨 일로…?”

“어머. 아직 어린 공녀님께는 알려 드릴 수 없는 어른들만의 비밀이 있는 법이랍니다.”

‘웃기고 있네.’

나는 멜리사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남몰래 미간을 찌푸리며 오늘자 ‘일간특급’의 헤드라인을 떠올렸다

[북부에서 내려온 한 마리 고독한 검은 늑대!

실종된 노엘 이아론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는 얼음 공작의 하트를 차지하게 될 여인은 과연 누구?!]

지금 루카스, 그러니까 하차니아 공작은 사교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남자였다.

‘아내를 잃고 수절한 미남이라니 여자들이 호감을 품을 만도 하지.’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 멜리사가 그런 루카스를 노리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공작가답게 훌륭한 집사를 두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안주인의 손길이 닿지 않아 어쩐지 쓸쓸한 느낌이 드는 저택이네요.”

나는 고풍스럽다 못해 화려하게 장식된 응접실을 둘러보며 멜리사가 하는 말에 혀를 내둘렀다.

공작부인 자리가 공석인 탓에 이런 멘트라면 지난 5년간 수없이 들었다.

‘이것들은 툭하면 남의 집보고 공허하고 적적하대?’

“공녀, 아직 황도가 낯설기만 할 텐데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주저 없이 내게 말해 줘요. 내가 꼭 도와주고 싶으니까.”

“……네. 정말 감사해요, 왕녀님.”

파티에서 바퀴벌레 모양 추적기를 발견하고 내게 눈을 부릅떴던 건 죄 잊은 모양인지, 멜리사는 촉촉히 젖은 눈가를 닦으며 내 손등을 쓰다듬었다.

“공녀를 보고 있노라면 내 딸이 생각나요. 아빠 없이 자란 가여운 우리 딸…. 공녀도 엄마 품이 얼마나 그리울까요.”

‘딱히 딸을 가엾게 여기는 것 같진 않던데.’

수정구로 엿본 멜리사의 모습을 떠올리며 슬쩍 인상을 찡그리는데, 내 손을 꼭 붙든 왕녀가 울먹이며 말을 잇는다.

“공녀, 날 엄마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예?”

“어려워 말고 날 엄마라고 불러 봐요, 공녀.”

왕녀 같은 싸이코를 엄마라고 여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멜리사는 내게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길 강요하며 눈을 번뜩였다.

“어서 엄마라고 불러 보래도?”

“아, 예에…….”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인 나는 얌전히 오므렸던 다리를 벌러덩 펼치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엄마.”

“그래요! 잘하네.”

“엄마, 나 배고파.”

“……응?”

“밥 좀 해 줘.”

배를 북북 긁으며 내가 하는 말에 멜리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핸드백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아, 그리고 나 새로 나온 장난감 사고 싶으니까 용돈도 줘!”

2